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컴플렉스

정보의바다 2008. 2. 14. 09:37

요나 컴플렉스(Jonah complex)는 성경에서 유래되었다. [구약성경] 요나서에 보면 예언자 요나는 니느웨(아시리아의 대도시)로 가서 그 도시가 죄악으로 가득 차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임을 예언하라고 하나님에게 명령을 받는다. 요나는 나훔서의 저자인 엘고스 사람 나훔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으로 니느웨는 멸망할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따라서 요나는 예언하기를 원치 않는다. 예언을 하면 니느웨는 회개하여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욥바라는 곳으로 내려가 하나님을 피할 생각으로 니느웨와 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를 타게 된다.



그러나 예기치 않던 거센 태풍이 배를 덮치고 뱃사공들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배가 파손될 조짐이 보이자 제비뽑기를 했는데 요나가 뽑히고 말았다. 그는 고백하기를 태풍이 인 것은 배에 자신이 탔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하니 그의 요청대로 그를 바다에 집어던지자 태풍이 가라앉았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큰 물고기'는 요나를 삼켰고 그는 3일 밤낮을 고기 뱃속에 있었다고 한다. 고기 뱃속에서 그가 구원을 위한 기도를 올리자 물고기는 그를 "땅으로 뱉어 내었다"(요나서 2장). 그리고 다시 명령이 들려온다. "일어나 니느웨로 가라." 요나는 니느웨로 가 그 도시에 대해 예언을 해 니느웨 왕과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게 되었다.



위에서 보듯이 요나는 뱃속에 들어갔다 나와 회개하는 인물로, 이 요나의 이야기에서 모태귀소본능母胎歸所本能 증상 즉 요나 컴플렉스의 유래되었다. 보통은 소년기 이하 미성년자들에게 잘 나타나는 것으로 과도한 폐쇄적 성격을 보이거나 유아기 혹은 아동기의 습관이나 퇴행적인 증상을 보인다. 쉽게 말해 어머니 뱃속 시절을 그리워해 현실에 적응을 못하는 것을 말한다. 병으로까지 여길 필요는 없지만, 다 큰 아이가 엄지손가락을 빠는 것도 일종의 퇴행증상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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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간요법으로는 호박씨나 호박을 말려 가루를 낸 뒤 하루에 세 숟가락씩 복용하거나, 무에 생강을 조금 넣고 강판에 갈아 뜨거운 물을 부어서 식기 전에 마시는 방법이 있다.


2) 알레르기 비염등에는 천연구은소금이나 약국에서 구입한 생리식염액으로 코세척을 한다. 구은소금을 생수에 적당히 희석하여 만든 소금물을 한쪽 코를 막은채 코로 들이마신 다음 입으로 내뱉는 방식으로 세척을 하면 좋다.


3) 민간요법으로는 코나무껍질 20g에 물 두대접을 붓고 30분정도 달인 다음 찌꺼기를 건져내고 하루 3번 나눠마시는 방법이 있다. 코나무껍질은 유근피라고 불리며 한약방이나 약재상에서 구할수 있다.


4) 민간요법으로는 약초탕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말린 삼백초, 인동, 차전초 등 세가지를 각각 10g씩 물 600㏄에 넣고 반이 될 때까지 달여 하루 세번 복용한다.


5) 평소에 보리차 물을 따끈하게 하여 차 대신 마시듯 하면 매우 이롭다.


6) 산조인과 약간의 감초를 넣고 졸여서 가끔 마시면 효과가 좋다. 특히 코가 막힐 때도 특효가 있다.


7) 아주까리의 껍질을 벗기고, 찧어서 솜에 잘 싸서 콧속에 넣어 3-4분 정도씩 가끔 갈아 주면 효과가 좋다.


8) 곶감 5개를 현미 1홉으로 죽을 만들어 먹으면 효과가 좋다.


9) 연뿌리의 생것은 강판에 갈아 즙을 내어 1일 2-3잔씩 1-2주일 복용하면 특효가 있다.


10) 차전자(질경이) 50g에 물 4홉을 넣고 달여서 차 대신 마시면 효과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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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에서 등번호는 본래 등번호 1~11번까지가 주전을 의미한다. 골키퍼 1번, 수비수 2,3,4,5번, 미드필더 6,7,8,9번, 공격수 10,11번까지가 주전 베스트 11이고, 나머지 번호는 본래 후보번호였다.



지금은 등번호에 대한 관념이 많이 사라졌지만 잉글랜드나 이탈리아 같은 팀들 보면 등번호에 무척 민감하다. 특히 잉글랜드같은 경우 국가대표를 뽑고 감독이 등번호를 배정하면, 1번부터 11번까지가 베스트11을 의미하여 즉시 주전 비주전이 갈린다. 예를 들어 1998년 잉글랜드의 10번은 앨런 시어러였고 지금은 마이클 오웬이 달고 있다. 잉글랜드 미드필더의 핵인 데이빗 베컴은 7번, 폴 스콜스는 8번을 달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번호가 18번과 20번인데 그것은 88년 황선홍과 홍명보가 국가대표 데뷔할 때 후보번호인 18,20을 달고 오랜 기간 그것이 굳어졌는데 황선수와 홍선수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최고 스타이다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다. 안정환선수도 본래 8번을 가장 선호하지만 2002월드컵에서 19번을 달고 뛰면서 훈련소에서도 19번을 배정하는 등 이미지가 굳어져 가고 있다.



이처럼 축구에서의 등번호는 그 선수의 얼굴이다.

그리고 골키퍼 번호는 뒤에 1이 붙는 번호,즉 1,21,31,41,51.... 이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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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수염에서 탄생한 브래지어
여가를 통해 여성의 가슴이 패션 산업의 목표가 되거나 무시되거나 할 때마다 가슴
그 자체도 노출되거나 감춰지는 등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예를 들면 기원전 2500년경 크레타 섬의 미노아 여자들은 드러낸 가슴을 치켜올려 옷밖에 드러내는 브래지어를 하고 있었다.



한편 고대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그리스와 로마의 여자 들은 가슴에 밴드를 감아 가슴 사이즈를 조금이라도 작게 보이려고 했었다. 이 패션은 몇세기 후에 성당의 신부들에 의해 다시 거론된다.실제로 그리스에서 4,500년 전에 탄생한 브래지어 즉, 코르셋은 남자들이 여성의 몸을 자신들이 좋아하는 형으로 만들 목적으로 만든 대표적인 의류였다.
그 시대의 기준에 차지 않는 작은 가슴을 크게 보여주는 런도구가 고안된 적도 있었다. 후에 팔시(유방패드) 로 알려지게 된 것이 광고에 최초로 나타난 것은 19세기 파리였다. 이 팔시는 가슴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고안된 울 패드로 고래수염을 넣어 편 코르셋 속에 넣게 되어 있었다. 그 후 프랑스 여자들은 그 모양과 크기에서 '레몬가슴' 이라 불렸던 최초의 고무 가슴 패드를 사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몇 십 년 동안 브래지어는 어디까지나 코르셋의 부가이었다.




최초로 근대적 브래지어가 나타난 것은 1913년의 일이었다. 여자들을 코르셋에서 해방시킨 인물은 뉴욕 사교계의 꽃 메어리 펠프스 야코브스였다.당시의 세련된 여자들은 너무 꽉 조여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고래 수염과 끈으로 만든 코르셋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메어리 야코브스의 걱정거리는 불편함보다는 외견상 의 문제였다.1913년 그녀는 값 비싼 이브닝 가운을 파티용으로 샀다.

속이 비치는 이 가운은 코르셋의 윤곽이 드러나기 때문에 야코브스 부인은 프랑스인 하녀 마리의 도움을 빌어 두장 의 하얀 손수건, 리본 그리고 끈으로 뒤가 없는 짧은 브래지어를 만들었다.파티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갑작스럽게 만든 이 엉성한 브래지어를 칭찬해준 친구에게 브래지어를 한 개 만들어 선물했다. 그런데 얼마 후 낯선 사람으로부터 그 새로운 속옷을 사고 싶다는 편지가 쇄도하여 그녀는 즉시 그 디자인을 미국 특허청에 제출했다.
1914년 11월 뒤가 없는 브래지어에 특허가 내렸다. 친구들 의 도움을 빌려 메어리 야코브스는 수백 개의 브래지어를 손수 만들었다. 하지만 판매망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장사는 쉽지 않았다.




어느 날 파티에서 그녀는 우연히 코네티컷 주 브릿지포트 에 있는 워너 브라더즈 코르셋사의 디자이너를 소개 받게 되었다. 메어리 야코브스는 자신이 고안해 낸 브래지어에 대한 얘기를 하고 1,500달러로 특허권을 매입하겠다는 그 회사의 제안에 응했다. 이 특허권에는 그 후 1,500 만 달러의 값어치가 매겨졌다.메어리 야코브스의 브래지어 디자인은 이후에도 발전을 거듭했다. 1920년에는 신축성이 있는 천이 고안되고, 1930년대에는 끈 없는 브래지어, 그리고 콥의 표준 사이즈 가 산출 되었다.






사이즈별 브래지어의 출현에 많은 공헌을 한 것은 아이더 로젠탈이다. 러시아계 유태인인 그녀는 남편 윌리암의 도움으로 메이딘폼을 창설했다.
당시, 1920년대 '말괄량이 시대'에는 가슴이 작은 소년다운 패션이 유행이었다. 그러나 재봉사이며 디자이너이기도 했던 아이더 로젠탈은 이 유행에 강하게 반대하여 가슴을 강조하는 브래지어를 권했다. 자신의 디자인 경험을 살려 미국 여성들을 가슴 크기별로 분류하여 사춘기에서 성숙기까지 의 여성의 가슴에 맞는 브래지어를 만들었다.
가슴은 분명히 패션으로 되돌아온다는 그녀의 신념이 400만 달러의 메이딘폼 산업을 구축했다. 1960년대에 젊은 여성들이 여성해방의 상징이라고 하여 브래지어를 소각해버렸을 때 이러한 현상이 브래지어 산업 의 쇠퇴로 이어지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아이더 로젠탈은 이렇게 대답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옷을 입는 것이나 입지 않는 것이나 개인의 자유죠. 하지만 35세가 지나면 여성의 몸은 받침 없이는 선이 무너져버립니다. 시간이 내편이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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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바뀐 후..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참나.. 바꾸나 안바꾸나 거기서 거기인듯 합니다.
똑 같은 말인데.. 뭐하러 바꿨는지...ㅡ_ㅡ^
여러분은 많이 바뀐거 같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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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보면 좋을 그런 포스팅입니다
24가지 커피를 만들어 볼 수 있는 방법입니다.

24가지 커피 만드는 방법
 
1. 카페오레
우유가 들어간 카페오레는 아침 식사용 커피이다.
스페인에서는 카페콘레체,이탈리아에서는 카페라테라 부른다.
부드러운 거품의 카페오레는 양을 많이 해서 큰 잔에 마시는 것이다.
재료 커피 추출액1/2컵, 우유1/2컵
만드는 방법
1) 손잡이가 달린 냄비에 우유를 끓기 직전까지 데운다. 데우면서 스푼으로 저으면 거품이 생긴다.
2) 뜨거운 커피와 우유를 일대일의 비율로 컵에 붓는다.
3) 즉시 마신다. 취향에 따라 설탕을 넣어도 좋다.
 

2. 하와이언 밀크커피
카페오레의 응용. 달콤한 밀크커피에 휘핑크림을 얹고 코코아 가루를 뿌린 커피다.
재료 커피 추출액1/2컵, 우유1/2컵, 설탕 1 1/2 작은술, 휘핑크림, 코코아 가루 약간.
만드는 방법
1) 컵에 설탕을 넣고 뜨거운 커피와 우유를 일대일의 비율로 부어 젓는다.
2) 휘핑크림을 얹는다. 휘핑크림은 우묵한 그릇에 생크림을 넣고 부드러운 거품 상태가 될 때까지 거품기를 저어 만든다. 얼음을 담은 큰 그릇을 준비해 그 안에 생크림이 담긴 그릇을 넣고 거품을 내면 더욱 효과적이다.
휘핑크림은 상하기 쉬우므로 즉시 쓴다.
3) 코코아 가루를 뿌려 장식한다.
 

