문경새재(聞慶鳥嶺) - (문경세제 X)

우리 나라의 큰 산줄기인 백두대간(白頭大幹)이 태백산, 소백산을 거쳐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죽령을 지나 대미산, 포암산, 주흘산, 조령산, 희양산, 대야산, 청화산, 속리산으로 이어져 소백산맥을 이루어 나간다. 삼국과 고려 때에는 문경 관음리에서 충북 중원군의 수안보로 통하는 큰길인 하늘재(계립령)가 있었고, 문경 각서리에서 괴산군 연풍으로 통하는 소로인 이화령이 1925년 신작로로 개척되어 지금의 국도3호선이 되었다. 옛날에는 1978~1979년 확장 포장된 이우리재(이화령)와 가은에서 충북 괴산으로 연결된 불한령, 문경군 농암에서 충북 삼송으로 다니던 고모령 등이 있어 신라와 고구려, 신라와 백제의 경계를 이루었다고 전한다.
이곳이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조선시대의 가장 큰길[嶺南大路]이었던 곳이며 옛날의 유지(遺址)로는 원터, 교귀정, 봉수터, 성터, 대궐터 등이 잔존하고 있다. 조령로의 번성을 말해 주듯 조령로변의 마애비는 관찰사, 현감 등의 공적을 새겨 놓았으며, 주흘관 뒤에는 선정비, 불망비, 송덕비가 비군(碑群)을 이루고 있다. 주위의 주흘산, 조령산, 부봉과 각 골짜기마다 동·식물자원이 자연 그대로 보존된 관광명소이다.

유래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조령산(鳥嶺山) 마루를 넘는 이 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鳥嶺)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草岾)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 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새(사이)재」, 새(新)로 된 고개의 「새(新)재」 등의 뜻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 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이 곳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유서 깊은 유적과 설화·민요 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이 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 신구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 받았다는 교귀정터만 남아있는 것을 1999년 중창하였고, 옛날에 산불을 막기 위하여 세워진 한글 표석 "산불됴심" 비(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가 남아있다. 그리고 역사에 얽힌 갖가지 전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신립(申砬)장군, 동학(東學)과 의병(義兵)이 남긴 사담(史譚)이 골골이 서리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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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대를 1974년 지방기념물(제18호),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어 전국에서 등산객이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

선비의 상

문경새재는 예로부터 한양과 영남을 이어주던 영남 관문에 위치하여 수 많은 길손들의 애환과 세월의 흔적을 묵묵히 지켜온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곳에 건립된 선비상은 전통사회의 구심점을 이루었던 지성과 인격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끊임없이 미래를 창조하는 아름다운 한국인을 상징한다.

선비상을 중심축으로 하여 그 전면에 둥근 광장을 조성하고 둥근 광장 좌우면에 6면의 부조는 선비와 관련된 전통시를 함께 설치하였다. 이는 선비의 의식과 정신에 관한 내용이며, 광장 중앙 바닥에는 유교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팔괘를 표현하여 선비정신의 기상을 구현하는 광장을 의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중앙 광장 전면의 진입부는 영남대로를 뜻하며 문경새재의 역사성과 소중한 길문화를 잘 나타내고 있다.

<진입부> 地(음) 영남대로와 영남선비의 과거길을 의미

<전개부> 天(양) 만물의 근원인 우주와 유교의 정신을 상징하는 주역의 팔괘, 선비의 일대기, 선비의 정신을 구현하는 광장

<완성부> 人(선비) 이상적인 인간상   

天地人은 음양의 화합으로 이상적인 인간상을 실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음.

선정비(善政碑) 및 불망비(不忘碑)

비는 왕이 승하하면 장사 지내고 신하들이 임금의 덕과 공을 찬양하기 위하여 세우는 것이 원칙이다. 이 돌은 공덕을 표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고인들은 왕의 송덕비를 세웠다. 이것을 모방하여 군수나 현감에 대하여 참으로 그들의 시책이 잘 되어야만 비를 세워 공덕을 잊지 않게 하였다.

중국의 후한 때 오장이 군의 태수로 선정을 하였기 때문에 그가 죽은 뒤 묘 앞에 선정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것이 선정비의 시초가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충렬왕 때 양리(良吏) 최석이 선정을 하여 팔마비(八馬碑)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것이 또한 우리나라의 선정비의 시초인 듯 하다.

선정비의 글은 대개 일치하여 전 군수 누구의 영세불망(永世不忘)이니 송덕이니 하는 문자를 새겼다. 그 중 크고 글도 많이 새겨져 있는 것이 어쩌면 백성을 많이 울린 표본이 되기도 한다.어느 곳을 막론하고 예전 읍자리에 아직 십여개 혹은 수십개의 비석이 서 있어 선정의 허욕을 장식하고 있다. 선정비를 더욱 간수하고 옥석(玉石)을 가려 보관할 것을 보관하면 그래도 선인들의 뜻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1관문 뒤에는 당초 있던 비석과 관내에서 발견된 몇 기의 비석을 옮겨 20여기가 있다.

여러 비석들 중 이 철비가 가장 눈에 들어왔다.

