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징가 빌딩’이 근대 소비문화의 요람인 서울 남대문로 거리에 새바람을 불어넣을까. 한국은행, 신세계(옛 미쓰코시) 백화점 등 일제시대 근대 건축물이 모여 있는 남대문로 3가에 최근 괴물이 나타났다. ‘한국은행 앞 분수대 광장’ ‘명동 입구’로 잘 알려진 이 근대 거리에 추억의 ‘마징가Z’를 본뜬 21층짜리 우체국 건물이 ‘새 랜드마크’(한 지역의 기념비적 표지물)로 솟아오른 것이다. 사각진 건물 덩어리가 양쪽으로 쩍 하니 갈라진 듯한 거침없는 정면 모습. 정말 마징가 대가리의 캐노피(조종석)를 떠올리게 한다. 애들 반바지 뒤집은 모양 같다고 ‘핫바지 빌딩’, 바지 지퍼를 내리다 만 듯하다고 ‘지퍼 빌딩’, 도끼로 두 쪽 난 장작 같다고 ‘장작떼기 빌딩’이란 별명도 붙었다. 애칭인지 비어인지는 아리송하나 건축동네 사람들이 이 거대 빌딩을 보는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다.
정부 기관 최대의 건축 프로젝트
서울 충무로 1가 21-1번지에 자리잡은 이 빌딩은 ‘포스트타워’다. 지하 7층까지 터파기를 했고, 연면적만 2만2천 평이 넘는 철골 콘크리트 건물은 밋밋한 대형 상자 모양의 13층짜리 신관 건물을 2003년 헐고 나서 4년여 공사 끝에 들어선 서울중앙우체국의 새 청사다. 첨단 인텔리전트 빌딩으로 서울 남촌 지역의 새 랜드마크를 겨냥한 이 건물의 장래를 놓고 기대와 우려가 엇갈린다. 잘 알려진 대로 남대문로 3가와 충무로 들머리 일대는 근대 건축물 밀집지구로 터의 역사성이 각별한 곳이다. 19세기 말 재한 일본인들의 집단 주거지였다가 한-일 병합 뒤 조선은행 등의 주요 금융기관과 미쓰코시 백화점 같은 대형 유통시설이 잇따라 생겨났던, 근대 소비유통 문화의 태반과 같은 곳이다. 이런 전통 장소의 격과 다분히 동떨어진 파천황적 디자인의 첨단빌딩이 들어선 것은 남대문로 공간에 적지 않은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초고속 정보통신 1등급 등 주요 평가등급을 모조리 휩쓴 포스트타워는 1990년대 이래 정부 기관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의 건축 프로젝트 중 하나다. 이 빌딩은 공간의 약 절반을 카드회사에 임대해주었고, 시민광장 등을 조성해 퇴색했던 명동과 남대문로 연결 지역의 상권 부활도 노린다. 하지만 경제적 잇속은 차리면서 역사적 명분은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건축계 상당수 인사들은 “유서 깊은 남대문로 공간의 기억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쓴소리를 하고 있다.
지난 9월4일 낮 <한겨레21> 취재진은 근대 건축사를 연구하는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의 안창모 교수, 건축평론가 이주연씨와 함께 남대문로 3, 4가를 돌며 포스트타워와 주변 근대건축물을 답사했다. 우선 남대문을 지나 태평로와 남대문로가 갈라지는 기점으로 1960년대 지은 흥국생명 건물을 지났다. 이어 남대문시장 아래 1970년대 상가와 같이 지어진 상동교회 옥상에 올라갔다. 멀리 동쪽 정면으로 보이는 포스트타워와 그 양쪽에 늘어선 한국은행 본점(1912)과 별관, 신세계 백화점(1930), 제일은행 옛 본점(1935), 1930~60년대 재래식 상가 건물과 고급 벽돌을 쓴 오피스 빌딩 등이 한눈에 근대건축물 백화점처럼 들어온다. 길 양옆에 도열한 이 건축물들이 맞닿는 소실점 쪽에 기골 장대한 포스트타워가 서 있다. 1970년대 대화재의 악몽이 깃든 대연각 빌딩과 성보빌딩을 바로 옆에 시녀처럼 거느렸다. 직접 21층 꼭대기 정원과 11층 정원에서 남대문로 분수대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이상의 소설 <날개>의 배경이 되었던 옛 미쓰코시(신세계 백화점 본관)의 옥상 정원과 분수대 위에서 느긋한 일상을 누리는 시민들의 모습이 여러 근대건축물, 남대문로 소공로의 숨막힐 듯한 차량 행렬과 뒤섞여 눈에 들어왔다. 남촌의 새로운 시각 축으로서 타워는 나름대로 뚜렷한 입지와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여느 건물처럼 관능적인 투명 유리벽으로 건물 전면을 덮은 커튼월 공법을 쓰지 않고, 친근한 석조로 테두리를 메웠다. 버너로 구운 화강석을 측면에 두르고 정면은 색조를 입힌 유리를 썼다. 옥상의 태양열 집광판으로 온방과 급탕, 옥외조명을 해결한 것과 정화수 재활용 시스템, 건물 뒤쪽의 대형 정원 구상도 호평을 받았다.