3. 중국식 밀크커피
카페오레 의 응용. 달콤한 밀크커피에 구기자향을 넣고 휘핑크림을 얹는 커피다.
재료 커피추출액1/2컵, 우유1/2컵, 설탕 1 1/2 작은술, 구기자 가루 1 작은술, 휘핑크림,구기자
만드는 방법
1) 컵에 설탕과 구기자 가루를 넣고 커피와 일대일의 비율로 부어 젓는다.
2) 휘핑크림을 얹는다.
3) 구기자로 장식한다.

 
4. 서인도풍 밀크커피
카페오레의 응용 . 달콤한 커피에 소금 꿀을 넣고 휘핑크림을 얹는다.
재료 커피 추출액 1/2 컵, 우유 1/2 컵, 설탕 1 작은술, 꿀 1 작은술, 맛소금 약간, 휘핑크림
만드는 방법
1) 컵에 설탕과 소금을 넣고 뜨거운 커피와 우유를 일대일의 비율로 부어 젓는다.   꿀이 들어 가므로 설탕의 양을 줄인다.
2) 휘핑크림을 얹는다.
3) 꿀로 장식한다.

 
5. 커피 & 초콜렛 커피
카페오레의 응용 . 달콤한 밀크커피에 코코아 가루와 버터를 녹이고 휘핑크림을 얹는다.
재료 커피추출액 1/2 컵, 우유 1/2 컵, 설탕 1 1/2 작은술, 코코아 1 작은술, 휘핑크림,장식용 버터
만드는 방법
1) 컵에 설탕과 코코아 가루 , 버터를 넣고 뜨거운 커피와 우유를 일대일의 비율로 부어 젓는다.
2) 휘핑크림을 얹는다.
3) 버터를 얇게 썰어 장식한다.

 
6. 에스프레소 커피
진하게 추출해 작은 잔에 마시는 이탈리아 식 커피 . 식후의 입맛을 개운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레몬 껍질을 곁들이기도 한다.
재료 에소프레소 커피 추출액 1 컵, 설탕, 레몬 껍질
만드는 방법
1) 일인용 에소프레소 커피 기구에 커피 가루를 다져 넣고 끓인다.
2) 에소프레소 진에 커피를 따른다. 컵에 레몬 껍질을 미리 넣어 두기도 한다.
3) 취향에 따라 설탕을 넣어 마신다.

 
7. 비엔나 커피
다크 로스트 커피위에 휘핑크림을 얹은 부드럽고 우아한 커피이다.
실제 비엔나에는 없지만 세계 각국에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재료 커피추출액1컵, 설탕 1 1/2 작은술, 휘핑크림
만드는 방법
1) 컵에 설탕을 넣고 뜨거운 커피를 부어 젓는다.
2) 컵 윗면을 모두 덮도록 충분한 양의 휘핑크림을 얹는다. 비에나 커피에 사용하는 휘핑크림은 만들 때 미리 설탕을 넣어 단맛을 내는 것이 좋다.
3) 스푼으로 적고 마신다.

 
8. 스노우 커피
비엔나 커피의 응용. 눈처럼 휜 휘핑크림 위에 코코아 가루를 뿌린 달콤하고 부드러운 커피다.
재료 커피 추출액 1 컵, 설탕 1 1/2 작은술, 코코아 가루 1 작은술, 휘핑크림.
만드는 방법
1) 컵에 설탕을 넣고 뜨거운 커피를 부어 젓는다.
2) 컵 윗면을 모두 덮도록 충분한 양의 휘핑크림을 얹는다.
3) 코코아 가루를 뿌려 장식한다.

 
9. 카페 플라멩고
비엔나 커피의 응용. 휘핑크림 위에 정열적인 붉은색 체리를 올려 보기에 화려하고 맛은 상큼하다.
재료 커피 추출액 1 컵, 설탕 1 1/2 작은술, 체리가루 1 작은술, 휘핑크림, 체리 열매 1개
만드는 방법
1) 컵에 설탕을 넣고 뜨거운 커피를 부어 젓는다.
2) 컵 윗면을 모두 덮도록 충분한 양의 휘핑크림을 얹는다.
3) 체리 가루를 뿌리고 체리를 가운데 올려 장식한다.

 
10. 러시안 커피
비엔나 커피의 응용. 코코아 가루를 넣은 달콤한 커피에 휘핑크림을 얹고 초코시럽으로 장식한다.
재료 커피 추출액 1 컵, 설탕 1 1/2 작은술, 코코아가루 1 작은술, 휘핑크림, 초코시럽
만드는 방법
1) 컵에 설탕과 코코아 가루를 넣고 뜨거운 커피를 부어 젓는다.
2) 컵 윗면을 모두 덮도록 충분한 양의 휘핑크림을 얹는다.
3) 초코시럽을 뿌려 장식한다.

 
11. 티 카페
물 대신 커피로 홍차를 우려내 홍차와 커피의 향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커피이다.
홍차를 우려내는 시간이 길수록 커피 맛보다 홍차 맛이 진해지고 떫은 맛이 나므로 주의한다.
재료 커피 추출액 1 컵, 홍차 티백 1 개, 설탕 1 1/2 작은술, 레몬 저민 것 1 조각
만드는 방법
1) 컵에 설탕을 넣는다.
2) 티백을 컵 안에 넣고 뜨거운 커피 추출액을 붓는다.
3) 레몬 저민 것을 띄워 낸다. 홍차가 알맞게 우려나면 티백을 즉시 꺼내고 마신다.

 
12. 버터 커피
추운 겨울에 마시는 고소하고 열량이 높은 커피이다.
커피가 식으면 버터가 컵 주위에 붙으므로 뜨거울 때 빨리 마신다.
재료 커피 추출액 1 컵, 버터 1 조각.
만드는 방법
1) 컵에 추출한 커피를 따른다. 단맛을 좋아 하면 설탕을 넣어 녹인다.
2) 버터를 얇게 썰어 가운데에 띄운다.
3) 버터가 녹기 시작하면 마신다.

 
13. 카푸치노
에스프레소 커피와 우유 거품의 조화에 휘핑크림과 톡 쏘는 계피향이 어우러진 이탈리아식 커피이다.
재료 에소프레소 커피 추출액 1 컵, 우유 1/3 컵, 계피 가루 1/4 작은술, 휘핑크림, 계피 스틱
만드는 방법
1) 에소프레소 커피 가루에 계피 가루를 섞어 커피를 추출한다.
2) 손잡이가 달린 냄비에 우유를 넣어 끓기 직전까지 데운다. 전자레인지에 데우거나 중탕해도 된다. 충분히 거품을 내기 위해 블랜더로 몇 초간 저어준다.
3) 컵에 계피 스틱을 꽂고 커피를 부은 후 그 위에 거품을 낸 우유를 조심스럽게 따른다. 휘핑크림을 얹고 계피 가루를 뿌린다.

 
14. 스파이스 커피
다양한 향신료를 넣어 추출한 커피에 휘핑크림을 엊고 꿀과 계피 스틱으로 장식한 커피
아라비아에서 처음으로 마시기 시작할때에는 이런 맛의 커피였다.
재료 에스프레소 커피 추출액 1 컵, 너트맥 가루 소금, 계피 가루 조금, 설탕 1 작은술, 꿀 1 작은술, 휘핑크림, 계피 스틱
만드는 방법
1) 너트맥 가루와 계피 가루를 조금씩 넣고 커피를 부어 젓는다.
2) 컵에 설탕을 넣고 뜨거운 커피를 부어 젓는다.
3) 계피 스틱을 꽂고 휘핑크림을 얹은 후 꿀과 계피 가루로 장식한다.

 
15. 스파이스 커피 카푸치노
스파이스 커피와 카푸치노 의 응용. 커피는 향신료를 넣어 추출하고 거품을 낸 우유를 위에 얹는다.
휘핑크림 위에 상큼한 마말레이드를 얹는다.
재료 에스프레소 커피추출액1컵, 너트맥가루 소금, 계피 가루 조금, 클로버향 1 개, 설탕 1 작은 술, 꿀 1 작은술, 마말레이드 1 작은술, 휘핑크림, 계피 스틱
만드는 방법
1) 너트맥 가루와 계피 가루, 클로버향을 넣고 커피를 추출한다.
2) 손잡이가 달린 냄비에 우유를 끓기 직전까지 데운다. 전자레인지에 데우거나 중탕해도 된다. 충분히 거품을 내기 위해 블랜더를 몇 초간 저어 준다.
3) 컵에 설탕을 넣고 뜨거운 커피를 부어 젓는다. 계피 스틱을 꽂고 거품 낸 우유를 조심스럽게 따른다.
휘핑크림을 얹고 마말레이드와 계피 가루로 장식한다.

 
16. 카페 프리덤
다양한 향신료를 넣어 추출한 커피에 코코아 가루와 생크림으로 부드러운 맛을 더하고 휘핑크림과 계피 스틱으로 장식한 커피이다. 풍부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재료 커피 추출액 1 컵, 코코아 가루 1 작은술, 설탕 1 1/2 작은술, 생크림 1 작은술, 계피 가루 조금, 클로버 향 1개, 소금, 휘핑 크림, 계피 스틱, 레몬 껍질 다진 것.
만드는 방법
1) 계피 가루와 클로버향을 넣고 커피를 추출한다.
2) 컵에 코코아 가루와 설탕, 소금을 넣고 뜨거운 커피를 붓는다.
3) 생크림을 넣고 계피 스틱을 꼽는다. 휘핑크림을 얹고 레몬껍질 다진 것과 계피 가루로 장식한다.

 
17. 모카 카리엔디
초콜릿 향의 모카커피에 코코아 가루를 넣어 향을 더하고 그 위에 휘핑크림과 아몬드를 얹은 고소하고 달콤한 맛의
커피이다.
재료 모카커피 추출액 1 컵, 코코아 가루 1 작은술, 생크림 1 작은술, 설탕 1 1/2 작은술, 휘핑크림, 아몬드
만드는 방법
1) 컵에 코코아 가루와 설탕을 넣고 뜨거운 커피를 부어 녹인다.
2) 생크림을 넣어 부드러운 맛을 더한다.
3) 휘핑크림을 얹고 아몬드를 잘게 썰어 장식한다.

 
18. 피너츠 커피
피너츠 버터를 녹인 밀크 커피 위에 휘핑크림을 얹은 진하고 부드러운 맛의 커피이다.
재료 커피 추출액 1컵, 우유 1/3 컵, 피너츠 버터 2 작은술, 설탕 1 1/2 작은술, 휘핑크림, 땅콩 다진 것 조금.
만드는 방법
1) 손잡이가 달린 냄비에 우유를 끓기 직전까지 데운다. 전자레인지에 데우거나 중탕해도 된다.
2) 컵에 우유와 설탕과 피너츠 버터를 넣고 녹인다.
3) 커피를  부어 젓는다. 휘핑크림을 얹고 땅콩 다진 것으로 장식한다.

 
19. 아이스 커피
여름철에 쉽게 즐겨 찾는 아이스커피의 생명은 커피의 쓴맛에 있다.
따뜻한 커피에 비해 향은 적지만 여름철의 갈증과 더위를 식히기에 충분하다.
재료 커피추출액 60ml, 설탕시럽 20ml, 액상크림, 얼음 적당량
만드는 방법
1) 긴 유리컵에 얼음을 가득 채워 담는다.
2) 설탕시럽을 넣고 커피를 따른다.
3) 취향에 딸라 액상 크림을 넣는다. 이 때 크림은 젖지 말고 천천히 크림을 혼합된 맛을 즐기며 마시도록 한다.

