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가 생각나는 계절이다.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맥주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마시는 술이 바로 맥주. 종교적으로 술을 금하고 있는 이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가 맥주를 만들고 마신다. 맥주는 이제 독일이나 유럽만의 술이 아니다. TV나 냉장고처럼 국경이 없는 문화 상품이다. 이번 여행지는 맥주가 좋은 곳 서호주다. 맥주 하면 독일이나 체코 등 유럽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서호주도 맥주가 맛있다.

서호주의 거점 도시, 퍼스
일단 서호주에 대한 간략한 설명부터 하자. 서호주는 광활하다. 면적이 호주 대륙의 3분의 1. 남한의 33배다. 인구는? 1백90만 명이 전부. 이 중 1백50만 명이 수도 퍼스에 산다. 퍼스를 벗어나면 한가하다.

퍼스 시내 중심은 여느 도시와 비슷하다. 중심가엔 카페가 있고, 쇼핑 타운도 있다. 퍼스 중심가는 그리 크지 않아서 1시간이면 둘러볼 수 있다. 영국식 쇼핑 거리인 런던 코트가 이채롭다. 커먼웰스 은행 주변에는 젊은이들이 많이 모인다. 커피숍에선 연인들이 나와 데이트를 한다. 이외에 가볼 만한 곳으로는 킹스파크. 퍼스 시내와 강줄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로 잔디밭도 좋고, 한나절 피크닉을 즐기기에 딱 좋은 곳이다.

퍼스는 여행의 최종 목적지라기보다는 여행 거점 도시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퍼스는 대도시지만 조용하다. 바와 커피숍이 몰려 있는 곳은 프리맨틀. 건물 대부분이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어 운치도 있다. 프리맨틀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피싱보트 하버에는 식당들이 몰려 있다. 여러 식당 중 시셀로스 식당은 ‘피시 앤드 칩스’ 전문점으로 유명하다. 선원들이 먹었던 방식대로 종이 위에 물고기튀김과 감자튀김을 내놓는다. 맛이 일품이다. 홍합탕은 소스가 매콤해 잘 어울린다. 그 옆에 있는 ‘리틀 크리에이처’는 하우스 맥주집이다. 고추를 넣어 매콤한 맥주까지 판다.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리틀 크리에이처란 술 속에 살아 있는 미세한 효모를 일컫는다. 퍼스에 머물면서 가까운 프리맨틀이나 로트네스트를 돌아보는 식으로 여행하는 게 좋다. 마가렛리버, 피너클스 등 숱한 명소가 있지만 드넓은 서호주를 한 번에 다 훑을 수는 없다. 이번엔 퍼스 주변만 살펴보자.

1800년대 여관이 맥주 집으로
퍼스에서 20㎞ 정도 떨어진 프리맨틀은 퍼스를 찾은 관광객이라면 꼭 들르는 명소다. 19세기 중반에 도시가 건설될 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프리맨틀은 호주 철도의 서쪽 종점이었다. 19세기 대륙을 횡단한 철도가 프리맨틀까지 이어졌다. 서호주가 금광이 많았고, 고래잡이도 발달했다. 당시의 풍경을 볼 수 있는 라운드하우스 등이 남아 있다. 건축물의 70%는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게다가 대학 도시다. 도시 한가운데 노트르담 대학이 있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를 떠올려보자. 젊은이들이 많은 곳이라 아무래도 활력이 있다. 그래서인지 퍼스의 젊은이들도 금요일이면 프리맨틀에 몰려가 바를 찾아다니기도 한다.

프리맨틀의 유명한 술집 중 하나가 ‘세일러 앵커’다. 1800년대에 세워진 집으로 처음엔 여관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부터 맥주를 팔았는데 제법 인기가 좋았던 모양이다. 관광객들은 물론 현지인들로 북적거린다. 맥주 메뉴를 봤더니 오래된 맥주 집답게 옛날 맥주를 많이 팔았다. 영국이 아니면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인디언 패일 애일(Indian Pale Ale)도 눈에 띈다.