시민들과의 소통을 강조한 장점도
하나 분명한 것은 공법상의 고려에도 불구하고, 1910년대부터 하나둘 조성된 남대문로 거리의 역사적 맥락에 비추어 포스트타워가 돌연변이 같은 장벽의 느낌을 벗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르네상스, 바로크, 모더니즘 양식이 뒤섞인 일제시대의 여러 상업·금융 건물들과 상가들을 차분히 좇아가던 시선의 흐름은 막다른 골목처럼 막힌다. 안 교수는 “파격적 외관에도 불구하고, 건물 중간을 쪼개어 시선을 조금 튼 것 외에는 남대문로 거리의 역사성을 반영하는 맥락을 찾을 수 없다”며 “미학적 측면에서 주변 건물들과 거의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날개 혹은 바지 모양으로 건물 입면을 쪼갠 것은 건축에 숨통을 불어넣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 형태는 설계자가 공간의 역사적 성격을 치밀하게 고려한 결과라고 평가하기에는 모호한 구석이 있다고 두 사람은 말했다.
건설회사와 연합 컨소시엄 형태로 공동설계를 따낸 (주)공간건축사사무소 등 3곳의 설계 사무소는 현행 규정을 따르기 위한 방편으로 이런 건물 형태를 구상한 측면이 크다. 도심에서 10층 이상의 고층 건물을 지을 경우 건물 가로와 세로의 한 변이 50m를 넘지 못한다는 도심재개발 기본계획안을 지켜야 한다. 실제로 이처럼 건물을 두 쪽으로 쪼개거나 하나의 건물 덩어리 위에 두 동의 타워 얼개를 올리는 형식은 요즘 서울 시내 고층건물 건립 현장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가능한 대로 주변 건물들과 고도를 맞추고 시선을 보장하는 저층 고밀도 개발이 아쉬웠다는 게 두 전문가의 일치된 견해였다.
하지만 (주)공간 쪽의 자문역으로 설계 과정을 지켜본 이주연씨는 단순히 모양만으로 건물을 평가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했다. 정보문화 센터로서 시민들과의 소통을 강조한 장점도 눈여겨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빌딩에 가까이 접근하면 보이는 1층 들머리 현관부에 대규모 시민마당 공간을 만든 것을 근거로 들었다. 도로에 바짝 붙여 건물 공간을 들일 수 있는데도 일부러 공공용 공간으로 990㎡(300평) 가까운 마당을 시민들의 만남 행사 공간으로 떼어준 것은 유례없는 배려라는 말이었다. 지하 2층으로 우체국 영업 공간을 끌어내리고, 1층 앞마당을 넓게 끌어들여 녹음과 휴식을 제공하는 우정원이란 개방 문화 공간도 만들었다. 경사를 이용한 잔디 스탠드, 소나무 군식, 우정광장이자 시민 보행자 광장을 만들고, 건물의 입면이 쪼개어지는 층인 11층을 직원, 방문객을 위한 쉼터인 구름 카페와 도시의 정원, 간이주방 등으로 활용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설계사무소 쪽은 가상 시뮬레이션을 거쳐 만남의 광장, 공연 무대로 쓰이게 될 현관부 앞의 모임 공간을 터주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이곳은 명동에서 유일한 대규모 대중 광장으로 설계되어 건물이 완공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많은 인파가 저녁 약속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이상림 (주)공간 대표도 “업무 공간을 지하로 끌어내리고 1층을 완전히 대중에게 개방한 것은 요즘 건축에서는 파격적인 배려”라면서 “연말 독일의 한국건축전에도 설계안을 전시할 예정”이라고 했다.
