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전달물질이 모자라 호르몬계 이상으로 나타나…스트레스와 외부 환경도 영향
"인격장애가 아니라 감기처럼 쉬게 치료할 수 있는 병" 이라는 사회적 인식 중요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는 자살을 놓고 찬반 양론이 벌어지는 대목이 나온다. 우울증을 치료하려고 산간 마을을 찾았다가 로테라는 여인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베르테르, 그리고 로테의 약혼자인 알베르트, 그 둘이 만나서 나누는 대화다.

“기쁨, 슬픔, 고통도 어느 수준까진 견딜 수 있지만 한도를 넘으면 정신적인 면이나 육체적인 면에서 파멸합니다. 그런데 왜 악성 열병으로 죽는 인간은 비겁하다고 하지 않으면서, 정신적인 파멸에 대해선 비겁하다고 하는 건가요?”(베르테르)

“그건 말도 안 되는 궤변입니다.”(알베르트)

“육체가 병들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을 땐 그걸 죽을 병이라고 하죠. 이걸 정신에 적용해보면 어떨까요. 한쪽으로만 생각해 끙끙 앓고 냉철한 사고 능력을 상실해 파멸하고 마는….”(베르테르)

결국 로테에게 사랑을 고백했으나 실연 당한 베르테르는 정신적 고통과 절망을 못 이겨 알베르트에게 빌린 권총으로 자살한다.

몸이 병들었다는 것과 마음이 병들었다는 것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이 되고, 몸의 병이 마음의 병이 되는 상호작용을 하는 질환이 있다. 바로 현대인의 가장 심각한 질병이라는 우울증이다.

우울증은 나이, 인종, 지위, 성별을 떠나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질환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0년에 이르면 우울증이 모든 연령에서 나타나는 질환 중 1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측했다. 우울증은 어느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마음의 감기’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자살로까지 이어지는 심각한 병이다.

실제로 최근엔 주부가 자녀를 목 졸라 숨지게 한 뒤 자신도 아파트에서 투신하는 유의 사건이 국내에서도 잇따르고 있다. 뚜렷한 동기 없이 이뤄진 이런 엽기 사건의 용의자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고 밝혀지고 있다. 프랑스 영아 유기살해 사건과 관련해 프랑스 수사당국은 전문가들에게 아이 세 명을 살해한 베로니크 쿠르조의 산후우울증을 포함한 정신질환 감정을 의뢰했다.

모든 우울증이 이처럼 자살이나 살해 같은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건 결코 아니다. 하던 일이 잘 안 되고, 부정적인 기분에 사로잡히다 보면 누구나 한번쯤 ‘혹시 내가 우울증에 걸린 건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잠시 기분이 쳐졌다거나 일상 생활에 장애를 주지 않을 만큼 나타나는 일시적인 ‘우울감(Blue)’은 ‘우울증(Depression)’과 다르다. 고려대 안암병원 우울증센터장인 이민수 교수는 “살림과 육아, 정상적인 업무 수행 등을 할 수 없을 만큼의 장애가 2주일 이상 계속 돼야 우울증이라고 볼 수 있다”며 “성적이 급격히 떨어지고 대인관계를 피하는 학생이나 수행능력이 떨어져 산업재해를 겪는 직장인을 예로 들 수 있다”고 했다.

우울증 환자는 모든 잘못을 자신의 탓이라고 여기거나 앞으로도 자신의 일이 잘 안 풀릴 것으로 믿는다. 일상 생활 전반에 대해 의욕을 잃을 뿐더러 우울증 환자의 3분의 2는 자살을 생각한다고 한다. 우울증이 찾아오면 이전에 스트레스를 풀 때 쓰던 방법을 동원해도 효과가 없다. 고려대 안암병원의 백종우 정신과 전문의는 “골프 치는 걸 좋아하던 사업가가 골프를 안 치려고 한다거나 성 생활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줄어들어 부부관계를 못하는 것으로 증세가 나타나기도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울증은 대체 왜 생기는 걸까? 일반적으로 마음의 상처 때문으로 생각하지만 우울증을 유발하는 가장 큰 요인은 세로토닌이나 노에피네프린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부족한 데서 오는 부조화에 있다고 한다. 강동성심병원의 신경정신과 연병길 교수는 “우울증은 일시적으로 우울한 기분이 들거나 개인적으로 나약해서가 아니라 호르몬계 이상으로 생기는 질환”이라며 “다만 이런 경우에도 뇌의 이상과 마음의 충격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했다.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데도 단순히 신경전달물질의 변화로 우울증이 생기는 ‘내인성 우울증’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불안감과 초조함, 망상 같은 마음의 변화등의 증세 이어진다. 결국 우울증은 마음과 뇌가 연결고리를 갖고 작용하면서 생겨나는 질환이란 말이다.

우울증은 이처럼 호르몬 외에도 스트레스, 환경 등 여러 인자의 복잡한 작용으로 찾아온다. 환경적인 스트레스나 자기 자신과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것 같은 인지적인 요인이 우울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성장 과정에서의 문제나 가족 내력 등으로 ‘우울증 취약성’을 띤 사람이 있어, 우울증은 유전성이 있는 것으로 얘기된다. 일조량이 떨어지면서 나타나는 ‘계절성 우울증’도 있다. 겨울철에 백야가 계속되는 북유럽 국가 같은 곳에서 나타나는데, 이럴 경우 높은 수준의 광선을 단기간에 쬐는 치료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우울증은 마음을 잘 다스리고, 못 다스리는 식의 인격 문제가 결코 아니다. 때문에 주부, 학생, 노인, 직장인 등 우울증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연령이나 성별에 따라, 원인과 증세에 차이가 좀 있을 뿐이다.

노인의 우울증은 환경적인 요인으로 인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인은 건강 악화,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기능의 손상 등을 경험할 가능성에 많이 노출돼 있어 우울증에 걸릴 확률도 높아지는 것이다.

요즘 국내에서도 특히 심각하게 급증하는 것은 여성의 산후우울증이다. 1000명 중 한두 명 정도에게 나타난다는 산후우울증은 급격한 호르몬 변화와 환경적인 스트레스 요인이 합쳐진 형태다. 출산 직전에 최고치에 오른 에스트로겐 호르몬이 출산 후 최저치로 떨어지면서 나타나는 호르몬 변화에다 자신이 한 생명을 돌봐야 한다는 스트레스, 자신의 신체 변화에 대한 자신감 상실 등이 합쳐져 신경전달물질에 변화가 오는 경우이다.

우울증은 독신 남녀나 집안의 가장인 남성에 비해 주부가 더 많다고 한다. 아이 하나를 키우던 주부 김지혜(36·가명)씨는 5년 만에 과거에 다니던 직장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단순한 문서 작업에도 실수를 많이 했고 직장 상사로부터 연일 꾸지람을 들었다. 자기 분야에서 실력을 쌓아온 남편을 보니, 자기 자신은 더 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불면증에 시달리다 두 달 만에 몸무게가 10㎏나 줄었고 급기야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고까지 냈다. 그는 종합병원 신경정신과 병동에 입원해 3주일간 치료를 받았다

Posted by Red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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