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음펨바 효과(Mpemba Effect)
뜨거운 물이 든 컵과 차가운 물이 든 컵을 냉동실에 넣고 문을 닫자. 어느정도 시간이 지난 뒤 문을 열고 컵을 들여다 본다. 뜨거운 물이 담겨져 있던 컵에는 얼음이 얼어있고, 차가운 물이 담긴 컵에는 여전히 물이 담겨있다. 차가운 물보다 뜨거운 물이 먼저 얼어버린 것이다.
얼핏 보기에도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보인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자. 30℃인 물과 50℃인 물을 같은 조건에서 냉각시킨다. 50℃인 물이 0℃ 이하로 냉각되어 얼음이 되기 위해서는 30℃인 지점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따라서 처음 온도가 50℃인 물이 얼음으로 변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처음 온도가 30℃인 물이 얼음으로 변하는 데 걸리는 시간에 비해 더 길 수밖에 없다. 50℃에서 30℃까지 냉각시키는 데 시간이 추가적으로 더 걸리기 때문이다.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이런 논리에 따르면 뜨거운 물이 차가운 물보다 먼저 어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뜨거운 물이 차가운 물보다 먼저 어는 일은 다양한 상황에서 실제로 관찰되는 현상이며 정식으로 이름까지 붙어있다. ‘음펨바 효과’라고.
2. 음펨바 효과의 역사
뜨거운 물이 차가운 물보다 빨리 어는 현상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겼다. 중세 시대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믿고) 그 현상을 증명하기 위한 몇몇 노력이 있었으며 실제 실험으로 확인을 한 사례도 있었다. 1600년대 경에는 뜨거운 물이 빨리 어는 현상이 상식으로 통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원인을 설명하지 못한데다 직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현상이었기 때문인지 근대적인 열역학이 본격적으로 태동하면서 잊혀진다. 그리고 1969년 탄자니아의 고등학생 음펨바가 현대 과학계에 다시 소개할 때까지 거의 300년 동안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음펨바는 학교에서 끓는 우유와 설탕을 섞어 아이스크림 만드는 실습을 하고 있었다. 원래는 우유-설탕 혼합물을 냉동실에 넣고 얼리기 전에 밖에서 충분히 식혀주어야 했는데, 그는 냉동실에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아마 학생은 많고 냉동실은 제한되어 있어 자리 차지하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식지 않은 우유-설탕 혼합물을 그대로 냉동실에 집어넣었다. 얼마 후 냉동실 문을 열어보니 놀랍게도 다른 학생들의 아이스크림보다 자신의 아이스크림이 더 빨리 얼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상하게 여겨 선생님에게 질문했지만 선생님은 그런 현상은 불가능하며 음펨바가 어디선가 혼동된 것이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이후 음팸바는 스스로 같은 실험을 몇 차례에 걸쳐 다시 해보았지만 여전히 뜨거운 쪽이 빨리 어는 현상을 관찰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에 대한 설명을 할 수는 없었고, 오히려 선생님과 학생들로부터 ‘그것은 ‘음펨바의 물리학이다’, ‘음펨바의 수학이다’, ‘음펨바의 세상에서는 그렇겠지’라는 놀림까지 당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물리학자였던 오스본(Dr. Osborne) 교수가 음펨바의 고등학교를 방문한 일이 있었고 음펨바는 그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오스본 역시 그에 대한 설명을 해줄 수 없었지만 실험실로 돌아가 실험해보겠노라고 음펨바에게 말했다. 그리고 오스본은 약속을 지켰다. 그는 실험실로 돌아가 자신의 대학원생에게 음펨바의 주장대로 실험해보라 지시했고, 반복되는 실험에도 불구하고 결국 뜨거운 물이 차가운 물보다 빨리 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결과는 1696년에 음펨바와 오스본의 이름으로 ‘Physics Education’에 제출되었다. 잊혀졌던 현상이 다시 학계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3.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이후 다양한 실험이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음펨바 효과가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 확실한 설명은 아직 없다. 하지만 몇 가지 설득력있는 주장들은 있다.
