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聞慶鳥嶺) - (문경세제 X)
우리 나라의 큰 산줄기인 백두대간(白頭大幹)이 태백산, 소백산을 거쳐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죽령을 지나 대미산, 포암산, 주흘산, 조령산, 희양산, 대야산, 청화산, 속리산으로 이어져 소백산맥을 이루어 나간다. 삼국과 고려 때에는 문경 관음리에서 충북 중원군의 수안보로 통하는 큰길인 하늘재(계립령)가 있었고, 문경 각서리에서 괴산군 연풍으로 통하는 소로인 이화령이 1925년 신작로로 개척되어 지금의 국도3호선이 되었다. 옛날에는 1978~1979년 확장 포장된 이우리재(이화령)와 가은에서 충북 괴산으로 연결된 불한령, 문경군 농암에서 충북 삼송으로 다니던 고모령 등이 있어 신라와 고구려, 신라와 백제의 경계를 이루었다고 전한다.
이곳이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조선시대의 가장 큰길[嶺南大路]이었던 곳이며 옛날의 유지(遺址)로는 원터, 교귀정, 봉수터, 성터, 대궐터 등이 잔존하고 있다. 조령로의 번성을 말해 주듯 조령로변의 마애비는 관찰사, 현감 등의 공적을 새겨 놓았으며, 주흘관 뒤에는 선정비, 불망비, 송덕비가 비군(碑群)을 이루고 있다. 주위의 주흘산, 조령산, 부봉과 각 골짜기마다 동·식물자원이 자연 그대로 보존된 관광명소이다.
유래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조령산(鳥嶺山) 마루를 넘는 이 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鳥嶺)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草岾)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 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새(사이)재」, 새(新)로 된 고개의 「새(新)재」 등의 뜻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 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이 곳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유서 깊은 유적과 설화·민요 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이 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 신구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 받았다는 교귀정터만 남아있는 것을 1999년 중창하였고, 옛날에 산불을 막기 위하여 세워진 한글 표석 "산불됴심" 비(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가 남아있다. 그리고 역사에 얽힌 갖가지 전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신립(申砬)장군, 동학(東學)과 의병(義兵)이 남긴 사담(史譚)이 골골이 서리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 일대를 1974년 지방기념물(제18호),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어 전국에서 등산객이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
선비의 상
문경새재는 예로부터 한양과 영남을 이어주던 영남 관문에 위치하여 수 많은 길손들의 애환과 세월의 흔적을 묵묵히 지켜온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곳에 건립된 선비상은 전통사회의 구심점을 이루었던 지성과 인격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끊임없이 미래를 창조하는 아름다운 한국인을 상징한다.
선비상을 중심축으로 하여 그 전면에 둥근 광장을 조성하고 둥근 광장 좌우면에 6면의 부조는 선비와 관련된 전통시를 함께 설치하였다. 이는 선비의 의식과 정신에 관한 내용이며, 광장 중앙 바닥에는 유교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팔괘를 표현하여 선비정신의 기상을 구현하는 광장을 의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중앙 광장 전면의 진입부는 영남대로를 뜻하며 문경새재의 역사성과 소중한 길문화를 잘 나타내고 있다.
<진입부> 地(음) 영남대로와 영남선비의 과거길을 의미
<전개부> 天(양) 만물의 근원인 우주와 유교의 정신을 상징하는 주역의 팔괘, 선비의 일대기, 선비의 정신을 구현하는 광장
<완성부> 人(선비) 이상적인 인간상
天地人은 음양의 화합으로 이상적인 인간상을 실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음.
선정비(善政碑) 및 불망비(不忘碑)
비는 왕이 승하하면 장사 지내고 신하들이 임금의 덕과 공을 찬양하기 위하여 세우는 것이 원칙이다. 이 돌은 공덕을 표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고인들은 왕의 송덕비를 세웠다. 이것을 모방하여 군수나 현감에 대하여 참으로 그들의 시책이 잘 되어야만 비를 세워 공덕을 잊지 않게 하였다.
중국의 후한 때 오장이 군의 태수로 선정을 하였기 때문에 그가 죽은 뒤 묘 앞에 선정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것이 선정비의 시초가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충렬왕 때 양리(良吏) 최석이 선정을 하여 팔마비(八馬碑)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것이 또한 우리나라의 선정비의 시초인 듯 하다.
선정비의 글은 대개 일치하여 전 군수 누구의 영세불망(永世不忘)이니 송덕이니 하는 문자를 새겼다. 그 중 크고 글도 많이 새겨져 있는 것이 어쩌면 백성을 많이 울린 표본이 되기도 한다.어느 곳을 막론하고 예전 읍자리에 아직 십여개 혹은 수십개의 비석이 서 있어 선정의 허욕을 장식하고 있다. 선정비를 더욱 간수하고 옥석(玉石)을 가려 보관할 것을 보관하면 그래도 선인들의 뜻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1관문 뒤에는 당초 있던 비석과 관내에서 발견된 몇 기의 비석을 옮겨 20여기가 있다.
여러 비석들 중 이 철비가 가장 눈에 들어왔다.
철비의 이름은 <홍로영 현감 철비>이다.
1824년에서 1827년까지 문경현감을 역임한 홍로영의 비석으로 1826년(순조 26)에 건립한 것이다.