철비의 이름은 <홍로영 현감 철비>이다.

1824년에서 1827년까지 문경현감을 역임한 홍로영의 비석으로 1826년(순조 26)에 건립한 것이다.

바닥돌 위에 비몸과 지붕을 함께 주물기법으로 제작하였으며,

도드라진 글씨로 '현감홍후로영여세불망비'라 새겨놓았다.

대부분의 비석이 돌로 만든 것인데 비해 무쇠로 만든 보기 드문 비석이다.

조령산성

1966년 3월 22일 사적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제1·제2·제3관문 및 부속성벽이다. 옛날에 영남에서 서울로 가려면 문경에서 주흘산(主屹山:1,106m)을 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신라 때는 주흘산의 한 갈래인 대촉산(黛蜀山)을 넘어 계립령(鷄立嶺)으로 다녔고 조선 전기부터는 조령이 개척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남으로써 이곳에 중국의 산해관(山海關)과 같은 방위시설을 축조해야 한다는 논의를 낳았다. 현지 실측(實測)이 시행되고, 1594년(선조 27)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였다.

충주 사람으로 수문장(守門將) 출신인 신충원(辛忠元)이 조정의 결정에 앞서 조령에 머물면서 단독으로 설관(設關)에 착수하였다. 그가 이루어놓은 첫번째 시설이 지금의 중성(中城)이다. 중성은 1708년(숙종 34) 크게 중창(重創)되었는데, 이것이 곧 제2관문이다.

숙종 때 제2관문에서 3km 떨어진 곳의 남적(南賊)을 방비할 제1관문을 세우고 초곡성(草谷城:主屹關)이라 하였다. 이들은 1890년대에 다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육축(陸築)에는 홍예문(紅霓門)을 열고, 성벽에는 총구멍이 있는 성가퀴를 돌리고, 한쪽에 큼직한 수구문(水口門)을 뚫었다.

숙종 때 조령 재 위에 북적(北賊)을 막기 위하여 조령산성(鳥嶺山城)을 쌓았다. 이것이 곧 제3관문으로 현재 경북과 충북의 경계에 위치한다. 제3관문은 육축만 남겨 놓은 채 불타버려 1977년 복원하였다.

제1·제2·제3관문은 양쪽 산의 골짜기에 위치하며 관문 좌우의 성벽은 능선을 따라 우회한다. 높은 봉우리 6분선(分線)에서 끝났다가 다음 골짜기에서 다시 이어져 초곡성·중성·조령산성의 성벽을 이룬다. 동화원(桐華院)을 비롯하여 진(鎭)과 군창(軍倉)의 터가 있고, 경상감사(慶尙監司) 신임·후임자가 서로 교인(交印)했다는 교구정(交龜亭)의 터도 남아 있다. 문경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주흘관(초곡성)
주흘관(主屹關)-영남제1관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숙종 34년(1708)에 설관 하였으며 영남 제1관 또는 주흘관이라고 한다. 정면 3칸(間)과 측면 2칸 협문 2개가 있고 팔작(八作)지붕이며 홍예문은 높이가 3.6m, 폭 3.4m, 길이 5.4m이며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이다. 좌우의 석성은 높이 4.5m, 폭 3.4m, 길이 188m이고, 부속 성벽은 높이가 1~3m, 폭 2~4m이다. 길이는 동측이 500m, 서측이 400m로 개울물을 흘러 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지니고 있다.
 
조곡관(중성)

조곡관(鳥谷關)-영남제2관

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한 곳으로 중성(中城) 이라고도 한다.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關)은 영성(嶺城 : 3관문)과 초곡성(草谷城 : 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鳥東門) 또는 주서문(主西門)을 설치하였다.

그후 1907년에 훼손되어 1975년에 복원하였다. 이렇게 복원한 문루를 옛 이름 조동문(鳥東門)이라 하지 않고 조곡관(鳥谷關)이라 개칭하였다.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고, 팔작(八作)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가 3.6m, 길이 5.8m이다.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이다. 좌우의 석성 높이는 4.5m, 폭 3.3m, 길이 73m이고, 좌우의 성벽의 높이는 2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100m이다.
 
조령관(조령산성)

조령관(鳥嶺關)-영남제3관

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선조 초에 쌓고 숙종(숙종 34년 : 1708) 때 중창하였다.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陸築)만 남고 불탄 것을 1976년도에 홍예문 및 석성 135m와 누각을 복원했다.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으며 팔작(八作)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 4.5m, 폭 3.2m, 길이 185m이고 성벽의 높이는2~3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400m이며 대문의 높이는 3.9m, 폭 3.56m 두께 19㎝이다.
 
경상도 쪽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길에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초곡성의 주흘관 모습이 멀리 보인다.

성벽 왼쪽 편으로는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홍예교 건설이 한창이었다.

성벽 앞에는 홀로 있어도 전혀 외로워 보이지 않을 만큼 큰 감나무 하나가 이 가을과 무척 잘 어우러졌다.