문화적 정체성 생산할 수 있을까
공간 흐름 면에서 한국은행 앞 광장은 과거의 명성을 제대로 잇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명동 서쪽과 신세계 사이 상권이 1980년대 롯데의 등장으로 을지로 입구 쪽으로, 그리고 강남 상권으로 이동한 뒤 계속 정체되면서 슬럼화의 징후까지 보였다는 게 상인들의 주장이다. 신세계를 찾는 인파도 굳이 지하도를 건너 명동 서쪽까지 넘어오려고 하지 않아, 명동의 젊고 감각적인 소비층과 회현동 남대문시장 쪽의 소비층은 밀접하게 연결되지 않았다. 포스트타워는 완공 뒤 자연스럽게 이들 지역의 인파가 서로 오가는 플랫폼이 되어 회현동과 명동 상권을 연결하는 기능을 해줄 것이란 기대감이 크다. 타워 옆 골목 음반점 주인인 최기호(31)씨는 “명동 상권 위축으로 폐업이 속출했는데, 새 청사 완공으로 유동인구가 늘어날 것 같아 기대된다”고 했다. 인근에서 간식거리를 팔아온 노점상 황혜숙(52)씨도 “새 빌딩 완공으로 소외됐던 남대문로 쪽 상권에 많은 사람들이 몰릴 것 같다. 인근 다른 상가들도 리모델링을 하거나 휴게시설을 확충하는 등 여파가 감지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명동에서는 옛 국립극장이 곧 복원될 예정이며, 청사 바로 옆 현대해상 사옥과 대연각 빌딩 등이 리모델링을 하고, 위쪽의 옛 증권거래소 터에는 오피스텔 복합상가가 들어설 예정이다.
기대 심리에도 불구하고 과거, 현재, 미래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공간문화적 측면에서 포스트타워에 대한 문화계 시선은 싸늘하다. 건물의 구조나 외관에서 근대 거리에 걸맞은 문화적 정체성을 생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론이 압도적이다. 타워의 건립은 남대문로의 다른 근대건축물들의 보존, 문화적 활용 움직임과는 상반된 흐름이기 때문이다.한국은행 옛 본관의 경우 지난 6월부터 관내 전체를 화폐금융박물관과 미술갤러리로 전환했다. 신세계백화점 본관도 외벽 색상 교체 등의 문제가 있음에도 가급적 외형과 내부 구조를 보존하는 방향으로 리모델링 작업을 최근 마쳤다. 그러나 포스트타워는 건립 과정에서 이런 흐름을 별반 반영하지 않았다.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의 백남주 학예사는 “지나치게 양감을 추구하는 외형도 부담스럽지만, 우정박물관 등 역사적 맥락을 담은 기능을 내부에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아쉽다”고 했다. 신세계 갤러리의 지명문 관장도 “건립 과정에서 주변 역사 건축물과의 조화를 좀더 고민했어야 한다. 주변 시설들과 공동 문화 이벤트 등을 추진하면서 장소성에 맞는 기능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동 목원대 교수는 아예 “공간의 기억에 대해서는 별 생각 없이 북악산, 남산을 노골적으로 가로막은 이상한 역대칭 펜스(장벽)”라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몇몇 대형 설계집단과 건축사들이 일괄로 대형 빌딩의 설계계약을 따내는 기업형 시스템이 생각 없는 지역 재개발을 조장한다는 문제 제기도 했다.
문화 특구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결국 ‘시민들과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봐달라’는 시공주와 설계자, 건축 설계에서 인문정신과 철학의 실종을 개탄하는 학계 사람들 사이에서 포스트타워는 자기 입지를 닦을 것으로 보인다. 일부 건축사학자들은 타워 준공을 계기로 남대문로와 충무로 일대를 근대 문화 특구로 지정해 현대와 미래를 반영한 지역 특성의 보존책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도 내놓는다. 포스트타워의 정식 준공일은 9월21일.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우편 창구 작업은 앞서 17일부터 시작하지만 건물 전모가 공개되는 시기는 내부 정비가 완료되는 10월 초순이 될 전망이다. 마징가 타워의 ‘일탈’이 얼마나 성공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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