 
20. 플로트 온 더 커피
아이스 커피 위 아이스크림과 휘핑크림을 얹은 시원하고 달콤한 커피
재료 아이스 커피 1컵, 시럽 30ml, 바닐라 아이스크림, 휘핑크림, 초코 시럽, 인스턴트커피 가루, 체리 1개
만드는 방법
1) 유리컵에 아이스커피 원액을 따른다. 아이스 커피 원액을 만들려면 다크 로스트의 원두로 진하게 추출한 커피를 병에 담아 냉장고에서 급속히 식힌다.
2) 시럽을 넣는다. 생크림을 넣어도 좋다.
3) 컵 위에 아이스 크림을 떠 넣는다. 휘핑크림을 얹고 커피 가루와 초코 시럽을 뿌린다. 체리로 장식한다. 긴 스푼과 스트로우를 함께 낸다.

 
21. 커피 샤워
위스키가 들어간 아이스 커피로 컵의 입술이 닿는 부문에 레몬즙과 입자가 굵은 설탕을 묻히는 것이 특징이다.
재료 아이스커피 원액 60ml, 탄산수 60ml, 레몬주스 20ml, 시럽 30ml, 위스키 조금, 레몬저민 것 1조각.
만드는 방법
1) 차갑게 한 유리컵을 거꾸로 해 입구에 레몬즙을 묻히고 입자가 굵은 설탕을 묻힌다.
2) 레몬주스, 아이스커피 원액, 시럽, 위스키를 넣는다. 위스키 양은 취향에 따라 정한다.
3) 탄산수를 따른다. 거품이 올라오며 윗부분에 층이 생긴다. 레몬으로 장식한다.

 
22. 커피 밀크 셰이크
우유와 아이스 커피 원액을 세이커에 넣고 흔들어 만드는 여름철 음료로 부드럽고 시원하다.
재료 아이스 커피 원액 80ml, 우유 40ml, 생크림 2 큰술, 시럽 20ml, 휘핑크림.
만드는 방법
1) 차가운 우유와 아이스 커피 원액을 일대일의 비율로 섞어 시럽, 생크림과 함께 셰이커에 넣고 흔들거나 블랜더로 섞는다.
2) 미리 차갑게 한 컵의 가운데 부분을 초코 시럽으로 장식하고 음료를 붓는다.
3) 스토로우를 꽂아 낸다.

 
23. 블랙 앤드 화이트
유리잔의 아랫 부분에는 블랙 커피, 윗부분에는 여유와 휘핑크림이 섞인 흰 크림을 담아 뚜렷한 대비를 이루게 한
음료이다. 연유를 많이 넣으면 단맛이 강해진다.
재료 아이스 커피 원액 1 컵, 시럽 20ml, 연유 20ml, 휘핑크림.
만드는 방법
1) 밑이 둥근 유리잔에 아이스 커피 원액을 따른다. 단맛을 좋아하면 시럽을 넣는데, 크림이 들어가는 연유가 달기 때문에 보통보다는 적은 양을 넣는다.
2) 휘핑크림과 연유를 일대일의 비율로서 섞어 커피위에 얹는다. 휘핑크림만 쓰는 것에 비해 농도가 진하고 단맛이 많이 나는 크림이 된다.
3) 커피와 크림을 한꺼번에 마시고 입안에서 맛의 조화를 음미한다. 커피 추출액 1컵, 아이리시 크림(리큐르)
2 작은술, 설탕 1 작은술, 위스키, 휘핑크림

 
24. 아이리시 커피
더블린 공항에서 추위를 잊기 위해 처음으로 마시기 시작했다는 위스키가 들어간 커피.
뜨껍게 마시는 커피지만 유리잔에 마신다.

재료 커피 추출액 1컵, 아이리시 크림(리큐르) 2 작은술, 설탕 1 작은술, 위스키, 휘핑크림

만드는 방법
1) 손잡이가 달린 유리잔에 위스키를 부어 불을 붙인 뒤 다른 유리잔으로 옮기면 알코올을 증발시킨다.
2) 어는 정도 지난 다음 불을 끄고 초콜릿 맛이 나는 리큐르(아이스크림)와 설탕을 넣는다.
3) 커피 추출액을 붓는다. 휘핑크림을 올리고 스푼과 함께 낸다.

http://muning.aquz.biz/gnu/bbs/board.php?bo_table=info&wr_id=3&page=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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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귀

정보의바다 2008. 2. 14. 09:36
◆지독한 방귀 냄새는 유황 성분 탓
장 속에서 만들어지는 가스는 대부분 질소ㆍ산소ㆍ이산화탄소ㆍ수소ㆍ메탄 가스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대개는 냄새나 색깔이 없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이 수소인데, 수소는 음식물 찌꺼기를 먹고 사는 세균들이 만들어 낸다. 세균 중 일부는 수소를 마시고 살면서 메탄 가스를 만들어 낸다. 수소와 메탄 가스는 음식물 찌꺼기에 포함돼 있는 유황이라는 성분과 결합하는데, 이 유황이 바로 독한 냄새를 일으키는 장본인이다. 유황을 포함한 가스가 많을수록 방귀 냄새가 많이 난다. '큰 소리가 나는 방귀는 냄새가 안 난다.'라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방귀 냄새는 대부분 식습관 때문이다.




◆방귀 소리 제각각 이유 있다

방귀 소리가 유달리 크게 나는 사람이 있다. 방귀 소리는 배출되는 가스의 양이나 압력, 그리고 항문 질환 등 가스 배출 통로의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같은 힘을 줄 때 통로가 좁을수록 소리는 크게 나게 되는데, 밀어 내는 힘이 유난히 크거나 변비나 치질로 인해 통로가 부분적으로 막힌 사람의 경우 남보다 방귀 소리가 크게 나게 되는 것이다.




◆방귀 많이 뀌면 병일까?

건강한 사람이 하루 동안 몸 속에서 만들어 내는 가스의 양은 500∼4000 cc 정도이다. 만들어진 가스는 내장을 통해 혈관에 흡수되고, 나머지 중 일부는 트림이나 숨쉴 때 몸 밖으로 빠져 나간다. 또 일부는 방귀가 된다. 사람들은 하루 평균 13∼15 번 가량 방귀를 뀌지만 대부분 의식하지 못하며, 그 양은 평균 600~700 cc, 최대 1500 cc 정도이다. 우유나 치즈 등의 유제품을 먹으면 방귀를 뀌면서 설사를 한다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유제품 속에 들어 있는 유당이라는 성분을 분해하는 효소가 다른 사람보다 부족한 사람이다. 이 경우에는 우유나 치즈를 적게 먹으면 증상이 나아진다. 의사들은 남들에 비해 방귀를 뀌는 횟수가 잦거나 냄새가 약간 심하더라도 우리 몸 건강에 어떤 문제가 나타나지 않는 한,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배가 계속 아프거나 밥맛이 없고 몸무게가 줄어들면서 설사와 변비 등의 증상이 동시에 나타나면, 다른 대장 질환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병원에 가서 정확히 진찰을 받아 보는 것이 좋다.




◆방귀 많이 나오게 하는 음식

탄산 음료와 껌ㆍ콩ㆍ양배추ㆍ브로콜리ㆍ오이ㆍ양파 등은 방귀를 많이 나오게 하는 음식이다. 평상시 방귀가 걱정인 사람들은 이 같은 음식을 조금씩 먹는 것도 방귀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성장기에 있는 학생들은 골고루 먹어야 키도 크고 튼튼해지기 때문에, 방귀 때문에 편식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주식으로 먹는 쌀은 대장에서 완전히 소화되기 때문에, 밥을 잘 먹는 것도 방귀를 적게 뀌는 비결이다.




◆방귀 참으면 병이 되나?

방귀를 참게 되면 장에 쌓이게 되고, 우리 몸에 흡수돼 피부로 배출되거나 간ㆍ신장 등을 거쳐서 밖으로 나온다. 만약 황화수소 등 독소를 포함한 가스가 장 속에 남게 되면, 위와 같은 과정을 반복하면서 간장 기능을 약하게 하거나 혈액에 흡수돼 면역력이 저하될 수 있다. 따라서 방귀는 참지 말고 시원하게 뀌는 것이 건강을 위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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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법제

정보의바다 2008. 2. 14. 09:36
유사법제란 일본이 타국의 무력 공격을 받는 등 비상 사태가 발생했을 때 [자위대]와 정부의 대응방침을 규정한 법규다. 그러나 무력사용이 예상되는 경우에도 자의적으로 무력 사용을 결정 할 수 있다. 또 정부가 비상사태를 선포했을 경우 민간의 물자동원등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시민단체 등은 유사법제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비난해왔다. 유사법제는 지난 77년 '연구'란 이름으로 유사법제 검토가 시작됐으나 주변국과자국내 반대여론에 밀려 제정이 연기돼 왔으나, 2003년 6월 13일 유사법제 3개법이 13일 시행됐다. 이로써 일본 패전 58년 만에 `전시'에 대비한 국가 체제 정비를 목적으로 한 법제가 일본에서 처음으로 효력을 갖게 됐다. `유사(有事)'란 곧 전쟁을 의미한다. 유사법제 시행은 일본 정부가 1977년 `연구'라는 이름을 빌어 유사 법제 검토에 착수한 이후 4반세기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논의 자체가 금기시돼 왔던 유사법제의 탄생으로 전수방위를 원칙으로 해온 일본의 안보 방위 정책은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됐다.



유사법제는 무력공격사태 대처법, 자위대법(개정), 안전보장회의 설치법(개정) 등 3개 법률로 연립여당과 야당인 민주, 자유당이 수정 합의를 거쳐 마련한 것이다. 무력사태법은 일본이 외국의 공격을 받았을 경우의 정부 기본 대처 방침과 의사 결정 절차 등을 담고 있다. 특히 이 법은 외국 군대의 집결 징후 포착 등 무력공격이 예상되는 경우 만으로도 이 법이 발동되게 돼 있어 법적용과 무력공격 사태 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자의적'인 자위대 `병력' 동원이 얼마든지 가능해 졌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개정된 자위대법은 유사시 자위대의 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민간 토지 수용 절차를 간소화하고 물자 보관 명령을 따르지 않는 민간인을 처벌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골자다. 일본의 진보적인 시민 단체들은 이 유사법제가 과거 전쟁때의 `국가총동원법'을 연상케 하는 `전쟁준비 법률'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앞으로 유사3법의 후속법인 `국민보호법제'와 미군지원법제, 자위대 행동 원활화법제 등을 순차적으로 정비한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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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비 & 숙변

정보의바다 2008. 2. 14. 09:36
대변의 횟수가 아주 드물고 변이 딱딱하여 대변을 보기가 힘든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변비가 있는 사람은 변 보기가 어렵고 고통스러우며 복부 팽만감이나 불쾌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배변습관이 규칙적인데도 불구하고 변비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단지 그들이 매일 변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변비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루에 또는 일주일에 몇 번 대변을 보아야 정 상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 하루에 세번에서 일주일에 3번까 지는 정상적인 배변습관으로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어떤 사람은 원래부터 다른 사람보다 딱딱한 변을 보거나 약간 무른 변을 보기도 합니다. 보통 변비가 없던 사람들도 가끔은 변비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적은 식사량과 운동부족이 그러한 원인이 될 수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변비는 일시적이며 별로 심하지 않습니다. 각각의 원인을 이해하고 예방법을 익히고 치료하면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증상의 호전을 보일 수 있습니다. 변비란 변을 보기 어려운 상태로, 사람마다 그 의미는 다르다.



1. 대변을 1주일에 2회 이하로 본다.

2. 대변의 무게가 하루 30-35g 이하이다.

3. 배변시 4회중 1회이상 매우 힘이 든다.

4. 배변시 4회중 1회이상 딱딱한 변을 본다.

5. 배변후 4회중 1회이상 불충분한 기분이 든다.