주흘관 아래 홍예문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따뜻한 날씨 덕에 문경새재를 찾은 많은 등산객들의 발길로 주흘관 문턱이 다 닿을 것만 같았다.

다른 성벽에서는 보기 힘든 특이한 수구문이 홍예문 오른쪽 성벽 아래 자리하고 있었다.

이 수구문을 보니 갑자기 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이가 궁궐 수구문을 뚫고 궐 밖으로 빠져나오던 장면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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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의 유래와 풍습

가장 기독교적인 것은 가장 이교적인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연중 최고 명절인 크리스마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이 날은 사실, 아기 예수와 상관없는 날이다. 고대 이교도들의 태양 축제에서  시작된 크리스마스의 유래와 풍습을 살펴본다.



☆ 12월 25일은 그리스도의 탄생일 아닌 본디 태양신 탄생일

☆ 크리스마스 트리는 고대 '나무 정령'신앙에서 유래   

☆ 산타클로스는 전설 속 성(聖) 니콜라스의 화려한 변신



12월이 되면 전세계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거리에는 캐롤이 흐르고 백화점과 시가 중심의 광장에는 휘황찬란한 전구가 빛나는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져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TV나 행사장에서는 붉은 옷에 흰 수염을 한 산타클로스가 어린이들을 흥겹게 해 준다. 굳이 기독교국가가 아니라도 볼 수 있는 이런 풍경들은 이미 세계적인 명절로 자리잡고 있는 크리스마스 축제의 단면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 저녁부터 이튿날인 25일까지 교회와 성당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연극 등 다채로운 행사와 함께 예배 또는 미사를  한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는 원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무관하다. 고대 여러 이방 종교의 풍습이 기독교 속에 면면히 녹아 흐르는 명절이 바로 오늘날 세계인들이 즐기는 크리스마스 축제다.



12월 25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 아닌 태양신 탄생일

전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일로 기념하는 날은 12월  25일뿐만이 아니다. 아르메니아의 기독교와 일부 지역에서는 1월 6일에 성탄을 축하한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성탄 축하 행사에 대한 필요성을 별반 느끼지 않았다. 3세기 초기만 해도 그리스도의 탄생일에 대해 3월 28일, 4월 2일, 4월 19일, 5월 20일 등 다양한 견해가 있었다. 그러다가 로마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4세기 초, 예수 탄생 축하는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러면 왜 느닷없이 12월 25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알려지게 되었을까? 로마에서는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 '새터날리아'(Saturnalia)라고 불리는 큰 축제가 있었다. 이 날에는 농경신 새턴이 다스렸다는 황금시대를  기념하는 의미로 새턴에게 제물을 바치고 풍작에 감사하며 한 해의 수확을 축하하는 대규모 잔치가 벌어졌다. 사람들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실컷 먹고 마시며 환락에 취했고 선물을 주고받았다.


새터날리아가 끝나고 다음날인 12월 25일은 고대 로마의 달력으로 일년  중 낮이 가장 짧은 동짓날이다. 페르시아에서 유입되어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될 당시까지 기독교와 경쟁하며 귀족들과 군인층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트라교에서는 이 날을 '의로운 태양'인 미트라가 새로 탄생하는 날로 여겼다. 274년, 태양신 미트라를 열렬히 숭배했던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재위 270~275)는 12월 25일을 '정복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naltalis solis invicti)라고 명명하여 축제일로 정했다. '다가오는 한 해 동안 너희에게 빛을 주노라'라는 국가적인 축하  메시지가 발표되는 이 날은 로마의 연중 최대 축제일이었다.


로마교회(카톨릭)에서는 로마인들의 축제에 대해 별다른 축하할 만한 날을 모색하게 되었고,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이 태양이 태어난 날에 이루어졌다는 것이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이에 로마교회는 로마인들의  미트라 신앙을 타파한다는 명분으로 태양신 탄생일이었던 12월 25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바꾸어 명명했다. 12월 25일에 성탄 축하 행사를  거행한 것은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354년에 처음 나타난다. 이렇게 해서 로마에서부터 시작된 크리스마스는 379년, 콘스탄티노플에서도 축하하였고 이집트, 팔레스틴 지방을 거쳐 전세계에 전파되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탄생일은 언제쯤일까? 아쉽게도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이 기록된 4복음서 어디에도 그의 탄생일이 나타나 있지 않다. 역사학자들은 대략 3~4월경, 그러니까  겨울이 아닌 봄에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고대 나무 정령 신앙에서 유래

12월이 되면 전나무 같은 적당한 크기의 상록수들은 때아닌 호사를 누린다. 눈과 비슷한 솜, 촛불, 종, 별, 전구, 인형, 선물상자 같은 것들로 치장되어 전신을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는 크리스마스 축제를 알리는 필수품.
크리스마스 트리로는 전나무 같은 상록수가 애용되었는데 교회 앞마다, 집집마다 가지가 곧은 상록수를 손질하여 갖가지 장식을 하는 모습은 기독교국에서뿐 아니라 이제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곳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크리스마스와 나무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일설에 따르면 8세기경 독일에 파견된 선교사가 떡갈나무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현지인들의 야만적 풍습을 중지시키기 위해 옆의 전나무를 가리키며 '이 나무 가지를 가지고 집에 돌아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라'고 설교한 데서부터 비롯되어 '크리스마스 트리'로 전나무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래를 따져보면 크리스마스 트리는 크리스마스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보다 이교적인 풍습에서 등장한다. 애니미즘(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사상)을 믿던 원시인들은 나무를 숭배하였고, 신을 모시기 위해 나무를 가정에 들여놓기도 했다.