바닥돌 위에 비몸과 지붕을 함께 주물기법으로 제작하였으며,
도드라진 글씨로 '현감홍후로영여세불망비'라 새겨놓았다.
대부분의 비석이 돌로 만든 것인데 비해 무쇠로 만든 보기 드문 비석이다.
조령산성
1966년 3월 22일 사적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제1·제2·제3관문 및 부속성벽이다. 옛날에 영남에서 서울로 가려면 문경에서 주흘산(主屹山:1,106m)을 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신라 때는 주흘산의 한 갈래인 대촉산(黛蜀山)을 넘어 계립령(鷄立嶺)으로 다녔고 조선 전기부터는 조령이 개척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남으로써 이곳에 중국의 산해관(山海關)과 같은 방위시설을 축조해야 한다는 논의를 낳았다. 현지 실측(實測)이 시행되고, 1594년(선조 27)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였다.
충주 사람으로 수문장(守門將) 출신인 신충원(辛忠元)이 조정의 결정에 앞서 조령에 머물면서 단독으로 설관(設關)에 착수하였다. 그가 이루어놓은 첫번째 시설이 지금의 중성(中城)이다. 중성은 1708년(숙종 34) 크게 중창(重創)되었는데, 이것이 곧 제2관문이다.
숙종 때 제2관문에서 3km 떨어진 곳의 남적(南賊)을 방비할 제1관문을 세우고 초곡성(草谷城:主屹關)이라 하였다. 이들은 1890년대에 다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육축(陸築)에는 홍예문(紅霓門)을 열고, 성벽에는 총구멍이 있는 성가퀴를 돌리고, 한쪽에 큼직한 수구문(水口門)을 뚫었다.
숙종 때 조령 재 위에 북적(北賊)을 막기 위하여 조령산성(鳥嶺山城)을 쌓았다. 이것이 곧 제3관문으로 현재 경북과 충북의 경계에 위치한다. 제3관문은 육축만 남겨 놓은 채 불타버려 1977년 복원하였다.
제1·제2·제3관문은 양쪽 산의 골짜기에 위치하며 관문 좌우의 성벽은 능선을 따라 우회한다. 높은 봉우리 6분선(分線)에서 끝났다가 다음 골짜기에서 다시 이어져 초곡성·중성·조령산성의 성벽을 이룬다. 동화원(桐華院)을 비롯하여 진(鎭)과 군창(軍倉)의 터가 있고, 경상감사(慶尙監司) 신임·후임자가 서로 교인(交印)했다는 교구정(交龜亭)의 터도 남아 있다. 문경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주흘관(초곡성)
주흘관(主屹關)-영남제1관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숙종 34년(1708)에 설관 하였으며 영남 제1관 또는 주흘관이라고 한다. 정면 3칸(間)과 측면 2칸 협문 2개가 있고 팔작(八作)지붕이며 홍예문은 높이가 3.6m, 폭 3.4m, 길이 5.4m이며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이다. 좌우의 석성은 높이 4.5m, 폭 3.4m, 길이 188m이고, 부속 성벽은 높이가 1~3m, 폭 2~4m이다. 길이는 동측이 500m, 서측이 400m로 개울물을 흘러 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지니고 있다.
조곡관(중성)
조곡관(鳥谷關)-영남제2관
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한 곳으로 중성(中城) 이라고도 한다.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關)은 영성(嶺城 : 3관문)과 초곡성(草谷城 : 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鳥東門) 또는 주서문(主西門)을 설치하였다.
그후 1907년에 훼손되어 1975년에 복원하였다. 이렇게 복원한 문루를 옛 이름 조동문(鳥東門)이라 하지 않고 조곡관(鳥谷關)이라 개칭하였다.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고, 팔작(八作)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가 3.6m, 길이 5.8m이다.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이다. 좌우의 석성 높이는 4.5m, 폭 3.3m, 길이 73m이고, 좌우의 성벽의 높이는 2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100m이다.
조령관(조령산성)
조령관(鳥嶺關)-영남제3관
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선조 초에 쌓고 숙종(숙종 34년 : 1708) 때 중창하였다.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陸築)만 남고 불탄 것을 1976년도에 홍예문 및 석성 135m와 누각을 복원했다.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으며 팔작(八作)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 4.5m, 폭 3.2m, 길이 185m이고 성벽의 높이는2~3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400m이며 대문의 높이는 3.9m, 폭 3.56m 두께 19㎝이다.
경상도 쪽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길에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초곡성의 주흘관 모습이 멀리 보인다.
성벽 왼쪽 편으로는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홍예교 건설이 한창이었다.
성벽 앞에는 홀로 있어도 전혀 외로워 보이지 않을 만큼 큰 감나무 하나가 이 가을과 무척 잘 어우러졌다.
주흘관 아래 홍예문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따뜻한 날씨 덕에 문경새재를 찾은 많은 등산객들의 발길로 주흘관 문턱이 다 닿을 것만 같았다.
다른 성벽에서는 보기 힘든 특이한 수구문이 홍예문 오른쪽 성벽 아래 자리하고 있었다.
이 수구문을 보니 갑자기 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이가 궁궐 수구문을 뚫고 궐 밖으로 빠져나오던 장면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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