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수학 어디까지 끝냈니?” “나? 6학년 거. 넌?” “난 6학년 거랑 중학교 1학년 거 조금.” 올봄 초등학교 5학년에 진학한 학생들의 대화다. 십수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공부깨나 하는’ 아이들은 1년 이상 선행한다. 그러면서도 어디까지 더 해야 하나, 조바심을 내기도 한다.

“현재는 대학 진학만을 위한 선행학습이 이뤄지고 있어요. 교육적 의미의 선행학습은 그게 아닙니다” (오영주 박사)
옆집 순이엄마가 문제다. 딸이 초등학교 5학년인데 중학교 수학을 가르치고 있다며 자랑이다. 선행학습은 필수가 된 시대, 사교육에 의지하지 않으면 따라가기도 힘들다. 언제, 얼마만큼 선행해야 하는지, 어떤 아이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가르쳐야 할지, 또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도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레이디경향」은 두 명의 영재 교육 전문가에게 선행학습과 영재의 기준을 물었다. 오영주 박사는 ‘한솔교육’ 영재교육연구원장, 김미숙 소장은 한국교육개발원 영재교육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오영주 박사의 조언은
“우리 아이가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수학은 또래 아이들보다 1년 정도 앞섰다고 생각했어요. 중 3 때 공통수학을 다 뗐거든요. 그런데 외고에 입학하고 나니까 수 I까지 끝내고 들어온 아이들이 많았어요. 그 아이들에 비하면 1년을 뒤졌더라고요(웃음).”

오영주 박사의 얘기다. 선행학습이 대세인 요즘, 공교육에 갈증을 느끼는 아이들은 수학, 영어 등 주요 과목에서 이미 1년 이상 선행한다. 이유는 분명하다. 명문 초등학교, 명문 중학교, 특목고, 명문대로 이어지는 한국적 의미의 ‘성공 트랙’에 합류하기 위해서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고, 정권이 바뀐다 해서 갑자기 다른 길이 열리는 것도 아니다.

“사실 지금은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선행학습만 이뤄지고 있어요. 대학을 잘 나와야 취직이 잘되고, 자녀의 인생이 보장되니까요. 한국에서는 학벌이 중요하니까, 좋은 인맥들은 좋은 대학에 깔려 있고 사회적 지위가 경제적 지위와 일치하니까요.”

‘선행학습’이라는 말에 과외나 학원이 먼저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선행학습은 사교육 시장이 위주다. 역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문제점이 없지 않다. 선행학습의 본의가 왜곡되기 쉽다. 오영주 박사는 “지금의 선행학습은 일단 대학을 위한 것이나, 교육적 의미의 선행학습은 그게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선행학습에는 ‘속진’과 ‘심화’가 있어요. 속진은 말 그대로 앞서가는 것이고, 심화는 예를 들어 피자가 있다면 다양한 피자를 다 먹어보고 생각을 깊이 하는 것으로 비교 평가와 응용을 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죠. 때문에 속진은 한 과목에만 국한되는 얘기예요. 학원에서는 속진만 하고 있어요.”

사교육 시장이 과열됐다는 지적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공교육에서 느껴지는 갈증도 무시할 순 없다. 다섯 개의 뜀틀을 넘을 수 있는 아이에게 세 개의 뜀틀로 만족하라는 것이 지금의 공교육이다. 그러나 6학년 과정을 5학년 때 배웠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속진과 심화는 동시에 이뤄져야 옳고, 진정한 ‘선행’의 목적은 아이의 잠재력을 최대로 끌어주는 데 있다.

“교육개발원에서 5년을 일했죠. 다양한 잠재력을 가진 아이가 있는데, 중간치로 자를 수밖에 없는 것이 공교육의 현실이에요. 일종의 틀이죠. 그러다 보니 요즘 아이들은 앞만 보고 끌려 다니기만 하는 것 같아요. 세상이 이래서, 아이들이 불쌍하죠.”

‘선행학습’만큼이나 오해받아온 단어가 ‘영재’다. 흔히 아이큐가 높거나, 교과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학업 성취를 보이는 아이들을 영재로 여기지만, 이론적 의미의 영재는 그보다 넓은 틀 속에 있다. 핵심은 창의력이다. ‘인류를 행복하게 하는 창의적인 작품을 한 사람’들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쉽다.

“그런 성취를 하는 사람들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가보면 영재의 정의를 가늠할 수 있어요. 평균적으로 아이큐가 120선 이상이면 ‘훌륭한’ 일을 해냈다고 하죠. 140, 150 이상이 돼야 하는 것도 아니고, 더 이상 아이큐가 기준이 아닙니다.”