이집트인들은 대추야자나무를 집안에 들여놓았고, 드루이드교를 믿던 켈트족들은 오딘 신을 숭배하기 위해 참나무에 금박의 사과를 매달거나 헌물들을 바쳤다. 나무에 치장하는 풍습은 우리나라의 무속신앙에서도  고목에 오색 천을 매달고 신성시했던 데에서 엿볼 수 있다.


로마인들도 나무를 숭배하였다. 크리스마스가 축제일로 제정되던 당시, 로마인들은 새터날리아 축제 기간 중에 완구와 장신구 따위로 나무를 장식하였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가 로마제국에서 큰 축제로 자리잡자 이들은 나무에 치장하는 풍습을 크리스마스 축제의 일환으로 즐기게 되었다. 고대 부족들에게 생명의 상징이었던 상록수는 길고 어두운 겨울밤이 지난 후 세상에 새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재해석되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종교개혁 이후 등장한 개신교에서 본격적으로 수용되었다. 16세기 독일에서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방안에 나무를 세우고 나무에다 하늘의 별을 상징하는 촛불을 켠 이래로 크리스마스 트리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보편화되었다. 이후 근세에 이르기까지 유럽과 미주지역에 크리스마스 트리 풍습은 전반적으로 확대되었다.


1926년,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높이 80미터에 수령 3천5백 년이 넘는 세쿼이어 거목을 크리스마스 트리로 장식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96년 12월,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888만 5588달러에 해당하는 시계와 보석 장식이 달린 세계 최고가 장식의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져 기네스북에 올랐다.



산타클로스는 전설 속 '성 니콜라스'의 화려한 변신

어린이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가장 큰 이유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경하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사슴이  끄는 수레를 타고 온다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빨간 옷에 희고 멋진 수염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메고 있는 보따리 속의 선물에 대한 기대 때문일 것이다.


'산타클로스'라는 이름의 원형은 '성 니콜라스'에서 유래되었다. 3세기 말의 실존인물이었던 그는 지중해 연안 소아시아의 한 도시에 살던 주교로서, 남몰래 선행을 베풀기를 좋아했으며 어린이를 특히 사랑했다고 알려져 카톨릭교회에서 어린이를 보호하는 성자로 시성되었다.

13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성 니콜라스―네덜란드식 발음으로 신트 클라우스(Sint Klaus)―에 대한 특별한 신앙이 퍼졌다. 그가 백마를 타고 다니면서 착한 아이들에게는 선물바구니를, 장난꾸러기 악동들에게는 자작나무 막대기 한 다발을 준다는 것이다.


신대륙 발견 후 미국으로 이주한 네덜란드인들은 뉴 암스테르담(뉴욕의 옛 이름)에 자신들의 신앙을 가지고 갔다. 성 니콜라스 교회를 짓고, 성 니콜라스의 상(像)도 가져갔던 이들로 인해 뉴 암스테르담이 영국에 점령되어 뉴욕으로 개칭된 후에도 성 니콜라스에 대한 전설은 약간의 변화를 거치면서 계속 전해졌다. 영국에서 이주한 뉴욕의 시민들은 네덜란드 말인 '신트 클라우스'를 '산타클로스'라고 발음했고, 원래 성자의 외모와 상관없이 키가 작고 뚱뚱한 네덜란드인들의 모습에서 산타클로스의 모습을 찾으려 했다.


19세기 초부터 미국의 문학가들이 산타클로스를 사슴이 끄는 썰매를 타고 하늘을 나는  뚱뚱하고 유쾌한 할아버지로 묘사했다. 1863년, 어느 유명한 만화가는 산타클로스에게  모피로 장식한 붉은색 코트를 입혔다. 이렇게 이미지가 변화되고 고정된 산타클로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치고 어린이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크리스마스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퍼지고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받는 풍습은 전세계의 보편적인 크리스마스 풍습이다. 크리스마스에 양말을 매달아 놓는 풍습은 성 니콜라스의 전설에서 유래한다. 크리스마스 때 장식용으로 널리 쓰이는 호랑가시나무는 옛적 로마에서 새턴 신의 성스러운 상징으로 여겨져 새터날리아 축제에서 건강과 행복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그리스도 희생의 상징으로 의미가 바뀌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풍습도 지역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에서 크리스마스 트리가 크리스마스의 주요 상징물이라면 남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 구유를  만들어 상징물로 삼는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여러 나라들과 영미 지역에는 크리스마스 전날에 굵은 장작을 때는 풍습도 있는데, 이는 고대 켈트족과 튜튼족이 태양의 신생(新生)을 기념하면서 큰 모닥불을 피우던 이교 의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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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담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근거가 있습니다.