위의 5가지 항목중 2가지 이상이 3개월 이상동안 지속될 때를 변비라고 말합니다. 병에 걸리는 것은 체내에 독소가 쌓여 있기 때문이다. 장의 움직임이 둔해지면 배설에 지장을 주고 노폐물이 장에 머무르기 때문에 독소는 장벽을 통해 혈액 속으로 바로 흡수될 가능성이 많아지며 그 독소는 조직속에 정착한다. 만약 배설 계통 어딘가가 문제를 일으키면 더욱 많은 양의 노폐물이 체내에 머물 게 된다. 독소가 조직 내에 정착함에 따라 세포 파괴의 정도는 더욱 늘어가고 그렇게 되면 정화기능도 떨어지고 음식물이 완전히 소화되지 않게 되므로 문제는 더욱 커진다. 장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오랫동안 변을 담고 있다. 이렇게 오래되어 썩은 물질을 배설하여 장을 비우면 찌꺼기, 통증, 자가중독 증상은 아주 가벼워진다. 대부분의 경우 s상결장 속에서 부패하는 이물질에는 악성 병원균이나 세균류가 증식하는데 이는 병이 생기는 아주 좋은 조건이다.



1. 만성두통이 생깁니다.

대장 속에는 여러 가지의 균이 있는데, 변이 오래 머물면 부패균들이 번식하게 되어서 나쁜 가스들을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면 황화수소(달걀 썩는 냄새), 암모니아, 인돌(양파 썩는 냄새), 니트 로소아민, 히스타민, 페놀등의 유해 가스가 발생되어서 나가지 못하고 체내에 흡수됩니다. 이러한 가스는 공기보다 가벼우므로 머리 쪽으로 이동하여서 두통,시력장애,
피부알레르기 등의 요인이 되고, 나아가서는 우울증 등의 정신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2. 피부질환을 유발시킵니다.

유독성 가스들이 흡수되어서 피부가 거칠어지고, 여드름,기미, 주근깨 등 각종 피부질환이 생깁니다. 흔히 여드름을 호르몬의 이상 분비가 원인이라고 하지만, 변비가 없어지면 여드름도 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3. 구취가 납니다.

유독성 가스가 방귀로도 나가지 못하고 장 속에 꽉 차 있으니, 입만 벌리면 냄새가 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요.




4. 치질, 치핵 등

치질이 변비 때문에 항상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치료와 예방을 위해서는 변비를 먼저 해결하여야 합니다.




5. 치열

변비가 심해져서 딱딱하게 굳은 변이 나오면서 항문을 찢어서 생긴 상처를 말합니다. 변이 나올 때 몹시 쓰리고 아프거나 배변 전 후에 출혈이 되는 증상이 있습니다. 상처가 미처 아물기도 전에 딱딱한 변이 다시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로 균이 들어가서 고름이 생기기도 하여서 치질 또는 치액의 원인이 됩니다.




6. 대장암

변비로 인하여 장 속에서 생기는 유독가스 중에 니트로소아민과 페놀 등은 발암성 물질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발암가스가 배출이 되지 못하고 장에 흡수된다면 당연히 암을 일으키게 되겠지요.




7. 뇌졸중

고혈압이면서 변비가 있으신 분이 배변을 할려고 힘을 주다가 뇌 속의 미세 혈관이 터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생명에 치명적이며, 중풍 등의 후유증으로 반신마비가 되기도 합니다.특히 중풍 등으로 반신마비가 되신 분들은 소화기관의 기능도 완전하지 못하므로 변비가 심해지며,점차적으로 신진대사가 저하 되어서 질병을 얻거나 생명을 잃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특히 고혈압 증세가 있는 분은 반드시 변비를 치료하여야 합니다.




8. 키가 크지 않습니다.

신체의 신진대사가 원활하지 못하여서 키가 쑤욱 쑤욱 자라지 못합니다. 또한 생리도 불균일하여지고, 통증이 심하고 맑지 못합니다. 몸 속에 나쁜 피가 몰려다니므로 관절통증이 생기기도 합니다. 숙변 우리는 하루 정해진 식사를 꼬박꼬박 합니다. 어떤 때는 끼니와 상관없이 먹는 간식도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우리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은 정해져 있는데 음식은 시도 때로 없이 우리 몸으로 들어오게 됩니다.그러면 음식은 식도를 통해 위를 지나 장에 머무르게 됩니다. 장의 기능은 양분을 흡수하는 일인데 , 과도한 양분은 지방살이 되어 비만과 성인병을 부릅니다.

그러다보니 음식의 흡수량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변을 체내에 축적해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숙변입니다.인간의 장에는 주름이 하도 많아서 오래살다 보면 그 사이에 변이 끼어 설 사를 해도 잘 안 빠져 나오고 버티고 있는 변들이 있는데 이걸 숙변이라고 합니다. 그 증거는 바로 정육점에 가서 곱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장사이에 끼어있는 변들이 수세미로 닦아내도 잘 빠지지 않는데 그게 다 숙변입니다. 보통 1~5kg에서 심한 사람은 10~15kg입니다.




-숙변은 왜 나쁜가?-

숙변은 모든 사람에게 존재합니다. 숙변이 장내에 존재하면 장의 연동운동에 장애가 있어 아랫배의 불쾌감과 숙변이 부패 발효하면서 독소를 배출하여 혈액을 탁하게 만들어 혈관장애와 독소에 의한 간기능 저하와 성인병의 원인이 됩니다. 더욱이 운동부족인 사람과 변비가 있는 사람은 장의 연동운동이 약해 숙변이 많이 존재합니다숙변 → 유독가스 → 혈액 → 간손상 → 기미, 두통, 간기능 저하 → 만성피로 성인병(고혈압, 당뇨 등)




-장세척(숙변제거)이 필요한 질환-

-만성 및 습관성 변비

-만성 및 습관성 설사

-신경성 및 만성 대장염

-만성 소화불량 및 소화기 질환

-대장암 예방

-각종 성인병 예방

-간독성 제거, 만성 간염

-피부질환 (거친피부, 기미, 여드름)

-구취, 두통, 불면증, 각종 만성 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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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통적인 복권의 기원은 근대 이전의 한국사회에서 크게 발달한 일종의 민간협동체인 “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조선시대 후기에 볼 수 있었던 “산통계”나 “작백계”가 바로 그것인데, “산통계”는 통 혹은 상자 속에 각 계원의 이름을 기입한 알(구형물)을 투입한 후 그 통을 돌려감에 따라 나오는 알에 의하여 당첨을 결정하는 것이었으며 “작백계”는 잡백계 또는 작태계라고도 일컬어지던 것으로 일정번호를 붙인 표를 100명 단위, 혹은 1,000명 단위로 팔고 추첨을 하여 총 매출액의 100분의 80을 복채금으로 돌려 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현재 우리나라 복권의 시초입니다.



- 일제시대 때의 복권

일부 일제시대때 발행된 복권들이 발견되고 있으나, 해방 이후 1947년부터 1949년까지 3년간 복권발행이 가장 활발하였습니다. 전국 규모로 발행되기도 하였고 지방자치단체별로 발행되기도 하였으며, 또한 학교 등 개별기관에서도 복권을 발행하였습니다.



- 복권의 초창기

근세 이후에 와서 1948년 제16회 런던올림픽대회 참가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1947년 12월
올림픽 후원권이 발행되었습니다. 1949년 10월에는 이재민 구호기금마련을 목적으로 후생복표가 3회에 걸쳐 발행되었고, 1956년 2월부터는 애국복권이 매월 1회씩 산업 및 사회복지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정부에 의하여 발행되었습니다. 그 후 특수한 목적으로 산업박람회복권, 무역박람회복권 등이 발행되었으나 계속적으로 존속하지 못하다가, 1969년 '주택복권'이 발행되면서 우리나라에도 정기발행복권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 공식적인 우리나라 최초의 복권 '올림픽 후원권'

우리나라에서 발행되었던 최초의 복권(1947년 12월)으로는 '한국 올림픽 후원회'가 1948년 제16회 런던올림픽대회 참가 경비 마련을 목적으로 발행한 '올림픽
후원권'입니다. 당시 올림픽 후원권은 총 발행매수 140만 매에 가격은 100원이었고 1등 상금은 100만원에 달했습니다. 50년대 초 서울의 집값이 100만원 정도였다고 하니 지금으로 치면 당시 100만원의 가치는 지금의 한 5억
정도의 가치를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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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라크전쟁에서 미·영군이 접수한 바그다드국제공항 이름이 사담후세인공항(BGW)이라는 것이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밖에 존 F 케네디(JFK, 뉴욕), 라구아디아(La Guardia/LGA, 뉴욕주의 명 지사), 로널드·레이건(Ronald Reagan Washington National Airport /DCA, 워싱턴), 죠지 부쉬(Houston, IAH), 영화배우 죤·웨인(John Wayne SNA/Santa Ana), 테드 스티븐스 의원(Anchorage, ANC), 가수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New Orleans, MSY), 재즈가수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빈(Antonio Carlos Jobim, Rio de Janeiro, GIG), 멕시코의 베니토 후아레츠 대통령(Benito Juarez, Mexico City, MEX), 캐나다의 전 총리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레스터 피어슨(Lester B. Pearson,Toronto, YYZ), 관타나메라(Guantanamera)의 시를 쓴 쿠바의 시인이자 혁명가인 호세 마르티(Jose Marti, Havana, HVA), Jorge Chavez(페루 Lima, LIM) 또 있다.



프랑스의 전 대통령 샤를·드골(Charles de Gaulle/CDG, 파리), "모나리자"의 레오나르도·다빈치(Leonardo Da Vinci/FCO, 로마), 마르코폴로(Marco Polo/VCE, 베니스), 인류최초의 글라이더 비행사 오토 릴리엔탈(Otto Lilienthal, Berlin), "왈츠의 황제" 요한·슈트라우스(Franz Josef Strauss, MUC, 뮌헨), 피터스버그(St Peterburg, 구 레닌그라드, LED), 잰·스마츠(Jan Smuts, Johannesburg), William B. Hartsfield(Atlanta), Bandaranaike(스리랑카 콜롬보),압둘 아지즈왕(King Abdul Aziz, Jeddah), 캐냐의 초대 대통령·조모 케냐타(Nairobi, NBO), 벤·구리온(Ben-Gurion Intenational, Tel Aviv Yafo, TLV, 텔아비브), 모하메드5세(Mausol Mohammed V, Casablanca, CSA, 카사블랑카), 인디라·간디(Indira Gandhi, DEL/뉴델리), "대만의 국부" 장제스(蔣介石,Chiang Kai Shek, 타이페이), 스카루노(Soekarno-Hatta, Jakarta), 니노이 아키노(Manila, MNL), 세계최초로 태평양 횡단 비행에 성공한 Kingsford Smith경(Sydney, SYD), 호치민(Ho Chi Minh/SGN)



예술가에서 영화배우, 정치 지도자, 왕에 이르기까지 신분과 직업도 다양하지만 세계적인 도시의 공항 이름이라는 것은 공통점이다. 여기에 비틀즈 출신의 존 레넌이 당당하게 이 대열에 끼어 들었다. 그의 고향인 영국 리버풀공항 당국은 지난 2002년 봄 새 터미널을 오픈하면서 이름을 "리버풀·존·레넌(Liverpool-John Lenon Airport/LPL)공항으로 바꾸었다. 공항당국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새 로고에 레넌의 얼굴과 히트곡 "이매진"의 가사 한 구절까지 넣고 동상도 건립하여 지역 홍보를 위해 레넌의 문화적 부가가치를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비록 1971년 비틀스는 해체됐지만 존 레넌은 다시 되살아났다.



보수적인 영국인들까지도 공항 명칭에 대중가수의 이름을 갖다 붙이고 있는 유럽지역에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Wien, Vienna, 공항코드 VIE)공항에 악성(樂聖)의 이름이 붙여져 있지 않고 슈베하트(Schwechat)라는 이름으로 있는 것이 자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비엔나 하면 굳이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번쯤 떠올리는 도시이다. 모짜르트, 슈베르트, 하이든, 베토벤, 스트라우스, 브람스, 말러, 부르크너, 쇤베르크 등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탄생했거나 활약했던 곳으로 오늘날까지도 그 전통이 생생하게 살아 이어지고 있으나 워낙 많은 음악가가 거쳐간 바람에 어느 누구의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몰라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독일의 뮨헨 출신 음악가인 요한슈트라우스는 뮨헨공항(Munich/MUC)에 자기 이름이 올라있는데 반해 본(Bonn) 출신인 베토벤은 공항이 본보다는 쾰른쪽에 붙어 있어서 그런지 공항 이름도 향수의 대명사인 쾰른(Cologne/CGN, 프랑스 발음 콜로뉴)에 뺏겨버린 인상이다. ICAO에 규정하고 있는 최상위 등급인 ILS Category IIIb이고 활주로 3개를 갖춘 초현대식 공항이어서 공항 이미지도 높일 겸 베토벤·쾰른공항으로 불러 줄만도 한데...



