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의 생애

정보의바다 2008. 2. 14. 09:34
김구(金九) 1876(고종13)~1949. 독립운동가, 정치가, 본관은 안동,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 (昌洙) 개명하여 구(九 龜),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두래(斗來)로 고쳤다.자는 연상(蓮 上), 초호는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순영(淳永) 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인조 때 삼정승을 지낸 방조(傍祖) 김자점(金自點)이 권세다툼에서 청병(淸兵)을 끌어들였다는 역모죄로 효종의 친국을 받고 1651년사형당하자, 화를 피하여 선조되는 사람이 그곳으로 옮겨갔다.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아버지의 열성으로 집안에 서당을 세우기도 하였다. 14세때에 「통감」,「사략」과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15세때에 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 한학을 배웠다.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93년(고종30)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 2대 교주 최시형 (崔時亨)과도 만났다. 19세에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에 임명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에서 동학혁명(東學 革命)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신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 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다. 또한 해서지방의 선비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솟구치는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여 1895년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부의병부대에 몸담아 일본군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듬해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하고,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는다 하고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에서 왜병중위 쓰치다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 하였다. 그해 5월 집에서 은신 중 체포되어 채주감 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이듬해 1897년에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집행 직전 고종황제의 특사령으로 집행이 중지되고 감형되었으나, 석방이 되지 않아 복역 중 1898년(광무2)탈옥 삼남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麻谷寺)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 1899년 서울 새절을 거쳐서 평양 근교의 대보산(大寶山) 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만에 환속(還俗)하였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도 계몽 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 1903년(광무7) 기독교에 입교하여 전 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 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 基)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泣訴)하는 한편, 종로 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 (楊山學校)를 세웠다. 1909년 양산학교 교사로 있으 면서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 고취에 열성을 다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保强學交) 교 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결사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좌되어 해주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뒤 1911년 1월 데라우치 총 독 암살모의 혐의로(105인 사건) 안명근사건(安明根事件)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 형을 선고 받 았다. 1914년 7월 감형(減刑)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자유의 몸이 되자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 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 장, 1924년 국무총리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 부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8년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고 1929년 재중국거류민단 단장도 겸임하고,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는 등 항일무력활동을 지휘하였다.이에 중국군 김홍일(金弘壹) 및 상해병공창 송식마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8 이봉창(李奉昌)의거와 4.29 윤봉길(尹奉吉)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의 상해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이에 김구는 60만원의 현상이 붙은 채 일본의 감시망을 뚫고 상해를 탈출 가흥(嘉興)으로 갔다.



1933년 남경(南京)에서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 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를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대일 전투의 방책을 협의하였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35년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조 직 했으며, 1939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가 중경(重京)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 (李範奭)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 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1942년 7월 임시정부 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임시정부 주석(主席)에 재선임 되고, 부주석에 김규식(金奎植), 국무위원에 이시영 박찬역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 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 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광복군 낙하산 부대)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 광복을 맞이하 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함께 제 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해 12월 28일 모스 크바3상회의(三相會議)에서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 주독립의 통일정부수립을 목표로 광복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 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白貞 基)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손수 봉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 중앙폅의회 부의장, 민주의원(民主議院) 부의장, 민족통일 총본부 부총재 등을 지내며 이승만(李 承晩),김 규식 등과 함께 했고, 극우파(極右派)로서 활약 했다.1947년 11월 국제연합의 감시 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나의 소원애서 밝히기를 "완전자 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1948년 초에 북한이 국제연 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 정부 수립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해 2월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 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제헌 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해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金枓奉)등이 남북협상 4자 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수립의 시련을 맛보고 그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여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 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자택 경교장 (京僑蔣)에서 육군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7월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 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으며, 4월 의거 뒤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 졌다.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를 남겼다.




"처음에 내 생명을 묻던 놈이 밤이 새도록 쉬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그 놈들이 어떻게 제 나라의 일에 충성된것인가를 알았다.

저 놈은 이미 먹은 나라를 삭히려기에 밤을 새거늘,

나 는 제 나 라를 찾으려는 일로 몇번이나 밤을 새웠던고 하고,

스스로 돌아보니 부끄러움을 금 할수가 없고

나도 기실 망국민의 근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니 눈물이 눈에 넘쳤다.