까치는 동네 어귀의 높은 나무나 예전의 전봇대 등에 둥지를 틀고 살아갑니다. 이 까치는 시각이 사람보다 발달했고 후각 역시 사람보다 뛰어나서 주위의 냄새는 물론 사람의 냄새도 기억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에 늘 드나드는 마을 사람이나 마을의 짐승을 멀리서도 알아볼 수가 있고 그 냄새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에 낮선 사람이 들어오거나 다른 짐승이 마을에 들어오면 어김없이 냄새로 '낯선 것'임을 파악하고 경계의 표시로 울어댄다고 합니다.

따라서 까치가 갑자기 울어대면 틀림없이 평상시와는 다른 냄새를 맡았다는 표식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까치가 함께 살 정도의 마을이라면 시골일테니까 사람들의 왕래도 뜸할 테고 더더욱 낯선 이들은 거의 왕래가 없었을 것입니다.

혹 누군가가 이런 마을을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면 친척이든 자녀들이든 관계가 있는 사람일 테고 그렇기 때문에 반가운 만남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보는 겁니다.

까치의 능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예지 능력도 얼마만큼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살고 있는 나무에 이상이 올 경우, 날씨 관계로 또는 폭우로 인해서든 벼락을 맞든 지진이 일어나든 아니면 어떤 다른 천재지변이 일어나든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위험에 처하게 되면 이를 미리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 징후가 포착되면 까치는 자기가 살던 둥지를 미련없이 버리고 안전한 곳으로 둥지를 옮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까치가 높은 나뭇가지에 둥지를 틀고 한가롭게 지내면 그 해는 날씨도 좋고 풍년이 들 거란 점도 쳐보곤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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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날의 어원

설이란 새해의 첫머리란 뜻이고 설날은 그 중에서도 첫날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설날의 어원에 대해서는 대개 세가지 정도의 설이 있다. 우선, 설날을 '낯설다'라는 말의 어근인 "설"에서 그 어원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설날은 '새해에 대한 낯설음'이라는 의미와 '아직 익숙하지 않는 날'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즉 설 날은 묵은해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해에 통합되어 가는 전이 과정으로, 아직 완전히 새해에 통합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익숙하지 못한 그러한 단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설날은 "선날" 즉 개시(開始)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에서 '새해 새날이 시작되는 날' 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선날"이 시간이 흐르면서 연음화(連音化)되어 설날로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설날을 "삼가다[謹愼]" 또는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라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 이는 설날을 한자어로 신일(愼日)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신일이란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란 뜻인데, 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간 질서에 통합되지 않았기 때 문에 인간의 모든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생긴 말이다. 한편 설날은 원일(元日)·원단(元旦)·정조(正朝)·세수(歲首), 세초(歲初)·세시(歲時)·연두(年 頭)·연시(年始) 등의 한자어로도 불린다.


2. 설날의 유래

설날이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로 여겨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설날을 명절로 삼기 위해서는 우선 역법(曆法)이 제정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설날의 유래는 역법의 제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나라가 나름대로의 역법을 가지고 있었음은 중국인들도 진작 인정하고 있었다.《삼국지 (三國志)》에 이미 부여족이 역법을 사용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신라 문무왕 대에는 중국에서 역술을 익혀와 조력(造曆)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미루어 보더라도 우리 민족은 단순한 중국 역법의 모방이 아니라 자생적인 민속력이나 자연력을 가졌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또 신라의 독자적인 명절이라 할 수 있는 가위[嘉俳]나 수릿날의 풍속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우리 민족이 고유한 역법을 가졌을 가능성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현단계에서는 중국 전래의 태양태음력이나 간지법(干支法) 이외에 우리 고유의 역법 제정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설날은 적어도 6세기 이전에 중국에서 태양태음력을 받아들인 이후 태양력을 기준으로 제정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도 설날의 유래를 추측해 볼 수 있다.《수서(隨書)》를 비롯한 중국의 사서들에는 신라인들이 원일(元日)의 아침에 서로 하례하며 왕이 잔치를 베풀어 군신을 모아 회연하고, 이날 일월신을 배례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삼국사기(三國史記)》〈제사〉편에는 백제 고이왕 5년(238) 정월에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으며, 책계왕 2년(287) 정월에는 시조 동명왕 사당에 배알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정월 제사가 오늘날의 설과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미 이때부터 정월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설날과의 유사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제36대 혜공왕(765∼780) 때에 오묘(五廟:태종왕, 문무왕, 미추왕, 혜공왕의 조부와 부)를 제정하고 1년에 6회씩 성대하고도 깨끗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정월 2일과 정월 5일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설날의 풍속이 형성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설과 정월 대보름·삼짇날·팔관회·한식·단오·추석·중구·동지를 9대 명절로 삼았으며, 조선시대에는 설날과 한식·단오·추석을 4대 명절이라 하였으니, 이미 이 시대에는 설이 오늘날과 같이 우리 민족의 중요한 명절로 확고히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3. 설날의 풍속

설날의 세시풍속으로는 차례, 세배, 설빔, 덕담, 문안비, 설그림, 복조리 걸기, 야광귀 쫓기, 청참, 윷놀이, 널뛰기, 머리카락 태우기 등 그 종류가 상당히 다양하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몇 가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설날 차례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이 각 가정에서는 대청마루나 큰방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제상 뒤에는 병풍을 둘러치고 제상에는 설음식[歲饌]을 갖추어 놓는다.