우리의 경우를 살펴보자. 김포공항에 이어 단군이래의 최대 역사로 불리는 인천공항 역시 이름을 지명으로 붙였다. 신공항 건립 당시 이름을 "세종공항"으로 하자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됐었던 것은 온 국민이 다 알고 있는 바이다. 1992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세종이라는 이름이 1위를 차지했고 당시 문화부에서도 이를 강력하게 추천했지만 지역 정치인들과 시민단체의 반발에 부딪쳐 불발로 끝난 느낌이다. 우리나라의 관문인 국제공항 이름은 도시의 국제적인 지명도를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므로 도시이름을 붙이는 것은 보편적이라 할지라도 동북아 허브공항을 꿈꾸는 거대 공항의 이름이 지닐 엄청난 파급 효과를 생각해 볼 때 아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세종대왕을 통해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일깨울 기회를 놓쳤다는 안타까움은 리버풀·존·레넌 공항을 보면서 새삼 되살아난다.



단지 "세종"은 한국에는 한 명밖에 없는 위대한 대왕의 이름임에 틀림없지만 옛날 중국에는 후주(後周)의 제2대, 明나라 제12대, 淸나라 제5대 등 3명의 "世宗"왕이 존재했다. 게다가 그 왕들이 그다지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던 것도 숨겨진 이유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유네스코가 지난 1989년 9월에 제정한 문맹퇴치상 이름을 "세종대왕상(UNESCO King Sejong Literacy Prize)"으로 명명했다.그리고 1997년에는 훈민정음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멀리 남극 King George Island에는 1986년 1월 6일,해발 5000m가 넘는 남극 대륙의 최고봉에 태극기를 꽂고 이어서 1988년 2월 준공한 우리나라의 세종기지에는 자랑스럽게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는데 먼 훗날 우리나라의 우주정거장이 생기게 되면 분명 "세종우주스테이션"이라고 명명할 것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우주에다가 자기 고장의 지명을 갖다 붙이자고 우길 사람은 아마 없을 터이니까. 그렇다면 "(King) Sejong International Airport, 공항코드 SEJ"는 어떨까?.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운 "ㅓ(eo)"자도 들어가지 않는 등 그 모든 것이 안성맞춤이었는데 말이다. 이도 저도 안 된다면 영국의 리버풀공항처럼 "인천-세종국제공항" "Incheon-Sejong International Airport"라고 고치면 안 되는 것일까. 두고두고 아쉬움과 미련이 남을 것 같다.



여기서 한가지 사실을 추가하자면 실은 우리나라에도 사람이름을 딴 공항이 있기는 하다. 제주도에 있는 정석(靜石)비행장이 그것이다. 이곳은 공항이 아닌 비행장이다. 그 이유는 공공용이 아닌 사설이기 때문에 공항이라 부르지 않을 뿐 국내의 어지간한 공항보다도 훨씬 규모가 커서 대형기도 무리없이 이착륙이 가능하다. 정석이란 오늘날 우리나라를 항공대국의 대열에 올려놓은 대한항공의 창시자 고 조중훈(趙重勳)회장의 아호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타이페이공항이 장개석(將介石) 총통의 아호 中正機場(CKS International)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조중훈비행장(CHC Airport)으로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정석비행장은 국내 최초의 민간비행장으로 대한항공이 훈련비행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남제주군 표선면 가시리 한라산 중턱지대에 2,300m 길이 45m 폭의 활주로를 갖추고 있다. 조종사 훈련시설, 관제탑, 자동착륙 유도장치 등을 갖추고 있어 A300 급 중형 항공기도 이·착륙 할 수 있는 최신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25㎚ 높이의 관제탑과 격납고 3개동과 교육관 및 시뮬레이터실 등을 갖춘 비행훈련원이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경기 기간 중에는 제주공항이 포화상태인 관계로 중국-브라질전을 관전하는 중국 관광객 120명의 수송을 위해 임시공항으로 사용됐던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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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행동에 대한 책임능력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상대하는 행위는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금기시되고 있다. 그럼에도 서양에서는
슈나미티즘, 그리고 동양에서는 도교의 논리에 의해 남성들은 지난 수세기 동안 미혼여성 중에서도 동녀를 성적으로 상대하면 회춘하게 된다고 믿고 있다. 동녀와 함께 자면 건강을 되찾는다는 서구인들의 믿음은 구약성서 열왕기상 편에 나오는, 3천여년 전 이스라엘 왕 다윗의 이야기에서 유래된다.

다윗이 늙고 기운이 쇠하자, 신하들은 정력을 보강하는 방안으로 동녀를 찾아 나섰다. 그들은 슈넴이라는 마을에 살던 아비삭이라는 동녀를 데려와 왕에게 동침을 권유했다. 이렇게 동녀와 동침하면서 정기를 되찾으려는 습속을 ‘슈넴의 여자’라는 뜻에서 슈네미티즘(Shunammitism)이라고 부른다.그러나 슈네미티즘은 정기를 되찾기 위해서는 동녀와 나체로 살갗만 댈 뿐 성교는 금했다.이슬람교의 예언자 마호메트는 자신보다 15살 연상이던 부인이 죽자 우울증에 시달렸는데, 주변에서 그에게 슬픔을 잊기 위해 다시 결혼하라고 권하자 아예샤라는 9살 소녀와 결혼했다. 대부분의 이슬람교 권위자들은 마호메트가 그 소녀와 결혼했어도 성적으로 성숙하기 전까지는 성교행위를 하지 않았고, 그 대신
슈나미티즘 생활에서 위안을 얻고 활기를 되찾았다고 믿는다.



중국의 도교는 초창기 남녀 모두의 성적 쾌락을 중요시하는 차원에서 출발했지만, 기원전 3세기쯤부터 남성의 쾌락위주로 발달했다. 그뒤 도교는 남성의 불로장생을 위해 숫처녀나 여러 여성을 성적으로 상대하되, 사정을 통제하라는 식으로 가르쳤다. 소녀와 동침할 때 성교를 하더라도 사정을 하지 않으면 소녀로부터 젊음의 기를 얻게 되어 장수하게 되지만, 사정을 하면 기를 얻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반대로 젊은 남성이 나이가 든 여성과 성교를 하면 자신의 정기를 모두 빼앗기게 되므로 주의를 요한다는 논리도 있었다. 과거 남성들의 건강과 장수 논리는 동녀와 자더라도 슈네미티즘처럼 아예 성교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 또는 도교처럼 성교를 하더라도 사정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과 관련돼 있었다. 그래서 도교의 입장에서는 남성이 사정을 하지 않고서도 성교를 오랫동안 지속시키는 방법을 훈련시켰는데, 이는 고대 페르시아에서 인도의 힌두교 및 중국의 도교에 전해졌다. 그러나 이런 논리의 신빙성을 가리기에 앞서 그 요구사항들은 대단한 노력이 수반되는, 실제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문제는 상당한 노력을 요했던 이러한 습속들이 남성들에게 나이 어린 여자와 성교를 해야 쇠퇴한 정력이 보충된다고 잘못 전달됐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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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차원의 입구설 

대표적인 것으로 미국의 랜돌프 윈터즈에 의하면 이 지역은 평행우주를 향한 차원의 문(일종의 공간비틀림 이라고 보시면 되여)이라고 주장했다. 이 차원의 문은 지구로부터 약 720광년 떨어져 있는 두 개의 거대한 태양들에서 쏘아진 광선이 어떤 지점의 시간대를 찢어지게 만들고 이 찢어진 시간대로 들어가는 에너지들은 평행 우주로 들어가는 차원의 문을 열게 만든다고 한다.



991년까지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벌어진 빈번한 실종 사건 보고가 있었다. 평화롭게 비행장을 출발하여 대서양을 지나다가 외마디 소리를 통제소에 남기고 갑자기 사라지는 비행기, 행방을 알 수 없는 배의 파편이 수천리에서 발견되는 괴상한 사건들. 버뮤다 3각 지대와 관련된 보고의 특징은 주로 배나 비행기가 갑자기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 지대에 대한 미스테리를 해석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가설들이 나오고 있으나 시원스러운 해답은 없는 것 같다.





2. 아틀란티스의 사라진문명설


그러나 다음에서 살펴볼 주장은 심령학자 애드가 케이시의 리딩(잠자면서 잠재의식으로 하는예언을 리딩이라 합니다.)에 근거하여, 버뮤다 3각 지대를 고대에 바다 속으로 몰락한 아틀란티스 문명과 연관짓고 있다. 저프리 케이트(Geoffrey Keyte)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버뮤다 3각 지대라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대서양 지역은 완전한 수수께끼이며 많은 역사기록도 남기고 있다. 이 특별한 지역에서는 많은 외관상 설명되지 않는 실종 사건들이 발생해 왔다. 대표적인 과학자들의 구체적인 척도를 만족시킬 만한 어떤 합리적인 설명도 수천년 동안 버뮤다 3각 지대에서 발생해온 모든 신기한 현상을 설명해 주지 못했다. 버뮤다 3각 지대는 어디어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버뮤다 3각 지역이 아틀란티스가 있었던 대서양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많은 저명한 아틀란티스의 권위자들이 아틀란티스가 위치하고 있던 명확한 위치에 대해 다른 의견과 다른 생각을 표현하고 있지만 나는 에드가 케이시가 1932년에 리딩한 것을 언급하는 것을 좋아 한다.


"그 위치... 아틀란티스 대륙은 한쪽으로는 멕시코만에서 다른쪽으로는 지중해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잃어버린 문명의 증거는 피레네돠 모로코, 영국의 혼두라스, 유카탄과 미국 대륙에서 발견되고 있다. 시시때때로 이 위대한 대륙의 일부였음에 틀림이 없는, 돌출 부분들이 있다. 영국 웨스트인디스나 바하마스는 현재 볼 수 있는 동일한 한 부분이다. 만약 지리적인 관측이 특히 이들 중에서 이루어지거나 비미니와 걸프스트림 근처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이것들은 이미 결말을 보았을 것이다."(364-3)그렇다고 치면, 내는 항상 에드가 케이시가 말해온 것을 믿고 싶은데 , 내 의견으로는 아틀란티스는 대략 케이시가 제안한 장소라고 말한 곳에 위치했다. 아틀란티스가 파괴되었을 때 그것은 대양의 가장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다. 폐허가 된 사원이 지금은 대단히 다양한 수중 생물들의 집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아틀란티스에서 오래전에 발견되었던 굉장한 힘과 에너지를 제공했던 위대한 아틀란티스의 불수정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지 우주를 향해 강력한 에너지 광선을 방출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파괴가 일어날 당시에 이들 불의 수정 중에 몇 개는 손상을 입어 바닥쪽으로만 빛을 방사할 수 있게 되었다. 각 불의 수정은 적어도 20피트의 높이와 약 8피트의 넓이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틀란티스에서 이들 불의 수정은 3가지 종류로 세워졌었으며, 천문학적인 에너지와 1등성의 힘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때때로 이들 손상된 아틀란티스의 불의 수정들에 의해 방사된 힘의 장이 대단히 강력하여, 이 힘의 장의 영향력 안으로 들어오는 비행기나 배는 해채되고 순수 에너지로 변형된다. 그래서 대단히 빈번하게 버뮤다 삼각지대라고 알려진 대양에서 사라지고 있는 불가해하고 기이한 실종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3. 블랙홀 설


몇몇 과학자들은 버뮤다 삼각 지대에서 상실되고 실종된 많은 비행기와 배들이 블랙홀(매우강력한 중력을 가진 일종의 구멍으로 빛까지 빨아들일정도의 힘을 가졌다고 한다.)이나 시간 왜곡의 일종으로 이전되어 버렸다는 이론을 전개시켜 오고 있다. 이것은, 내가 강력하게 제안하고 싶지만, 사실이 아니다. 비행기나 배가 사라질 때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영적인 상태로 변해버리게 된다. 어떤 예외적인 경우에, 사라졌다고 보도된 배가 실제로 되돌아 왔다. 그러나 승무워들은 모두 미쳤고 일관성이 없었고 실없는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이것은 아틀란티스의 불의 수정에 의해 투사된 힘의 장이 완전히 해체해버릴 정도로는 강력하지 않은 특정한 시기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대신에 심적인 감각 상실을 야기한 것이다!


