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는 차례상에 못 올리는걸까?


추석을 맞아 차례주(茶禮酒)는 뭘 쓸까? 이런 고민을 한번쯤 하는 사람은 그래도 멋을 아는 사람이다.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차례상이나 제사상에는 일본 청주인 정종이 많이 오르게 됐다. 망자(亡者)가 생전에 즐겼던 술을 쓰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망자가 생전에 바나나를 좋아했다는 이유로 제사상에 바나나를 올리듯이, 최근에는 소주가 제주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4대 봉사하거나 윗대 조상들을 함께 모시는 시제에서는 대개가 약주류의 전통주를 제주로 쓴다.

제주에는 금기가 많이 따르는데, 소주는 쓰지 않는다는 얘기들을 한다. 소주로 유명한 안동 지방을 찾아가서, 소주를 제주로 쓰느냐고 여러 차례 물어보았지만 아직까지 소주를 제주로 쓴다는 집안을 만나진 못했다. 왜냐고 물으면, 독한 소주를 제사상에 올리면 독한 후손, 쉽게 말해 독종이 나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소주가 독하기 때문이라기보다, 제사라는 규범이 생기고 보급될 무렵에 소주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소주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설득력이 있겠다.

세종실록 오례의’에는 제사에 쓰는 8가지 술 오제삼주(五齊三酒)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는데 모두가 탁주와 청주다.



오제는 범제(泛齊), 예제(醴齊), 앙제(?齊) 체제(?齊), 침제(沈齊)로 나뉘는데, 범제는 아직 지게미가 떠있는 덜 익은 상태이고 예제, 앙제, 체제로 갈수록 술이 익어가서 침제는 지게미가 다 가라앉은 상태의 술을 이른다. 크게 나누어 보면 범제와 예제는 탁한 술이고, 앙제와 체제와 침제는 맑은 술이다.

삼주는 사주(事酒), 석주(昔酒), 청주(淸酒)로 나뉘는데, 제사 일에 참여한 이들이 마시는 술이라 하여 사주라 하고, 겨울에 빚어 봄에 익을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여 석주라 하고, 겨울에 빚어 여름에 만들어진 최고급 술을 청주라 했다.

이 ‘세종실록 오례의’의 오제삼주 얘기는 중국의 ‘문헌통고’를 참조한 내용이지만, ‘문헌통고’는 또 ‘주례’를 참고하여 내용을 구성했다. ‘주례’는 주나라 때에 작성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대체로 한나라(BC 206~AD 220년) 때에는 완성된 형태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제주의 계보가 작성되고 나서 1000년이 흐른 뒤에야 원나라 몽골족에 의해서 증류주인 소주가 중국이나 한반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니, 소주가 제사상에 오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요즘은 이렇게 종류를 달리하여 술을 올리는 제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오례의에 가장 가깝게 지내는 제사로 서울 성균관의 석전대제를 꼽을 수 있다. 석전대제에서는 식혜와 덜 익은 술과 잘 익은 술을 함께 올리니, 오제의 전통을 거칠게나마 잇고 있다 하겠다.


까다롭게 제주 이야기를 했지만, 제사상에 오르는 음식처럼 술 또한 ‘이게 옳다, 저게 옳다’ 하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 맑은 찬물을 뜻하는 현주(玄酒)를 올릴 수 있고, 감주(甘酒)만 올릴 수도 있다. 금주령이 심했던 영조 시대에 살았던 성호 이익(1681~1763)은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제사에 예(醴, 단술)만 쓰고 술은 쓰지 마라”고 했다. 금주령을 어기면 사형에 처했던 그 시절에, 혹시라도 자식 손자들이 효도한다고 술을 빚어 제사상에 올렸다가 죽임을 당할까봐 걱정하여 남긴 유언으로 보인다.

사실 차례상이나 제사상에 상품화된 술을 올리는 행위는 인스턴트 밥을 사서 제사 지내는 거나 다를 바 없다. 제사 지내면서 옆집에서 밥 빌려오지 않듯이, 옛날에는 술 또한 빌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는데 어떡하겠는가? 그래도 전통을 지켜온 술들이라도 헤아려 제주로 올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효도이고 정성이지 않겠는가.

지역별로 제주로 삼을 만한 전통 약주가 있다. 전라도의 해남 진양주, 충청도의 한산 소곡주, 아산 외암리 연엽주, 금산 인삼주, 청양 구기주, 경상도의 경주교동법주, 문경 호산춘 등이다. 이 술들은 밀주 단속이 심했던 금주령 시대에도 끈질기게 생명력을 보존, 지금에 이르러서 문화재가 되었다. 이 술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가지다. 모두 제주였다는 점이다. 장인들은 제사를 받들기 위해 목숨처럼 소중하게 이 술을 지켜온 것이다.

예로부터 술은 천상과 지상의 영혼을 연결해주는 음식으로 믿어져 왔다. 그래서 제사에 꼭 필요한 음식으로 술이 꼽히는 것이다. 제사상에서 움직이는 것은 하늘로 향하는 향 연기와 술밖에 없는 걸 보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술을 천상에 올린다지만, 이 술이 곧 복이 되어 지상에 내리니 제주가 곧 복술이다.

올 추석에는 무슨 술을 올려 음복할까? 아직 생각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생각해보시라. 제주를 올리면 복술이 생기고, 제주가 없으면 복술도 없나니.

출처 : 조선일보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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