조상의 신주(神主), 곧 지방(紙榜)은 병풍에 붙이거나 위패일 경우에는 제상 위에 세워 놓고 차례를 지낸다. 차례상을 차리는 방법은 가가례(家家禮)라 하여 지방이나 가문에 따라 다른데, 대체로 차례상 앞 첫째 줄에는 과일을 놓는다. 이때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는다.

둘째 줄에는 채(菜)나 나물류를 놓는데, 포(脯)는 왼편에 식혜는 오른편에 놓고, 또 마른 것은 왼편에 젖은 것은 오른편에 놓으며, 나물류인 김치·청장(淸漿)·숙채(熟菜)는 가운데에 놓는다.

세째 줄에는 탕(湯)을 놓는데, 다섯 가지 맛을 갖춘 탕으로 단탕(單湯)·삼탕(三湯)·오탕(五湯)·칠탕(七湯) 등이라 하여 어탕 (魚湯)은 동쪽에 육탕(肉湯)은 서쪽에 소탕(蔬湯)은 가운데에 놓는다. 네째 줄에는 적(炙:불에 굽 거나 찐 것)과 전(煎:기름에 튀긴 것)을 벌여 놓는데, 어류는 동쪽에, 육류는 서쪽에 놓는다. 이 때 생선의 머리는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으로 향하게 한다.

다섯째 줄에는 밥과 국을 놓는데, 밥은 왼쪽에, 국은 오른쪽에, 또 떡은 오른쪽에 면(麵)은 왼쪽에 놓는다.

(2) 세배

설날 차례를 마친 뒤 조부모·부모에게 절하고 새해 인사를 올리며, 가족끼리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절하는데, 이를 세배(歲拜)라 한다. 세배가 끝나면 차례를 지낸 설음식으로 아침 식사를 마친 뒤에 일가 친척과 이웃 어른들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린다.

세배하러 온 사람이 어른일 때에는 술과 음식을 내어놓는 것이 관례이나, 아이들에게는 술을 주지 않고 세뱃돈과 떡, 과일 등을 준다.

(3) 설빔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새옷을 갈아입는데, 이것을 설빔[歲粧]이라고 한다. 이 설빔은 대보름까지 입는 것이 보통이다.《열양세시기(洌 陽歲時記)》원일(元日)조에 따르면 남녀노소가 모두 새옷을 입는 것을 '세비음(歲庇陰)[설빔]'이라 한다 하였다.

(4) 덕담

덕담(德談)이란, 설날에 일가 친척들과 친구 등을 만났을 때 "과세 안녕히 하셨습니까?"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새해에는 아들 낳기를 빕니다." 등과 같이 그 사람의 신분 또는 장유 (長幼)의 차이에 따라 소원하는 일로 서로 축하하는 것을 말한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원일 (元日)조에도 설날부터 사흘 동안 시내의 모든 남녀들이 왕래하느라고 떠들썩하고, 울긋불긋한 옷 차림이 길거리에 빛나며,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웃으면서 "새해에 안녕하시오?" 하고 좋은 일을 들추어 하례한다.

예컨대 아들을 낳으시라든지, 승진하시라든지, 병환이 꼭 나으시라든지, 돈을 많이 벌라는 말을 하는데 이를 덕담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원일(元日)조에 연소한 친구를 만나면 "올해는 꼭 과거에 합격하시오." "부디 승진하시오." "생남 하시오." "돈을 많이 버시오." 하는 등의 말을 하는데, 서로 축하하는 이 말을 덕담이라 한다고 하였다.

(5) 문안비

설날에 여자는 세배를 하러 돌아다니지 않으나, 중류 이상 양반 가문의 부인들은 자기 대신으로 잘 차려 입은 젊은 여종을 일가친척이나 그 밖의 관계 있는 집에 보내어 새해 인사를 전갈(傳喝)하는데, 이때 새해 인사를 다니는 계집종을 일컬어 문안비(問安婢)라 한다. 문안을 받는 집에서는 반드시 문안비에게 세배상을 한 상 차려주며, 또 약간의 세뱃돈도 준다.

(6) 설그림[歲畵]

조선조 말까지의 풍속에, 설날 도화서(圖畵署:그림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서) 에서 수성(壽星) 선녀와 직일신장(直日神將)을 그려서 임금에게 드리고, 또 서로 선물로 주기도 하는데, 이를 '설그림(歲畵)'이라고 한다. 이는 축수(祝壽)하는 뜻을 표시하는 것이다. 수성이란 장 수를 맡은 노인성(老人星)을 말하는 것이고, 직일신장은 그날을 담당한 신인데, 이는 모두 도교의 신이다.