이것은 약물 남용으로 버리에 충격을 받게된 사람과 유사한 것이다. 아마 사람들을 죽이거나 파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지만 머리의 구조에 심각한 손상을 주고 비정상적이고 다른 형태의 광기를 주기에는 충분했던 것이다. 이들 승무원 모두와 관련된 불일치는 환각, 공포, 그리고 그들으 마음이 감당할 수 없는 미지의 표현할 수 없는 공포스러운 생각이다. 손상된 아틀란티스의 불의 수정에 더하여, 시간 유지 수정은 여전히 폐허가 된 아틀란티스의 치료 사원 안에서 호위병으로 서있다. 그러나, 위대한 시간 유지 수정은 비밀리에 봉인되어 있기 때문에 불의 수정과 같이 동일한 방식으로 에너지를 투사하지는 않는다. 시간 유지 수정은 세상의 정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다시 한번 수행할 때가 올 시기를 위해 꾸준히 기다리고 있다.





4. 이집트의 제4 피라미드설


1970년대에, 아리조나 메사 출신의 자연치료요법사 Ray Brown 박사는 바다의 혀(Tongue of Ocean)라고 알려져 있는 인기있는 지역과 가까운, 바하마 섬의 베리(Bari) 섬 근처에서 몇몇 친구들과 스쿠바 다이빙을 했다. 그가 다이브를 하고 있을 때 브라운은 친구들고 분리가 되었고 그들을 찾는 동안에 그는 남녹색의 빛에서 이상한 피라미드 모양의 잔상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더 조사를 하면서 브라운은 거의 분간할 수 없는 개개의 블록들 사이에 결합되어 있는, 전체 구조의 돌 표면이 대단히 매끄럽고 거울과 같아 놀라게 되었다.


브라운이 유리색이었던 것으로 생각했던 광석 주위를 수영하면서 그는 입구를 발견했고 내부를 답사할 것을 결정했다. 협애한 현관을 지나 브라운은 마침내 피라미스 모양의 천정을 하고 있는 작은 직각의 방에 도착했다. 그는 이 방의 내벽에 산호 따위가 붙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완전히 놀랐다. 이 벽들은 완전히 흠집이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브라운은 횃불과같은 것을 전혀 가지고 가지 않았지만, 그의 육안으로 방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 방은 빛이 잘 들어왔으나 어떤 직사광선도 볼 수가 없었다.


브라운은 방 가운데에 있는 꼭대기로부터 아래로 드리워져 있는 직경 3 인치의 청동 장대를 보았는데 그것의 끝에는 다면체가 한 점으로 모이는 붉은 보석을 달고 있었다. 이 장대와 보석 바로 아래에, 방의 가운데에 앉아서 돌돌 말린 끝을 지닌, 돌 평판에 의해 끝이 처리된 깎인 돌로 된 스탠드가 있었다. 평판 위에는 무시무시한 열에 의해 그렇게 된 것처럼 보이는 검게 타버린 실물 크기의 청동색 금속으로 깎은 한 쌍의 손이 있었다. 손 안에 자리잡고 지붕의 장대 보석 바로 아래에 직경 4인치의 수정 표면을 한, 4개의 다리가 있었다.


브라운은 지붕의 장대와 붉은 보석을 풀려고 했으나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수정의 표면으로 되돌아 오자 그는 놀랍게도 청동의 손 용기로부터 쉽게 분리된다는 것을 알았다. 오른 손에 수정 표면을 잡고서, 그는 피라미드로부터 벗어났다. 브라운은 떠나면서, 보이지 않는 존재를 느꼈으며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괴상한 상은 미 행정부의 해난 구조법에 의해 몰수될지도 몰라, 브라운 박사는 그의 이상한 수정의 존재를 밝히지 않았고 1975년까지 그는 그의 경험을 발설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수정을 푀닉스의 심령 세미나에서 처음으로 전시했다.


그 당시에 그 수정의 표면은 단지 매우 드문 외관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본 어떤 경우의 사람들도 그것과 직접 관련되는 이상한 현상을 경험했다. 수정 형태의 내면 깊이에서 사람들은 하나 앞에 있는 작아지는 크기의 3개의 피라미드 이미지를 보게 된다.
의식의 깊은 명정 상태로 들어간 사람들은 다른 3개의 앞쪽에 4번째 피라미드를 구분할 수 있다. 뉴욕의 심령술사인, 엘리자베스 베이컨은 트랜스(최면) 상태에서 그 수정 구슬이 한때 3개의 대 피라미드 가까이에 있는, 기자의 성스러운 지식의 둥근 천장을 숨기는 역할을 한 이집트의 신, 토트(Thoth)의 것이었다고 말했다.


아마도 수정 구슬에서 3개의 피라미드의 이미지의 위치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기록의 방으로 우리에게 인도하는 지하의 4번째 피라미드를 발견하게 해주는 오랜 동안 찾았던 열쇠를 주는 것은 아닐까? 누가 알겠는가? 옆에서 수정 구슬을 바라보면, 내부의 이미지는 얇은 단면을 이루는 선으로 나뉘어진다. 브라운은 이것들은 미세 회로의 몇가지 형태와 같이 본래 전기적인 것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이제 다른 각도에서, 그리고 특별한 조건 아래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요하게 이들을 바라보면, 커다란 한쪽 눈을 볼 수 있었다! 브라운 박사의 수정 구슬은 대단히 다양한 초능력과 신기한 사건의 원천이 되어왔다.





5. 아틀란티스인의 핵문명설


아마 브라운의 바하마의 피라미드는 한때 아틀란티스의 일부를 형성한 것이 아닐까? 이 가라앉은 피라미드는 한때 우주적인 힘의 어떤 형태를 끌어들이고 축적하고 만들어내기도 했던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까? 매달린 장대는 관석에 축적되는 힘의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면을 가지고 있는 보석은수정구슬 아래에서 이것에 에너지를 집중시키고 투사하는 데 사용되었을 지도 모른다. 에너지 이동의 증거로 볼 수 있는 시꺼멓게 타버린 손은 아마, 수정 구슬이 에너지의 조율기와 방송기로서 기능을 수행했던 반면, 이들 에너지의 방사를 증폭시켰을 것이다.


1933년에 에드가 케이시는 아틀란티스인들이 원자력과 방사능의 몇가지 형태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2가지 리딩을 제공했다. "비록 동일한 불의 형태였으나, 개인들의 몸은 돌에서 나오는 광선을 응용하여 동물의 조직으로 파괴적인 힘을 보내는 영향력을 태워서 재생되었다. 그렇게 해서 몸은 재생되었으며, 그 땅의 파괴를 위해서 만들어진 사람들과 결합하거나 그 땅이 마지막으로 파괴될 때 베리얼(Belial)(일종의 막)과 함께 결합하여, 영원한 파괴가 있을 때까지 그것은 남아 있었다. 그 안에는 일체가 상실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은 파괴적인 힘에 대한 목적이나 소망도 없었다. 후에 그것은 권력 자체의 승격을 위해서였다"(440-5: 1933년 12월 20일)





6. 하이드레이트설


버뮤다 삼각해역의 수수께끼는 모든게 하이드레이트의 소행입니다.
미국의 과학재단과 영궁의 해양연구소의 공동조사로 버뮤다 삼각해역을 수중 음향기기로 조사하다가 하이드레이트 층을 발견했는데 하이드레이트가 뭐냐 하면 미생물의 시체가 쌓여 층을 이루고 그후 메탄이 굳어져 생긴 덩어리인데 물에 넣으면 순간적으로 거품이 일며 사라져 버립니다. 수조에 물을 넣고 모형배를 띄운 다음 하이드레이트를 집어 넣으면 배는 가벼운 메탄가스 거품 속에서 순간적으로 부력을 잃어, 마치 고층빌딩에서 떨어지듯 해저까지 낙하하는 것입니다. 비행기는 바닷속 지면이 미끄러지며 물에 닿은 하이드레이튼 해면으로 나오면서 공기중으로 퍼져 메탄가스로 된 거대한 기둥을 만듭니다.


거기에 비행기가 들어가면 엔진의 스파크로 불이 붙어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것입니다. 섬이 보이는 것은 해저의 진흙과 함께 뿜어나는 메탄가스가 해면위로 솟아오른 현상이고 나침반이 고장나는 현상은 수많은 거품이 물분자와 마찰함으로써 발생하는 마이너스 이온때문입니다. 마이너스 이온은 공기청정기 위에선 털이 곤두서는 강한 정전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나침반이 미친듯이 돌아가는겁니다.대략 북위(北緯) 20도에서 40도까지, 서경(西經) 55도에서 85도에 이르는 4백만㎢의 면적을 차지한다. 예전부터 이 지역을 통과하는 많은 선박과 항공기들이 괴현상을 보거나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기록은 1492년 콜럼부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할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워드 로젠버그는 1973년 U.S. Coast Guard는 지난 세기 동안 8,000건의 조난 신호와 50척 이상의 배와 20대 이상의 비행기가 버뮤다 지역에서 사려졌다고 한다.





7. 지구자기장설


이 괴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가설들이 나왔는데,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이론으로는 지구 자기장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지구의 자기장은 항상 일정한 것이 아니라 매 20~25만 년마다 자장이 바뀐다현재도 자장의 변화는 계속되고 있는데 그 때문에 자기적인 지진이 갑자기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며 버뮤다 삼각지대가 바로 대표적으로 자장이 불안정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공간이 일시적으로 형성되었다가 사라지므로 대비책을 세울수 없다는 것이다.





8. 외계인의 지구인 납치설





9. 버뮤다 삼각지대의 실종사건을 가장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버뮤다 삼각지대의 미스터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이 지역의 교통량은 매우 많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난파당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미국 해안경비대 당국에 따르면 연간 버뮤다 삼각지대 부근에서 구조를 요청해오는 배는 그곳을 항해하는 약 15만 척의 선박 중 1만 척 정도인데 그 중에서 실종되는 배는 극소수라고 한다. 더불어 1975년의 보고에 따르면, 미국 연안에서 소식이 두절된 배는 21척이며, 그 가운데 삼각해역 안에서 사라진 것은 4척이었다.


그리고 76년에는 사라진 28척 중 6척이 그 지역에서 사라졌다. 버뮤다 삼각지대의 실종사건이 한창 절정에 이른 1977년 여름, 미 해군은 소련 함대와 협력하여 '포리모오드 작전'을 공동으로 수행하였다. 목적은 서부 대서양 해역의 자기 이상 유무, 불규칙한 해류와 파랑(波浪)효과, 해중의 음향전파 경로, 돌발적인 자기(磁氣), 태풍 등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조사 결론은 한마디로 '특별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였다.
이 괴현상이 일어나는 장소를 버뮤다 삼각지대라고 불리게 된 원인은 빈센트 가디스가 대중 잡지인 '아고시(Argosy)'의1964년 2월호에 게재된 "죽음의 버뮤다 삼각지대"라는 기사에서 시작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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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 주사위의 복제품. 술자리에서 벌칙을 정하는 데 쓴 것이었다. 진품은 그러나 보존 처리 과정에서 한 줌 재로 사라졌다. /신형준 기자

문화재 야화 [16] 안압지 출토 14면체 주사위 통일신라 술자리 풍류용 ‘원샷’, 시 읊기 등이 내용

대권 싸움이 한창이다. 후보를 정한 한나라당이나 민노당, 그리고 대통합민주신당이나 민주당의 예비후보들은 저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며 필승을 외치고 있을 것이다.