패일 애일은 거칠고 톡 쏘는 맛이 일품이었다. 인디언 패일 애일을 설명하려면 일단 맥주의 역사를 조금은 훑어야 한다. 애일이라는 것은 상면발효맥주다. 술통의 온도가 높아 효모가 가라앉지 않고 둥둥 떠서 맥주를 발효시킨다(하면발효맥주는 라거라고 한다). 온도가 높기 때문에 빨리 발효하지만 맛은 터프하다. 그렇다면 패일은 무슨 뜻일까? 맑다는 뜻이다. 3백 년 전의 맥주는 불투명했다. 막걸리처럼 탁주였다. 그런데 제조기술이 발전하면서 약간 투명해 보이는 맥주가 나타났다. 지금도 아주 맑지는 않지만 훤히 보이지도 않는다. 그럼 인디언이란 말은 왜 붙었을까? 영국이 인도를 삼키려 동인도회사를 보냈던 18세기, 인도엔 맥주가 없었다.

너무 더워서 맥주를 만들기도 힘들고, 영국에서 가져가기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당시 런던에서 맥주 상자를 싣고 인도로 떠날 경우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가로질러야 했다. 인도까지는 6개월. 맥주는 수송 도중 쉬었다. 맥주 양조업자들은 어떻게 인도에 맥주를 보낼까 궁리하게 됐다. 인도로 수출하는 새로운 맥주가 바로 인디언 패일 애일이다. 알코올 도수를 높이고, 호프를 많이 넣었다. 맛은 강하고 썼지만 인디언 패일은 대대적인 성공을 거뒀다. 세일러 앵커에서 맛볼 수 있는 맥주는 2백 년의 깊이가 있는 셈이다.

각양각색, 피싱 보트 하버의 맥주 집들
블론드 휘트비어(Blonde Wheat Beer)도 특이했다. 휘트비어는 밀맥주. 독일에서는 바이스 혹은 바이젠이라고 한다. 밀맥주 역시 상면발효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색깔이 맑지 않다. 그런데 황금색 라거식으로 밀맥주를 만들었다면 일단 양조기술 수준이 꽤 높다는 얘기다. 마지막으로 이 집에서 마셔야 할 맥주 하나만 더 이야기하자. 프리맨틀 필스너(Fremantle Pilsner)다. 한국에는 아쉽게도 애일도 없고, 밀맥주도 없으며 필스너도 없다. 필스너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마시는 맥주 종류인데 호프 향이 강한 맥주다. 필스너는 원래 체코 맥주다. 체코의 두 번째 도시 필젠에서 나온 맥주란 뜻이다. 19세기 필스너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독일 사람들도 너도나도 필스너란 이름을 붙였다. 그러자 체코가 발끈해서 소송을 걸었다.

왜 필젠에서 만들지 않았는데 필스너란 이름을 붙였느냐는 소송이었다. 독일 법원이 20세기 초 낸 판결은 필스너는 원산지 표시라기보다는 맥주 스타일 중 하나라고 판결했다. 그 대신 필스너 맥주에는 그 지방 이름을 쓰게 했다. 오리지널 체코 필스너는 필스너 우르켈이고, 나머지 필스너는 지역 이름이나 양조장 이름을 앞에 붙이게 됐다. 세일러 앵커와 함께 피싱 보트 하버의 리틀 크리에이처도 빼놓을 수 없는 맥주 집이다. 리틀 크리에이처는 효모가 살아 있는 맥주다. 쉽게 말하면 생맥주다. 한국에는 병으로 된 생맥주는 없다. 효모가 살아 있으면 관리하기 어렵다. 수입 맥주 중에는 호가든이 효모가 살아 있는 대표 맥주다. 맥주가 뿌연 것은 효모 때문이다. 리틀 크리에이처에서는 고추를 넣은 맥주를 판다. 물론 매콤하지는 않다.

