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전 인천의 한 시장에서 집을 잃은 김순애씨는 한 발짝 한 발짝 집을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깨달았다. 스스로를 살찌우고 뿌리를 내릴 수 있다면 어딜 가든 그곳이 집이라는 것을.

잃어버린 집을 찾아 여행에 길을 묻다
지난 1973년 겨울, 인천의 한 재래시장. 세 살짜리 여자아이의 손에 과자를 쥐어주며 ‘돌아올게’라고 말하던 엄마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배고픔과 두려움 속에서 3일 동안 시장을 헤매던 아이는 경찰에 발견돼 미국으로 입양됐고 새로운 가족의 보살핌 속에 자유분방한 코스모폴리탄으로 성장했다. 한 편의 영화와 같은 이 드라마틱한 인생의 주인공은 미국에서 유명 음식 칼럼니스트이자 소설가로 활동 중인 김순애씨(37·미국 이름 수니 킴). 그는 현재 1백만 명이 넘는 독자를 가진 미국의 유명 생활 잡지 「커티지 앤 리빙(Cottage & Living)」의 요리 섹션 편집장이다.

“인생이란 참 아이러니하죠. 시장에 버려져 배고픔에 떨던 아이가 지금은 음식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었으니까요.”

당시의 일을 ‘내게 처음 찾아온 행운’이라 말하는 그에게 어린 시절 겪었던 슬픔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밝은 표정, 명쾌한 손짓, 시원스러운 미소까지. 누가 봐도 그는 영민하고 쾌활한 커리어우먼이지만 여기까지 오기 위해 누구보다 긴 방황과 고독의 여정을 거쳐야 했다.

“그 당시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두려움과 굶주림에 떨었던 기억이 나요. 뉴올리언스 중산층 가정에 입양돼 따뜻한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지만 언제나 정서적인 불안감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기억에도 없는 무언가를 항상 그리워하던 그는 열일곱 살에 집을 떠나 프랑스와 스웨덴, 이탈리아 등을 여행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시던 쇠고기 스튜를 좋아했어요. 솜씨 좋은 요리사는 아니셨지만 게살이 들어간 쇠고기 스튜를 잘 만드셨죠. 항상 홈리스들을 불러 식사를 대접하곤 하시던 가슴 따뜻한 분이셨어요.”

그때의 기억 때문일까? 그의 가슴속에서 음식이란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따뜻한 치료제와 같은 것이었다. “요리를 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할 정도로 요리는 그를 지탱해주는 큰 버팀목이 되었다. 그렇게 그는 요리를 벗 삼아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났다. 그 길에는 고독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고 그리고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집이 있었다.

음식을 통해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 ‘서른 살의 레시피’
1992년, 스물두 살의 그녀는 열일곱 살 연상의 프랑스 사업가 올리비에 보송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스웨덴 스톡홀름에 살던 어느 날 친구 집에 저녁 식사를 하러 갔을 때였다. 올리비에는 천연 비누와 유기농 화장품을 만드는 세계적인 기업 록시땅의 창업자였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단지 내가 사랑하는 한 남자였죠.”
6개월 후 올리비에가 살던 프로방스의 농장으로 안식처를 옮긴 그는 자연 속에서 나오는 각종 재료들을 이용해 음식을 만들며 미식가로서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시절 프랑스 향토 요리를 배우며 즉석에서 30명분의 코스 요리를 대접하기도 했다. 올리비에와 그의 딸 로리, 세 사람은 누가 봐도 완벽한 가정을 이루는 듯했지만 ‘임시 엄마’라는 역할은 자신을 버린 엄마의 환영에 시달리는 그에게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5년 후 그는 올리비에의 곁을 떠나 다시 홀로 여행길에 올랐다. 그렇게 오랜 여행을 마친 후 그는 책을 쓰기로 마음먹고 출판사를 찾았다.

“처음에는 요리 관련서를 쓰고 싶었어요. 에이전트가 요리 책은 이미 많다며 저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면 어떨까 제의를 하더군요.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서 오누이가 떨어뜨린 빵 부스러기를 따라 집을 찾아가잖아요. 음식을 통해 길을 잃어버린 아이들이 정체성을 찾는 것이 항상 제가 생각하는 소설의 주제였거든요. 그래서 음식과 제 삶을 다룬 책을 쓰게 됐죠.”

그의 첫 번째 소설 「Tail of Crumbs」는 언제나 막연한 그리움으로 공허해진 마음을 음식을 통해 채워가는 여정을 그렸다. 미국에서 출간된 후 「뉴욕타임스」, 「USA 투데이」, 「LA 타임스」 등 유명 일간지들의 찬사를 받았고 5월에는 한국에서도 「서른 살의 레시피」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다. 책 출간과 함께 고국을 찾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준 것은 다름 아닌 아득한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밥과 김치의 향이었다.

“밥과 김치의 매운 향기가 기억나요. 직업이 음식 칼럼니스트이다 보니 한국에 와서도 여러 가지 음식을 맛봤죠. 개성식 보쌈김치, 순대, 떡수제비, 비빔밥, 신선로까지. 모두 너무너무 맛있게 먹었어요.”

비록 서툰 발음이었지만, 궁중음식을 먹을 때 이 음식이 자신의 한 부분인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다는 그의 말을 듣고 그의 몸속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저를 버린 엄마는 이미 오래전에 용서했어요. 아이를 버린 것도 또 다른 사랑의 행위임을 깨달았죠. 그것이 당시, 엄마가 제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었을 거예요. 어느 누구도 타인의 결정을 판단할 권리는 없어요. 세상 어느 엄마도 자식을 버리는 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일 거예요. 자식을 보내야 하는 그 아픔을 감수하는 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아픔이 있었기에 저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할 수 있었죠.”

그녀는 만약 한국에서 가족을 만난다면 제일 먼저 자신에게 미안해하지 말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전했다. 아픔과 원망을 씻을 수 있을 만큼 지금 그는 충분히 행복하기 때문이다. 빵 부스러기를 주워 집을 향해가던 그는 집에 다다랐을까?

“결국 집은 우리 안에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스스로를 살찌우며 뿌리를 내릴 수 있다면 어디를 가든 그곳이 집이고 고향이지 않을까요?”

그는 한국에 와서 ‘순애 누나’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순대 누나’로 불러달라며 활짝 웃어 보이는 그는 정말로 집에 온 듯 편안해 보였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인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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