한 사람은 도끼를, 한 사람은 절월(節鉞)을 들고 황금 갑옷을 입은 두 장군의 화상(畵像)을 한 자 남짓 되게 그려서 대궐문 양쪽에 붙이는데, 이것을 '문배(門排)' 또는 설그림이라고 한다.

또한 붉은 도포와 검은 사모를 쓴 형상을 그려 대궐의 겹대문에 붙이기도 하며, 종규가 귀신 잡는 형상을 그려서 문에 붙이고, 또 귀신의 머리를 그려 문설주에 붙이니, 이것들은 다 사기(邪氣) 와 역신을 물리치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궁가(宮家)와 척리(戚里:임금의 內戚·外戚) 집 문짝에도 붙이니, 여염집에서도 이를 본받아 그림을 문에 붙였던 것이다.

(7) 복조리

설날 이른 아침 또는 섣달 그믐날 밤 자정이 지나서,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어 엮어서 만든 조리를 사서 벽에 걸어 두는 습속이 있는데, 이것을 복조리라고 한다. 전국에서 조리 장사가 이것을 팔기 위하여 초하루 전날 밤부터 밤새도록 인가 골목을 돌아다닌다.

이러한 풍속은 조리가 쌀을 이는 기구이므로 그해의 행운을 조리로 일어 취한다는 뜻에서 비롯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설날에 1년 동안 사용할 조리를 그 수량대로 사서 방 한쪽 구석이나 대청 한 귀퉁이에 걸어 두고 하나씩 사용하면 1년 동안 복이 많이 들어온다는 민간 신앙도 있다.

(8) 야광귀 쫓기

설날 밤에 야광(夜光)이라는 귀신이 인가에 들어와 사람들의 신을 신어 보아서 자기 발에 맞으면 신고 간다는 속설이 있는데, 만일 신을 잃어버리면 신 임자는 그해 운수가 나쁘 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두 신을 방안에 들여놓는다. 이날 밤에는 모두 불을 끄고 일찍 자는데, 야광귀를 막기 위해 대문 위에다 체를 걸어 두니, 이것은 야광귀가 와서 체의 구멍을 세어 보다가 잘못 세어 다시 또 세고, 세고 하다가 신을 신어 보는 것을 잊어버리고, 새벽닭이 울면 물러가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9) 청참

새해 첫새벽에 거리로 나가 방향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사람의 소리든 짐승의 소리든 처음 들리는 그 소리로써 그해 1년 중 자기의 신수(身數)를 점치는데, 이것을 청참(聽讖)이라고 한다. 까치 소리를 들으면 그해는 풍년이 들고 행운이 오며, 참새 소리나 까마귀 소리를 들으면 흉년이 들고 불행이 올 조짐이라고 한다. 그리고 먼 데서 사람의 소리를 들으면 풍년도 아니고 흉년도 아닌 평년작이 들고, 행운도 불행도 없이 지낸다고 한다.

4. 설날의 시절음식

설날의 음식을 통틀어 '설음식' 또는 '세찬(歲饌)'이라 하고 설날의 술을 '설술[歲酒]'이라고 한다. 설음식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떡국이다. 떡국은 흰쌀을 빻아서 가는 체로 치고 그 쌀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찐 후 안반에 쏟아 놓고 떡메로 수없이 쳐서 찰지게 한 다음, 한덩어리씩 떼어가지고 손으로 비벼 그것을 굵다란 양초가락만큼씩 길게 만든다.
이것을 타원형으로 얇게 썰어서 장국에 넣어 끓이고, 쇠고기·꿩고기로 꾸미하여 후추가루를 뿌린다. 이것은 정월 초하루 제사때 에 제물(祭物)로도 차리고 또 손님에게도 낸다. 설날의 떡국은 지금은 쇠고기나 닭고기로도 끓이지만 옛날에는 꿩고기로 많이 하였다.

설날에 흰 떡국을 끓여 먹는 것은 고대의 태양숭배 신앙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설날은 새해의 첫날이므로 밝음의 표시로 흰색의 떡을 사용한 것이며, 떡국의 떡을 둥글게 하는 것은 태 양의 둥근 것을 상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설날에 마시는 술은 데우지 않고 찬 술을 마시는데,《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술을 데우지 않는 것은 봄을 맞이하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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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팥죽의 유래(이야기)

신라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젊은선비가 살았는데 사람은 참으로 진실하였으나 집안이 궁핍하였습니다.

어느날...과객이 찾아와 하룻밤을 묵어가고자 하여 쉬어가게하니 다음날 새벽길을 나서기에 앞서 그 과객은 선비에게 서로 친구가 되자고 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그 과객은 선비에게 종종 찾아와 내년에 벼를 심으라하면 벼가 풍년이 들고 고추를 심으라 하여 고추를 심으면 고추농사가 풍년이 되는 등...수 년간 많은재산을 모으게 하여 그 선비를 부자로 만들어 주었답니다.