온도가 높은 물에서는 물 분자들의 운동이 활발하여 증발이 더 잘 일어난다. 따라서 뜨거운 물의 온도가 차가운 물의 초기 온도까지 냉각되면 뜨거운 물쪽의 질량이 상대적으로 작게 된다. 질량이 작으면 열용량이 작기 때문에 처음 온도가 높았던 물은 그렇지 않은 물에 비해 같은 온도에서 열을 잃는 속도가 더 빠르다. 단순히 얼려야 할 질량이 작기 때문에 뜨거운 물이 빨리 언다는 맣이다. 하지만 밀봉된 용기에 넣어 증발효과를 제거한 실험에서도 음펨바 효과는 관측되고 있다. 증발이 음펨바 효과에 어느정도 기여할 수는 있겠지만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용해가스의 양이 음펨바 효과를 일으킨다는 주장도 있다. 차가운 물에는 대기중의 가스가 많이 녹아있고 뜨거운 물은 그 반대다. 끓인 물을 어항에 넣으려면 몇 일 바깥에 놔두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끓인 물에는 용해산소가 부족하기 때문에 물고기들이 숨을 쉬기 힘들다. 한편 용액에 불순물이 있으면 어는 점이 낮아진다. 소금물은 일반적인 물보다 낮은 온도에서 언다. 이 둘을 종합하면 용해가스가 많이 포함된 차가운 물은 뜨거운 물보다 어는점이 낮아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두 물이 얼기 시작하는 온도가 다르기 때문에 뜨거운 물이 빨리 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뜨거운 물이 식어도 용해기체의 양이 바로 증가하는 것은 아니기에 논리적 문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럴듯한 주장이지만 이도 완벽한 설명은 못된다. 용해가스의 영향을 없애기 위해 두 물을 일단 끓인 후 온도를 다르게 해서 실험한 결과 음펨바 효과는 여전히 발생했기 때문이다.
뜨거운 물이 용기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켜 냉각 과정을 바꾼다는 의견도 있다. 예를 들어, 물을 얼음판 위에 놓고 식히면 뜨거운 물 아래에 있는 얼음들은 상대적으로 더 많이 녹게 된다. 물이 얼음보다 열을 더 잘 전달하므로 표면을 통한 열교환 외에 용기 아래쪽으로의 열 교환이 뜨거운 물에서 더 크게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뜨거운 물이 열을 빼앗기는 속도가 차가운 물의 그것보다 커지게 된다. 하지만 녹은 얼음의 열전도율이 음펨바 효과를 일으킬 정도로 크게 변하는지 확실치 않으며, 표면을 제외한 곳으로의 열교환을 철저히 통제한 실험에서도 음펨바 효과는 여전히 관찰되기 때문에 이 역시 가설일 뿐이다.
이 외에도 대류에 의해 위쪽 물이 아래쪽 물보다 뜨거워져서 열교환이 쉽게 이루어지는 ‘Hot Top 효과’, 뜨거운 물의 열복사에 의한 열손실 등이 음펨바 효과를 가져온다는 주장들이 있다. (’Hot Top 효과’는 개인적인 이해 부족으로 인해 길게 쓸 수 없었다.)
이처럼 다양한 주장이 음펨바 효과의 원인으로 제시되었지만 결정적인 증거를 갖춘 ‘The Theory’는 아직 없다. 간단해 보이는, 그래서 누구나 실험해볼 수도 있는 이런 현상의 원인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니 다소 의아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음펨바 효과를 처음 들었을 때는 전혀 엉뚱한 결과에 놀랐고, 어느정도 듣고 나서는 이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 없다는 점에 놀랐다. 후에 언제, 어디서, 어떤 엉뚱한 이유가 원인으로 밝혀질지 기대된다.
4. 음펨바 효과에 대한 오해
음펨바 효과를 얼핏 들은 사람들은 ‘뜨거운 물이 항상 차가운 물보다 빨리 언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똑같은 양의 1℃ 물과 99℃ 물을 냉각시킨다면 당연히 1℃ 물이 빨리 얼 것이다. 다만 온도 차이가 크지 않고 열전도율이 낮은 용기를 사용해서 대부분의 열교환이 표면으로 이루어질 때 뜨거운 물이 차가운 물보다 빨리 어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이런 사실도 우리의 직관과 들어맞지 않은 신기한 사실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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