{백범 일지}



백범 김구(1876-1949)는 27년간 대한민국 입시정부를 이끌어 온 민족독립운동가요 해방된 조국을 민족.통일.민주.문화의 바탕위에서 굳건히 세우려고 애쓰다가 비명에 가신 근대 한민 족의 큰 스승이시다. 백범의 가계는 안동 김씨로서 신라 경순왕과 고려 김방경의 후예이며, 파(派)의 시조 익원 공 김사형의 21세손에 해당된다. 그의 선대는 조선조에도 계속 서울에서 벼슬하다가 방조(傍祖) 김자점의 역모사건으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게 되자 그의 선조가 경기도 고양을 거쳐 해주 서쪽 80리지점의 백운방이란 곳에 자리잡았다. 백범의 선조들은 낙향후에 양 반의 문화 생활을 멀리하고 짐짓 상놈의 행세를 하려고 역군토와 군역전까지 경작하였다. 이 같은 형편에서 이웃마을의 진주 강씨와 덕수 이씨로부터 멸시를 받아도 제대로 항변조차 하지 못했다. 초기 백범의 사상 가운데에 양반에 대한 분노와 가문을 일으키고자 하는 집념이 강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가문의 형편이 이랬던 만큼 선대에는 불평객이 많았다.



백범의 아버지 순영(淳永)은 4형제 중 둘째로 의협심과 정의간이 넘치고 양반에 대한 저항심이 강한 분이었다. 그는 약한자를 돕고 자 주 대변하였으나 그런 일로 양반들의 미움을 샀다. 그가 도존위(면에서 세금을 거두 는 자리)의 직책을 수행할 때에는 양반들에게는 가혹하게 공전(公錢)을 거두고 가난한 자들 에게는 자기가 대신 물어낼지언정 더 거두지는 않았다. 그 결과 3년이 못되어 공금에 축을 내고 사임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현풍 곽씨(이름, 낙원)로 14세의 나이에 열살위인 신랑을 맞아, 17세 난산 끝에 백범 을 낳았다. 부모는 백범의 교육을 위해 자기 집에다 서당 선생을 모시기도 하고, 부친의 병환으로 학자금이 부족할때에는 이웃마을의 서당 훈장에게 간청, 무료로 교육시키 기도 하였다. 특히 모친 은 백범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친 분이다. 백범이 옥에 갇혔을 때 옥 바라지를 맡아 위로와 용기 를 주었을 뿐아니라, '안악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에는 "경기감 사를 하는 것보다 더 자랑스럽다."고 말함으로써 백범에게 큰 격려를 주었다.



일찍 죽은 며 느리를 대신하여 손자 인(仁)과 신(信)을 양육한 자정이며, 백범이 독립운동을 하는데에 지 장되지 않도록 두 손자를 이끌고 귀국하며 어려움을 극복하는 인내며, 왜경을 따돌려 버린 여성답지 않는 특유의 대담성과 지모(智謀)며, 백범이 일지(逸志)를 쓸때 그 자세한 연월과 일시를 일일이 자문할 정도로 만년에까지 간직한 총기등은 임정 주석 백범의 품격을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백범은 1892년 과거에 낙방하는 것을 계기로 인생의 활로를 새롭게 모색한다.그는 한때 풍수지리와 관상을 공부하였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l9세기 말의 민족적 수난을 감지하면서 동학에 입문한 백범은 최시형으로부터 황해도 팔봉접주로 임명받아 해주성 공격 에 앞장섰으나 청군의 철수로 실패하였고, 황해도 동학군의 자중지란으로 세력을 잃게 되자 안중근의 부친 태훈의 호의를 받아들여 부모를 모시고 청계동으로 들어가 잠시 우거하였다. 그는 거기서 일생동안 자신에게 사상적 영향을 끼친 척사위정(斥邪衛正)계의 유학자 고능선 을 만나 그의 섬세한 가르침을 받았다. 백범은 청계동을 찾아온 김형진을 만나 의기투합, 조국순례에 나선다. 그들은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을 돌아 서간도 땅에 이르러 국경지역 주변에 거주하는 동족들의 어려움을 목도한다. 강계 부근에서는 김이언 부대를 따라 '국모'의 원수를 갚는 의병운동에 참여했으나 실패하였다. 청계동으로 돌아온 백범은 그가 없는 동안에 고능선의 요청으로 그의 손녀와 약혼이 이루어진 것을 알고 기뻐하였으나 김치경의 방해로 성혼되지 못했다.