허나..이상한 것이 그 과객은 늘 한 밤 중에 찾아와서는 날이 새기 전에 닭이 울면 사라 졌습니다. 주인인 선비는 재물은 남 부러울 것없이 많이 모았으나.. 세월이 갈 수록 몸이 계속 야위어가더니 마침내 몸이 아파오기 시작 했습니다.

병색이 너무나 심하게 짙어지자 그 선비는 어느 스님께 여쭈어 보았는데 스님께서는 그 과객에게 싫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 보라 하였습니다.

그 과객은 백마의 피를 가장 싫어 한다 하였습니다.

결국 선비는 자기집에 백마를 잡아 온 집안 구석구석에 백마의 피를 뿌렸더니 그 동안 친절하던 과객이 도깨비로 변해 도망을 가면서 선비에게 저주를 퍼붓는것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후에 이상한 일이 일어 났지 뭡니까. 그 선비는 건강이 다 좋아졌지만 해마다 동짓날이면 이 과객이 잊지않고 찾아오는지라

젊은 선비가 스님께 해마다 백마를 잡아서 피를 바를수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방도를 묻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그렇다면 팥물이 백마의 피와 색깔이 같으니 백마의 피대신 팥죽을 쑤어 그것을 집에 뿌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동짓날 팥죽을 끊이는 유래라고 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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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의 유래  
 
 
 중국인은 역사적으로 나라가 망하면 여자의 탓이라고 구차하게 변명해왔으며 그 죄를 여자들에게 뒤집어 씌웠다. 예하면 하나라(夏朝)는 매희(梅姬)가 망쳤고, 은나라(殷朝)는 달기(妲己)가 망쳤으며, 주나라(周朝)는 포사(褒姒)가 망쳤다고 했다. 안사의 난(安史之亂)은 양귀비로 말미암아 일어났으며, 청말 8국의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쑥대밭이 된 것은 자희태후(慈喜太后)가 시비를 불러일으킨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여자를 암탉에 비유하고 여자의 목소리가 높으면 집안이 망한다는 의미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전해 내려왔고 또 속담으로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속담은 언제 어떻게 어떤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널리 전파케 되었는가에 대해 살펴보자.


고대사회에서 왕조가 교체될 때, 전 왕조를 뒤엎으려면 반드시 명분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주무왕(周武王)이 은주(殷紂)의 정벌에 나서면서 군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분을 걸고 호소했다.


 “나를 따른 제후와 용사들이여, 이제 창과 칼을 들어라. 옛 사람들이 이르기를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다. 지금 주왕(紂王)은 여색에 빠져 스스로 제 집안을 망치고 백성을 못살게 굴고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다. 나는 삼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주왕을 치러하는 것이니라.······”


주무왕이 이런 명분을 내건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은의 주왕은 하의 걸(傑)처럼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있었다. 걸왕에게 매희가 있었다면 주왕에게는 달기가 있었다. 이 두 여인은 모두 유소씨 나라에서 헌상한 절세의 미인이었으며 욕망은 끝이 없었다.


주왕은 달기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가혹한 세금을 걷어 들이고 무자비하게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해 들였다. 이리하여 궁중에는 재물이 가득 차게 되었고 술은 못을 이루고 고기는 숲을 이룰 정도로 넘쳐났다. 또 호화찬란한 궁전을 짓고 동산과 못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음탕한 음악에 맞추어 실 한 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나체의 젊은 남녀들이 주지(酒池)를 돌면서 서로 쫓고 쫓기며 미친 듯이 춤을 춘다. 이 광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황홀경에 빠지면서 연못의 술을 들이 키고 숲의 고기를 미친 듯이 뜯어 먹는다.


이런 미친 짓을 구경하면서 주왕의 몸에 자신을 맡기는 달기는 그제야 얼굴에 음탕한 만족의 빛을 드러냈다. 이 미치광이의 연화는 120일이나 주야로 계속되어 이를 ‘장야의 음(長夜之飮)’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옛날 고구려, 부여, 마한, 진한, 동예 등 동이족이 제천의식을 거행할 때 있었던 ‘연일음주가무’는 ‘장야의 음’에 비해 새발의 피였다.


 600년 역사를 자랑하던 은왕조가 주왕이 달기의 끝없는 욕망을 채워주려는 데서 썩을 대로 썩어 결국 주무왕에 의해 전복되고 말았다.


위 이야기는 <<사기>>에 실려 있으며, 본래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은 매희나 달기처럼 무릇 왕에게 방탕하고 음탕한 욕망을 채우려고 청하는 말을 왕이 다 들어주기 위해 나라를 망쳐 먹은 데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훗날 유교가 정착됨에 따라 현모양처들의 올바른 말일지라도 남존여비의 무기를 들고 무작정 여성들을 억누르려고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을 사용해왔다.


요즘에는 ‘수탉이 홰를 치면 먼지만 날리지만 암탉이 울면 알이라도 남긴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금알을 낳는다.’는 등 말들이 유행되고 있다. 이는 여성들이 사회참여도가 높아짐에 따라 여권이 상승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모권제사회로부터 부권제사회에로 이행되어 남자들이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살아오던 것이 다시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니 세상이 돌고 돈다는 말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다.
 
김정룡 kzl09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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