카이사르가 “주사위…” 운운한 것은 서기전 1세기 중반이다. 최소한 주사위가 그 이전에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주사위는 이집트 등 오리엔트 지방에서 유래했다는 게 정설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언제 들어왔을까?

처음 전래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발굴품 중 가장 오래된 주사위는 통일신라시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주사위는 현재 복제품만이 남았다.



이 주사위는 1975년, 신라 태자가 거처하던 동궁(東宮) 주변에 조경용으로 만든 안압지에서 나왔다. 참나무에 흑칠(黑漆)을 했다. 높이는 4.8㎝로 손에 딱 잡히는 크기였다. 이 주사위는 그러나 여느 주사위와는 다른 특징이 있었다.

우선 정육면체가 아니라 십사면체라는 점이다. 이 중 6개면은 정사각형이었고, 8개면은 육각형이었다. 그리고 한 면을 제외한 나머지 13면에는 한자로 네 글자씩 적혀 있었다(나머지 한 면은 다섯 글자였다). 글자들을 해석하면 이 주사위는 술자리에서 사용되던 ‘벌칙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사각형에 적힌 벌칙은 음진대소(飮盡大笑·술 마시고 크게 웃기), 삼잔일거(三盞一去·술 석 잔을 ‘원샷’하기, 혹은 술 석 잔을 마시고 한 걸음 가기), 자창자음(自唱自飮·혼자 노래 부르고 술 마시기), 금성작무(禁聲作舞·소리내지 않고 춤추기), 중인타비(衆人打鼻·여러 사람으로부터 코를 맞기), 유범공과(有犯空過·여러 사람이 덤벼서 장난쳐도 참기)였다.

육각형에 적힌 벌칙은 추물막방(醜物莫放·더러워도 버리지 않기), 양잔즉방(兩盞則放·술 두 잔을 빨리 마시고 다른 이에게 돌리기), 임의청가(任意請歌·아무나 지목해 노래 청하기), 곡비즉진(曲臂則盡·팔을 구부리고 술을 다 마시기), 농면공과(弄面孔過·얼굴을 간지럽게 해도 참기) 자창괴래만(自唱怪來晩·‘괴래만’이라는 노래를 부르기), 월경일곡(月鏡一曲·‘월경’이라는 노래 부르기), 공영시과(空詠詩過·시 한 수 읊기)였다. 통일신라시대 술자리의 풍류를 물씬 느끼게 한다.

그런데 14면체인 이 주사위를 던지면 각 면이 나올 확률은 모두 같을까? 실측 결과로는 정사각형의 넓이가 대략 6.25㎠(가로 세로 각 2.5㎝)였고, 육각형의 넓이는 6.265㎝(최대폭 3.25㎝, 높이 2.8㎝)로 넓이는 대략 같았다.

이강섭 단국대 수학교육과 교수는 1987년, 제자들과 함께 안압지 주사위 복제품을 만들어 7000번 던졌다. 실험 결과 최대 542번 나온 면도 있었고, 최소 468번 나온 면도 있었지만, 대개는 평균치인 500번(7000번÷14면=500번)에 수렴(收斂)했다. 이 교수는 “모양과 크기가 같은 정다면체는 정4면체, 정6면체, 정8면체, 정12면체, 정20면체 등 5개만이 수학적으로 가능하다”며 “정다면체가 불가능한 14면체의 각 면 넓이를 거의 똑같이 만들어, 각 면이 나올 확률을 동일하게 만든 신라 장인의 솜씨가 놀랍다”고 했다.

하지만 이 주사위는 지금 없다. 출토 직후 수분을 제거하고 보존하기 위해 자동으로 온도가 조절되는 특수 오븐에 하룻밤 동안 넣었는데, 온도 과열로 한 줌 재로 사라져 버렸다. 국립문화재연구소측은 “오븐에 넣고 보존처리를 하기 전에 주사위에 종이를 대서 실측을 하고 전개도를 만들었다”며 “이를 바탕으로 복제품을 제작했다”고 했다.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 주사위의 복제품. 진품은 보존처리를 위해 오븐에 넣었다가 한 줌 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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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1월15일아틀랜타 오번가 501번지에서 출생1944년9월20일모어하우스 대학 입학

1948년2월25일애버니저에서 목사 안수

6월8일모어하우스 대학에서 박사 학위수여

1951년5월8일크로저 신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 수여

1954년4월14일앨라배마주 덱스터 교회 목사 취임

1955년6월5일보스턴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 수여

1955년12월 1일로사파크스부인흑백분리법률위반죄로체포

2월5일몽고메리진보연합회장으로선출(Montgomery I mprovement Association)



그가 목사로 재직하던 앨라바마주에서의 1955년 12월 1일. 로사 파크스 라는 할머니가 버스에 타자 백인전용 좌석 바로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백인남성이 차에 오르자 자리를 내주고 뒤로 가 서서 가라는 버스운전사의 말에, 파크스 할머니는 이를 거부하고 백인 남자들에게 뭇매를 맞고 경찰에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을 전해들은 당시 몽고메리주 덱스터 침례교회의 목사로 있던 27세의 킹은 파크스 할머니의 공판일 이었던 12월 5일부터 버스보이콧을 전개하자는 성명서를 내고, 일요일(12월 4일) 몽고메리의 각 교회에서 인쇄물을 나누어 주어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하였다. 흑인 승객의 60퍼센트만 협력해 주어도 대 성공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거의 100퍼센트가 협력을 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혼잡한 출퇴근 시간 동안 인도는 직장으로 그리고 다시 집으로 느긋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알라배마 주립대학의 학생들이 자동차 함께 타기를 자발적으로 하고 있었고, 개중에는 20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당일(12월 5일) 오전에 있었던 파크스 부인의 즉결재판에서는 흑백분리에 관한 시 조례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파크스 부인에게 유죄가 선고되고 벌금 10$와 재판비용을 합쳐서 총 12$를 지불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파크스 부인은 일심에 불복하여 항소를 제기했다. 이는 흑백분리법률을 위반한 죄로 흑인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진 최초의 사건이었다. 과거에는 이런 사건들은 기각되거나 공안방해죄로 기소되었다.킹 목사는 이를 계기로 새로 형성된 저항 단체인 몽고메리 진보연합(Montgomery Improvement Association : MIA)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이렇게 전개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은 예상을 깨고 만 1년이 넘도록 지속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 사이 킹 목사를 비롯한 이들 단체에는 아래와 같은 위협과 탄압이 있었다.



1956년1월30일자택폭파

1월26일 : 킹 목사는 5마일 과속으로 체포구금

2월21일MIA지도자들보이콧금지법률위반죄로기소

3월22일 : 불법 보이콧 주도로 386일구류형을 선고받고 항소

킹목사의 신변에 위협을 가하는 KKK단에게도, 당국의 대량 체포작전에도 이들은 굴하지 않았고, 버스보이콧은 꿋꿋이 계속되었다.

11월13일연방최고법원이버스내흑백분리법률위헌선언

12월21일MIA보이콧종료,킹목사흑백통합버스에최초로승차

몽고 메리의 승리는 흑인들에게 무력감과 수동성, 그리고 피해의식을 벗어던지고, 인간적인 대우를 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자긍심과 후세들을 위해, 전세계 민주화의 대의를 품고, 사명감을 가지고 무장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본격적으로 흑인들의 인권투쟁 시작.

1957년2월14일남부지도자 협의회 의장 선출

9월25일리틀락의센트럴고등학교의인종차별폐지를 위해 공권력을 투입한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지지

1960년2월1일애틀란타로이주,런치카운터연좌운동시작

1963년4월2일버밍햄 기독교인권운동 전개

4월12일순회 재판부의 항의운동 금지명령 위반 혐의로 체포



버밍햄은 조지 윌러스 주지사가 관할하는 앨러배마주에서 가장 큰 도시였는데, 이 윌러스 주지사는 치임선서에서 '오늘도 차별, 내일도 차별, 영원히 차별'을 맹세한 사람 이었다. 버밍햄은 미국 최고의 흑백차별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 식당의 런치 카운터 연좌운동, 불매운동, 선거인 등록울 위한 평화행진, 버스 보이콧등 다양한 기독교 인권운동을 감행한 킹 목사는 급기야 투옥되기에 이르렀다. 투옥된 킹 목사는 인권운동미국의 주요 교파의 대표 성직자 8명이 마틴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시위운동을 극단주의자, 범법자, 무정부주의자로 규정하는 신문광고에 대해 옥중에서도 반박 편지를 쓰면서 투쟁하였다.



4월16일버밍햄 백인목사들의 편지에 대한 항의 편지 답장
킹 목사가 보석으로 석방되긴 했지만 버밍햄 사태는 날로 심각해저만 갔다.

5월7일버밍햄 경찰 소년십자군(Children’s Crusade)에 대해 소방호스와 경찰견을 사용하여 1,000명의 어린이 체포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버밍햄 인권운동 지도자들은 대중집회를 중지하였고, 임시협정이 체결되었지만, 그 날 킹목사가 묵고 있던 게스턴 모텔과 킹 목사의 형의 자택이 KKK단에 의해 폭파되었다.