백범은 다시 '방랑의 길' 에 올랐다. 이때 국내에서는 명성황후가 '왜놈' 들에게 시해당한 데다가 단발령 시행으로 백성들의 분기가 탱천하여 이곳저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방랑길' 에 오른 백범은 대동강 하류인 치하포 주 막에서 만난 일본인을, 그가 명성황후를 죽인 미우라(三浦誤樓) 공사이거나 그 일당의 하나일 것이라고 단정하고 살해하였다. 그 일본인은 '육군중위' 쓰치다(土田讓亮)였다. 이 일로 그는 해주 감영을 거쳐 인천감옥에 수감되었다. 백범은 재판을 받으면서그의 거사가 국모의 원 수를 갚기 위한 것임을 천명하여 관리들과 수감자들은 물론 인천시민들에게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백범은 일본의 압력으로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국왕의 재가로사형집행은 면했다. 감옥 밖의 구출운동이 한계에 이른 것을 안 백범은 탈옥의 비상수단을 감행하였다. 탈옥에 성공한 백범은 삼남 지방을 주유하다가 공주 마곡사에 이르러 승려가 되어 원종(원 종)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탈옥에 따른 위험을 감추기 위해서는 승려로 신분을 위장하는것 이 좋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범은 평안도의 영천사 방주(방주)를 끝으로 일년여 동안의 승려생활을 청산하고 환속, 귀가하였다. 그에게는 민족을 위한 새로운 구상이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즉 그가 감옥에서 {태서신사}와 {세계지지} 등을 통해 깨달은 신지식에 의하면,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취했던 폭력의 방식이 아니라 민지를 깨우쳐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를 애국계몽운동에 나서게 하였다. l902년 부친상을 당한 백범은 그 이듬해 해상과 함께 예수교에 입교함과 동시에 구국교육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예수교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예수교가 애국계몽운동에 가장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와 잡학(雜學)에서 시작, 동학, 유학, 불교를 거쳐 예수교에 정착하는 사상적인 방랑을 경험하였다. 백범은 장연의 광진학교와 봉양 학교, 문화의 서명의숙, 안악의 양산학교와 안신학교, 재령의 보강학교 등에서 가르치는 한 편 사범강습회를 열어 교사를 양성, 훈련하였고 '해서교육총회' 를 조직, 학무총감으로 활동 하였으며, 환등기를 가지고 황해도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왜놈' 원수들을 갚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잠시 진남포 감리교회의 의법 청년회 총무의 일을 맡아 서울에 올라와 상동교회파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을사조약반대 상소운동에 앞장 섰고, 1907년에는 안창호 . 전덕기 . 이승훈 등과 함케 비밀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장기적인 독립운동에 대비하였다. 백범은 고능선의 손녀와 혼약이 깨어진 후에 결혼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부친의 거상 중에 여옥을 만나 해상 후에 결혼하기로 했으나 여옥의 죽음으로 불가하였고, 평양 사범강습 중(1904)에 최광옥의 소개로 안창호의 동생 신호를 만나 약혼 단계에 이르렀으나 신호 측의 사정으로 결혼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해 말에 최준례를 만나 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혼하고 최준례를서울의 정신학교에 유학시킨 후 곧 결혼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은 일제는 한국강점을 서둘렀다. 한국인의 저항은 여러 형태로 일어났다. l909년 10월에는 안중근의 의거가, 12월에는 이재명의 의거가 있었다. 백범은 안중근의 의거로 잠시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으나 무혐의로 곧 출감하였다. 그러나 그 이 듬해 연말 '안악사건(일명 안명근 사건)' 에 연루되어 15년 징역을 언도받았고 수감중에 터진 '105인사건'에 걸려 또 2년을 추가받아 17년의 징역에 처하게 되었다. 처음 서대문 감옥 에서 옥고를 치루다가 1914년에는 17년전 치하포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던 인천감옥으로 이감되어 항만 축조공사 등에 강제 노역당했다.
그는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이름 김구(金龜)를 김구(金九)로 바꾸고 호 연하(蓮下)를 백범(白凡)으로 바꾸었다. 이름을 바꾼 것은 일제의 호적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이고, 호를 바꾼 것은 "우리나라의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지금의 나의 정도는 되고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소원을 가지자"는 뜻에서였다. 1914년 인천감옥에서 가석방된 백범은 안악으로 돌아왔다.



출옥은 하였지만 아직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부인이 교원으로 있던 안신학교의 일을 돕다가 신천 동산평의 농감이 되어 농 장 내의 소작인들에게 근검절약 .상부상조의 질서를 가르치는 한편, 학교를 세워 자녀교육에 힘쓰도록 하였다.
술과 노름으로 일삼던 그 농장은 백범의 노력으로 희망의 새 동산으로 변 화되어 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백범은 자유롭게 뛰어들지 못하는 자신 의 가석방신세를 생각하면서 민족독립을 위한 새로운 결단을 내린다. 망명이었다. 3윌 3일 사리 원에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넌 백범은, 1945년 11월 23일 그의 나이 70세에 환 국하기까지, 27년간 근대사에서 가장 긴 시간을 버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붙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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