유럽풍 카페에서 즐기는 카푸치노 한 잔
현대 맥주는 이렇게 실험적이다. 원래 맥주 종가인 독일의 전통은 반대다. 빌헬름 4세는 1516년 맥주의 품질 유지를 위해 보리곂쯽물 3가지 원료 외에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게 맥주순수령이다. 양조업자들이 나쁜 원료를 섞어 농간을 부리지 못하게 한 것이다. 현대 맥주는 이런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 그 선두가 벨기에다. 맥주를 보면 생강이나 레몬을 넣은 맥주도 많다. 다양한 실험을 통해 새로운 맛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독일도 순수령을 고집하다 EU에 가입하면서 법령을 바꿨다. 사실 서호주는 벨기에와도 가느다란 연결 끈이 있다. 먼 옛날 호주 대륙을 처음 발견했을 때 영국인은 동쪽 해안으로, 네덜란드인은 서쪽 해안으로 들어왔다. 워낙 드넓은 땅이라 이 탐험가들은 동쪽과 서쪽이 붙어 있는 같은 땅인 줄은 생각지도 못한 모양이다. 네덜란드는 바로 벨기에와 한 나라였다. 나폴레옹 전쟁 후 벨기에는 네덜란드에 병합됐다가 1830년 독립했다.

맥주만 좋은 게 아니다. 프리맨틀의 카푸치노 거리도 유명하다. 크고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시키면 대부분 카푸치노를 내놓는다. 스타벅스와 같은 카페는 보이지 않지만 유럽식의 아름다운 카페가 많다. 커피 한 잔의 즐거움도 프리맨틀에선 빼놓을 수 없다. 프리맨틀 마켓에도 들르자. 프리맨틀 마켓은 19세기에 들어선 이래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많다. 형형색색의 비누가게도 있고, 달맞이꽃기름 같은 호주 특산품도 있다. 아티스트들의 작품도 나와 있다.

자연과 함께하는 맛있는 여행
프리맨틀에서 한 이틀 놀았으면 다음엔 퍼스에서 19㎞ 떨어진 로트네스트 섬(Rottnest Island)도 빼놓을 수 없는 포인트다. 이미 1900년대부터 호주 사람들의 피크닉 장소였다. 퍼스 항구에서는 배로 1시간 거리, 노던 포트에서는 20분 거리, 프리맨틀에서는 30분 거리다. 섬은 그리 크지 않다. 길이는 11㎞, 폭은 4.5㎞다. 한 바퀴 도는 데 5시간이나 걸린단다. 섬의 교통수단은 자전거다. 자전거를 빌려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방갈로 같은 숙소는 있지만 사람들은 살지 않는다. 서호주 정부가 자연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거주는 허락하지 않는단다. 섬은 아름답다. 톰슨 베이 앞 바다는 남태평양의 리조트에서 본 것과 비슷한 에메랄드빛 물빛이다.

섬에서 꼭 봐야 할 것은 쿼카(Quokka)란 동물이다. 숲 그늘 아래 눈길을 주다 보면 쿼카를 볼 수 있다. 영락없이 쥐를 닮았다. 로트 네스트란 이름이 붙은 것도 이 쿼카 때문이다. 1696년 네덜란드 탐험가 윌리엄 드 블라밍은 섬에서 쥐같이 생긴 동물을 발견했다. 그래서 붙인 이름이 쥐의 소굴을 뜻하는 ‘Rats nest’. 흑사병에 고생깨나 했던 유럽인들은 질겁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이 동물은 쥐가 아닌 쿼카라는 동물로 판명됐다. 지금은 관광객에게 인기가 높다. 캥거루나 웜뱃처럼 아기주머니가 붙어 있다. 관광객들을 무서워하지 않아 도망가지도 않는다.

‘서호주는 맛있다’. 아침에는 카푸치노, 오후엔 프리맨틀에서 맥주 한 잔 하고 있으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더위를 식혀주는 오후 3시경의 이 바람을 ‘프리맨틀 닥터’라고 한다. 여행의 즐거움, 때론 맥주 한 잔에서부터 시작된다.


관련 정보
로트네스트 페리(http://www.rottnestexpress.com.au/), 시셀로스(http://www.cicerellos.cam.au), 리틀 크리에이처(www.littlecreatures.com.au), 세일러 앵커(9335-8433), 서호주관광청 한국사무소(http://www.kr.westernaustralia.com/, 02-6351-5156)

글&사진 / 최병준 (경향신문 기자)

Posted by Redviru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