평균적인 아이큐를 100이라고 했을 때, 그 이상의 지능지수를 가진 사람들이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평균 이상의 아이큐가 영재를 가늠하는 첫 번째 기준이라고 했을 때, 창의력은 두 번째 기준이다. 남들 다 하는 일을 잘한다고 해서 영재인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창의적 가능성을 점치는 데 거창한 성취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가방이 너무 무겁다, 그럼 바퀴를 한번 달아보면 어떨까?’ 그런 거죠(웃음). 세 번째가 ‘과제 완수력’입니다.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는 거죠. 완성시키는 동력, 그게 과제 완수력입니다. 집착력이라고도 해요. 그건 아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드러납니다. 호기심과 관심이 있다면 열정도 있죠. 그럼 마무리하게 돼 있습니다. 그것이 영재죠.”

오영주 박사의 상담 사례 중에는, 좋아하는 것도 호기심도 많아 벌이는 일은 많으나 그걸로 끝인 아이들이 많다. 목적이 있는 호기심 그리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열정이 영재의 마지막 기준이다. 시계를 다 분해해놓고 1번부터 10번까지 부품에 번호를 매기고 앉아 있는 아이에게 부모는 “책상머리에 앉아서 공부를 하라”고 타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관심이 있는 것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생각하는 것이 즐거운 아이에게 참고서나 교과서를 강요하는 것은 스트레스다.

빠르게 앞서가는 것만이 안정적인 미래를 보장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현실에서, 속진만 강요하는 선행학습의 정의도, 대학 진학을 위한 학업에만 몰입하는 영재의 정의에도 오해가 있었다.

“대한민국은 다 같이 진정해야 해요. 모든 국민이 어떤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아요” (김미숙 소장)
김미숙 소장의 관점은
“대한민국은 다 같이 진정해야 해요. 모든 국민이 심각하게 어떤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요.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전문가들이 정확하게 문제를 짚어주고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미숙 소장이 말하는 선행학습은 오영주 박사와 다르지 않다. 내 아이의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흥미를 갖는 분야는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하는 게 중요하지, 중학교 1학년인 옆집 아이가 공통수학을 배운다고 해서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속진도 좋은 형태의 영재교육이죠. 문제는 아이가 준비가 됐을 때, 필요로 할 때, 맞춰서 시켜야 약이 된다는 걸 잊고 무조건 시킨다는 거예요.”

물론 또래보다 우수해서 앞서갈 수 있는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이 타고나는 재능은 천차만별이다. 김미숙 소장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선행학습과 속진이 도움이 되는 아이들의 비율은 많아야 5% 정도다. 한국에서는 50% 이상의 아이들이 선행학습에 매달리고 있다.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지금은 50% 이상, 60~70%라고 말해도 될까요? 사실 그렇게 많은 아이들에게 선행이 필요하진 않거든요. 장기적으로는 부작용도 있습니다. 학교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 아이들조차도 흥미를 잃죠. 5% 이내의 학생들이 학교 교육에 흥미를 잃는 것은 선행학습의 문제가 아니라 학교 교육의 수준이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에요.“

김미숙 소장은 공교육이 다양한 재능과 잠재력을 가진 아이들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한다. 문제는 학교에서의 교수법이다. 한국 교사들의 지식 전문성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교수법에 있어서는 21세기가 요구하는 창의적인 인재를 길러내는 데 아쉬움이 있다.

“아이가 스스로 사고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흥미를 갖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문제를 스스로 발견해서 해결점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죠. 인재상이 달라졌습니다. 지식은 컴퓨터에 다 있고, 아주 어려운 문제는 컴퓨터가 더 잘 풀죠. 이제는 답이 없는, 아무도 묻지 않았던 문제의 길을 만드는, 창의적 문제 해결력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그것을 이끌어주는 게 교사의 역할이어야 하죠.”

말하자면 공교육에서도, 사교육에서도 바른 의미의 선행학습을 받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고등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미적분을 초등학생이 배운다고 해서 영재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좋은 교육이라고 할 수도 없다. 잠재력과 교육, 주객이 전도됐다. 아이의 잠재력을 파악하려는 노력은 뒷전이 됐고, 어떻게든 다른 아이보다 앞서가는 데만 열중한다.

“또래보다 뛰어난 아이를 영재라고 하죠. 그 범위는 정하기 나름입니다. 나라마다 달라요. 영국은 상위 5~10%, 미국은 5~15%, 이스라엘은 3~5% 정도죠. 상위 30%에도 영재는 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의 평균 아이큐가 127이라고 해요. 의미가 있는 수치죠. 남들 다 가는 길을 빨리 가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간 사람, 새로운 것을 개척하고 창조한 사람이 기준이라는 뜻이니까요.”

김미숙 소장은 “이 땅의 영재들은 소진되고 있다”고 말한다. 대학이 ‘지고지순한 인생의 목적’이 된 현실은 아이에게도, 국가적으로도 낭비다. ‘일류대학’보다는 원대한 꿈을 꿀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교육이 시급한 이유다.

“그것이 일종의 목표가 될 수는 있겠죠. 하지만 수많은 영재들이 그 과정에서 묻히고 있어요. 내적인 만족보다는 외적인 보상에 치중하는 사회 분위기,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을 할 때 더 만족감을 느끼는 분위기도 한몫을 합니다. 아이도 그런 맥락에서 희생되고 있는 거죠.”

‘대학’과 ‘출세’라는 보상을 바라보고 이뤄지는 것이 지금의 선행학습과 영재교육이다. 입시만을 위한 선행학습은 아이의 잠재력과 창의적 성취도와는 거리가 있는 얘기다. 단기적인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이 길을 가야 한다’는 내적 동기를 가진 아이, 자기만의 것을 가꿔갈 수 있는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목적이 돼야 한다.

월 수강료가 149만원인 서울 청담동의 유아영어학원.
그렇다면 우리 아이는?
“선행학습이 대세라는 것을 인정하자. 그렇다면 우리 아이는 어느 정도 선까지 앞서가야 합리적일까. 아이의 미래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선행학습에 대한 현실을 인정하고, 이성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 본래의 취지였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들이 속속 드러나 어디서부터 손을 쓰고 대안을 제시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오영주 박사는 이렇게 조언한다.

“아이의 적성별로 교육하는 것이 이상적이죠. 하지만 지난달에 실시한 중학교 일제고사를 보세요. 국어, 영어, 수학, 사회를 기준으로 아이들의 학업 성취도를 평가했죠. 예체능만 빼고 다 했다는 뜻입니다. ‘우리 아이가 영어는 무척 잘하는데 수학, 과학은 싫어해요.’ 싫어도, 평균까지는 끌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선은 따라갈 수 있게끔 끌어주고, 그 트랙 안에서 아이의 적성을 찾아서 길러줘야 하죠. 아이도, 부모님도 참 힘든 세상이에요.”

일류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성공을 보장하는 지금의 트랙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오영주 박사는 “100리터의 물을 마실 수 있는 아이에게 50리터의 물을 지속적으로 주는 것이 지금의 공교육”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현실은 슬프게 가고 있지만, 아이의 잠재력을 키워준다는 관점이라면 슬프게만 볼 일은 아니에요. 선행학습은 공교육 내에서의 수준별 교육과 사교육, 영재교육이 함께 가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김미숙 소장은 공교육 내에서도 우수한 아이들을 위한 속진, 심화학습이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큰 그림을 두고 설명을 시작했다. 위화감을 조성하기보단, 아이들의 개인차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서의 시각이다.

“선진국에서는 일찍부터 개인차, 흥미, 호기심과 적성을 존중하고 그에 맞는 교육을 시켜왔습니다. 한국도 다양한 방향으로 대안을 모색하고 있죠. 부모가 아이의 잠재력 개발을 위해 사교육을 시키겠다는 것은 나쁜 일도, 나라가 말릴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선행학습과 영재교육의 본질이 아직 충분히 연구, 반영되지 않은 게 현실이에요. 약간의 위험부담도 있죠.”

지난 4월 1일 보도된 영국 ‘수학 천재 소녀의 몰락’은 같은 맥락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13세에 영국 옥스퍼드대학 수학과에 입학한 말레이시아계 천재 소녀 수피아 유소프(23)가 10년 뒤 거리에서 몸을 파는 신세가 됐다는 내용이다. 유명한 과외 교사인 아버지의 ‘학습 가속화 기법’의 효과로 남들보다 앞서가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유소프의 바람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게 원인이었다. 2001년 가출한 유소프는 영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한 ‘천재 소녀 찾기’ 소동 끝에 발견돼 사회복지 시설을 통해 양부모에게 입양됐지만, 지난 3월 30일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에 지금은 ‘성매매 여성’이 된 사실이 다시 알려졌다.

어린 시절, 유소프는 아버지의 지도에 따라 ‘학습 가속화 기법’으로 공부했다. 정신이 맑아진다는 이유로 차가운 방에서 공부했고, 주기적으로 명상을 하도록 교육받았다. 공부시간 이외에는 지칠 때까지 테니스를 치도록 강요받았다고 한다. 극단적이고 왜곡된 영재 교육 사례지만 부모의 과욕과 ‘성공 강박증’이라는 원인만큼은 한국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선행학습의 본의는 ‘입시’에 매몰됐고, 시험 성적이 좋은 아이가 영재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초등학교 5학년 아이라면 6학년 1학기 수학까지…’라는 식의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은 왜곡이고 회피다. 두 전문가의 조언은 추상적이지만 절실하다. 빠르게 목표에 도달하는 것만이 성공의 기준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아이의 적성과 잠재력을 파악하고 이끌어주는 데는 부모의 역할이 다른 어떤 교육기관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가 옆집 순이보다 몇 년이나 앞섰는가보다는 여유를 갖고 아이의 적성과 잠재력을 파악하는 장기적인 관점이 ‘선행학습’의 첫걸음이 돼야 한다.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 이주석, 경향신문 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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