6월11일케네디 대통령 새로운 시민권에 대한 제안 발표

8월28일워싱턴 평화행진




그때의 연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유시위로 기록될 오늘 이 시간, 여러분과 함께 있으니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100년 전, 지금 우리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저 동상의 주인공 에이브러헴 링컨이 노예해방 선언서에 서명했습니다. 노예해방선언은 사그라지는 불의의 불꽃 속에서 고통 받아온 수백만 흑인노예들에겐 희망의 봉홧불 이었으며, 기나긴 속박의 밤을 걷어내는 찬란한 기쁨의 새벽이었습니다.그로부터 1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흑인들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1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흑인들은 차별의 족쇄를 찬 채 절름거리고 있습니다. 1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흑인들은 물질적 풍요의 바다에서 가난의 섬 안에 고립되어 살고 있습니다. 1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흑인들은 미국사회의 구석진 곳에서 고통당하며 망명객처럼 부자유스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오늘 우리는 치욕스런 상황을 극적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이곳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명목뿐인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서 수도 워싱턴에 모였습니다. 미국의 건국에 참여한 사람들이 서명한 헌법과 독립선언서의 화려한 문구들은 약속어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흑인,백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는 양도할 수 없는 ‘생명권,자유권,행복추구권’이 있다는 내용의 약속어음에 서명을 했습니다.미국은 흑인시민에 대해서 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은 흑인들에게 이 신성한 약속어음에 명시된 현금을 지급하지 않고 ‘예금잔고 부족’이라는 표시가 찍힌 부도수표를 되돌려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의라는 이름의 은행은 결코 파산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이 가지고 있는 기회라는 이름의 거대한 금고 속에 충분한 잔고가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어음이 명시하는 자유와 정의를 되돌려 받기 위해서 이곳에 모였습니다.우리는 미국에게 현재 사태가 긴급함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이 신성한 장소에 모였습니다. 지금은 호사스럽게 냉각기간을 가지거나 점진주의의 진통제를 먹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민주주의의 약속을 실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흑백차별의 어둡고 황폐한 계곡에서 벗어나서 인종적 정의의 양지 바른 길로 걸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미국을 위태로운 인종차별의 모래밭에서 건져내서 동포애라는 단단한 반석 위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주님의 어린양들을 위해 정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미국이 현재 사태의 긴급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주 치명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자유와 정의의 상쾌한 가을이 찾아올 때까지 흑인들의 정당한 불만이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여름은 결코 물러가지 앟을 것입니다. 1963년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미국이 사태의 긴급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평상시처럼 행동한다면, 흑인들이 분노를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기 바라는 사람들은 대단히 불쾌할 것입니다.흑인들의 시민권을 보장하지 않는 한 미국은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정의의 새벽이 밝아오는 그날까지 폭동의 소용돌이가 계속되어 미국의 토대를 뒤흔들 것입니다. 정의의 궁전에 이르는 문턱에 서 있는 여러분께 이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당한 자리를 되찾으려는 우리의 행동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님을 명심하도록 하십시요.자유에 대한 갈증을 증오와 원한으로 채우려고 하지 맙시다. 위엄 있고 규율 잡힌 태도로 투쟁해야 합니다. 우리는 창조적인 항의운동을 물리적 폭력으로 타락시켜서는 안 됩니다. 거듭해서 당부하지만, 우리는 물리적 힘에 대하여 영혼의 힘으로 대처하는 당당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흑인사회를 지배하는 새로운 투쟁성에 이끌려 백인들을 불신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가한 많은 백인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백인형제들 중에는 백인과 흑인이 운명공동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백인들은 자신들의 자유는 우리들의 자유와 단단히 얽혀 있음을 인식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혼자서는 걸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제나 앞장서서 행진해야 합니다. 결코 뒷걸음질 쳐서는 안 됩니다.헌신적인 시민권 활동가들에게 “당신들은 도대체 언제 만족할 거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흑인에 대한 경찰들의 야만적인 폭력이 없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여행으로 지친 우리의 몸을 여러 도시의 호텔과모텔에 누일 수 없는 한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흑인들이 작은 빈민가에서 큰 빈민가로 이주할 자유밖에 누릴 수 없는 한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백인전용’이라는 표지판 앞에서 우리 아이들의 자존심과 인간적 존엄성이 짓뭉개지는 한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여러분 중에는 큰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좁디좁은 감방에서 방금 나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자유를 달라고 외치면 갖은 박해를 당하고 경찰의 가혹한 폭력에 시달려야 하는 지역에서 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고 받는 고통은 반드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계속 활동합시다.미시시피로 돌아갈 때, 알라배마,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루이지애나로 돌아갈 때, 그리고 북부 여러 도시의 빈민가로 돌아갈 때, 언젠가는 이런 상황은 변화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돌아갑시다.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친애하는 여러분께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지금 비록 역경에 시달리고 있지만,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꿈은 아메리칸 드림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은 지독한 인종 차별주의자들과 주지사가 간섭이니 무효니 하는 말을 떠벌리고 있는 앨라배마 주에서, 흑인어린이들이 백인어린이들과 형제자매처럼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골짜기마다 돋우어지고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희망입니다. 저는 이런 희망을 가지고 남부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런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절망의 산을 토막 내어 희망의 이정표를 만들 수 있습니다.이런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나라 안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불협화음을 아름다운 형제애의 교향곡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런 희망이 있다면, 언젠가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함께 행동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투쟁하고 함께 감옥에 가고 함께 자유를 위해서 싸울 수 있습니다.내 꿈이 실현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나의 조국은 아름다운 자유의 땅, 나는 조국을 노래 부르네. 나의 선조들이 묻힌 땅,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선조들의 자부심이 깃들어 있는 땅, 모든 산허리에서 자유의 노래가 울리게 하라!” 주님의 모든 자녀들이 이 구절을 새로운 의미로 암송할 수 있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미국이 위대한 국가가 되려면 우리의 꿈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합니다.뉴햄프셔의 높은 산꼭대기에서 자유의 노래가 울리게 합시다.펜실베니아의 웅장한 앨러게이니 산맥에서 자유의 노래가 울리게 합시다.콜로라도의 눈 덮인 록키산맥에서 자유의 노래가 울리게 합시다.캘리포니아의 구불구불한 산비탈에서자유의 노래가 울리게 합시다.조지아의 스톤 산에서 자유의 노래가 울리게 합시다.




미시시피의 수많은 언덕들과 둔덕들에서 자유의 노래가 울리게 합시다.전국의 모든 산허리에서 자유의 노래가 울리게 합시다.이렇게 된다면, 모든 주, 모든 시, 모든 마을에서 자유의 노래가 울린다면, 흑인과 백인, 유태교도와 기독교도, 신교도와 구교도를 가리지 않고 모든 주님의 자녀들이 손에 손을 잡고 오래 된 흑인영가를 함께 부르게 될 그날을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마침내 자유를 얻었네, 마침내 자유를 얻었네. 전능하신 주님의 은혜로, 마침내 우리는 자유를 얻었네"이 연설은 미국 전역에 생중계 되었고 이 날, 놀랄 만큼 정숙한 태도로 연설에 귀 기울이면서도 몹시 고무된 정중들의 태도에 따라, 킹 목사는 전날까지 애써 준비해 두었던 연설문 대신, 그가 예전에 즐겨 하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이 연설을 하였다고 한다.




11월22일케네디 대통령 암살
1964년3월26일말콤 엑스 할렘에서 암살
7월2일 케네디가 최초로제안했던"모든인간은평등하다’는 <1964년 시민권 법령> 조인식에 참여 흑인들에게도 드디어 투표권이 부여되었지만, 그 투표권을 행사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선거인 등록을 하려면 어려운 읽기, 쓰기 능력 테스트를 통과하여야 했고, 등록 절차가 어렵고 더뎠다. 투표소를 짓는 일은 KKK단의 보복이 두려워 더더욱 힘들었다. 흑인들이 선거인으로 등록하여 투표를 하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었다.미시시피 주 ‘자유의 여름’ 운동을 개시하기 하루 전, 투표소 설치를 돕기 위해 미시시피로 향하던 두명의 백인과 한명의 흑인 시민운동가가 실종된 사건이 있었다.이 사건을 잘 보여주는 미시시피 버닝이란 영화를 봄으로써 흑인 시민 운동의 심각성과 흑백차별을 더 알 수 있었다.




12월10일노벨평화상 수상
1965년2월1일앨라배마주 셀머시 투표권 쟁취를 위한 시위 후 투옥
8월11일L.A. Watts지역 폭동 발생
1966년1월7일도시빈민 개혁 운동을 위해 시카고 론데일 빈민가로 이주.농업기반의 남부 흑인 문제만이 아닌, 도시 빈민 개혁 운동을 위해 시카고 빈민가로 찾아들었다.
1967년4월 4일뉴욕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베트남 반전 연설로 파문



그때의 연설문
지금 미국 청년들이 아시아의 정글에서 전투를 하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전쟁의 목적은 너무나 막연하기 때문에 전국의 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흔히들 이들의 희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이공 정권과 그의 동맹세력도 명색으로는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으며, 미국 흑인병사들은 민주주의를 누려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전쟁은 가난한 사람들의 아들과 형제와 남편들을 전장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가족이 베트남으로 파병되는 비율은 다른 계층에 비해서 대단히 높습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가 무력하게 만든 흑인청년들을 뽑아서 수천 마일 떨어진 동남아시아로 보내고는 그들에게 남서부 조지아 주나 동부 할렘 지역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자유를 수호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이전에는 같은 학교에서 함께 앉아 공부해본 적도 없는 흑인청년들과 백인청년들이 나라를 위해서 함께 목숨을 바치는 모습을 지켜보는 비참하고 역설적인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시카고에서는 같은 거리에서 함께 살아본 적도 없는 청년들이 야만적인 결속을 이루어 가난한 마을의 오두막들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이 야만적인 조종에 놀아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도저히 침묵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그가 처음 여론과 흑인들에게까지도 비난을 받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연한 자세로 전쟁의 반대를 외쳤다.



12월 4일빈민탈출운동을 시작

1968년3월28일폭력으로 중단된 시위행진을 주도하기 위해 멤피스로 떠남.

4월 3일 그곳의 메이슨 교회에서 최후의 연설이 되었던 설교를 했다.

"나는 가끔 모든 인간은 인생의 공통분모인 죽음이 닥쳐올 순간을 늘 의식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생각합니다. 나는 이따금 나의 죽음과 장례식에 대해서 생각하곤 합니다. 나는 죽음을 음울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따금 '내가 진정으로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하고 자문합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께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나는 그 날이 오면 마틴 루터 킹 2세는 자신의 인생을 남을 돕는 데 바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그 날이 오면 내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그 날이 오면 내가 전쟁문제에 대해서 올바른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그 날이 오면 내가 일생동안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그 날이 오면 내가 인류를 사랑하고 인류를 위해 봉사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나를 군악대장으로 부르고 싶다면 정의를 알리는 군악대장, 평화를 알리는 군악대장, 평등을 알리는 군악대장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나머지 사소한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내가 지나가는 길에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노래나 말로 누군가의 용기를 북돋을 수 있다면, 누군가에게 옳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해줄 수 있다면, 나의 삶은 헛되지 않은 것이 될 것입니다. 내가 기독교인의 의무를 다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다면, 나의 삶은 헛되지 않은 것이 될 것입니다.



4월 4일멤피스 로레인 호텔에서 암살

미 의회의 결정에 따라 1월 셋째주 월요일을 킹 목사의 탄생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지정하기로함.





보이콧 : 부당한 행위에 대항하기 위하여 정치 ·경제 ·사회 ·노동 분야에서 조직적 ·집단적으로 벌이는 거부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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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초란 이름을 처음 들으면 무시무시한 복수의 전설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복수초(福壽草)는 행복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꽃이다. 이 꽃의 한자가 뜻하듯이 인간의 행복은 부유하게 오래 사는 것인가 보다. 코스모스와 비슷하게 생긴 노란 꽃잎 때문에 '황금의 꽃'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으며, 부유함과 행복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다. 복수초라는 이름은 한자로 복 복(福)자에 목숨 수(壽)자, 즉 복을 많이 받고 오래 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른 봄에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뜨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들꽃이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모두 이 이름을 쓴다. 이른 봄 노랗게 피어나는 복수초를 보면 누구나 축복을 받는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속명: 눈색이꽃, 얼음새꽃, 원일초, 설연화, 측금잔화(생약명)

꽃말:영원한 사랑





이밖에 지방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 지는데 땅 위에 꽃만 불쑥 튀어 나온 것이 인성적이어서 땅꽃, 이른 봄 얼음 사이에서 피어나 얼음새꽃 또는 눈색이꽃, 한자로는 새해(구정)를 시작할 때 피는 꽃이라 하여 원단화라고도 한다. 눈 속에 피는 연꽃과 같다 하여 설연이란 이름도 있다.





복수초 전설1.



옛날 옛날, 하느님만이 이 세상에 살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하늘나라에 크노멘 공주라는 아름답고 젊은 여신이 살고 있었습니다. 물론 여신들은 모두 다 아름답웠지만 그 중에서도 크노멘공주는 특히 아름다웠습니다. 공주가 긴 드레스 자락을 하늘하늘 나부끼며 걸으면 태양은 황홀하여 더욱 밝게 빛을 내고 바람은 멍하니 멈추어 서서 공주를 바라 보았습니다. 윤기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만져 보려고 비는 서둘러서 내렸고, 달은 공주의 얼굴을 보려고 낮게 내려왔습니다.



"크노멘 공주를 누구에게 시집보내면 좋을까?"



공주가 나이가 들자 아버지인 하느님은 매일매일 고민했습니다. 하늘나라에는 젊은 남신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젊은 남신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리며 고민했습니다.



"꽃 신은 착하지만 믿음직스럽지 못해. 냇물 신은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툭하면 제멋대로 날뛰고, 원숭이 신은 똑똑하지만 버릇이 없어. 새 신은 날쌔지만 말이 많고,물고기 신은 부지런하지만 가난해. 산 신은 부자지만 터무늬없는 겁쟁이야.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한참 고민하고 생각한 끝에 하느님이 고른 것은 두더지 신이었습니다.



"두더지는 누구보다도 용감해. 정의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싸우고 아주 날렵하고 똑똑하지. 게다가 착하고 산 신보다 부자야. 땅도 많이 가지고 있지."



두더지 신은 세상에서 가장 많은 땅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땅으로, 땅에서 땅속까지가 거의 두더지 신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용감하고 똑똑하고 착하고 부자인 두더지에게는 딱 한가지 결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젊은 신들 중에서 가장 보기 흉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마음만 올바르고 아름다우면 겉모습은 문제될 게 없다고 판단하고 두더지 신을 크노멘 공주의 신랑으로 정했습니다. 먼 옛날 하늘나라에서는 아버지가 딸의 신랑을 정했던 것입니다.



"우리 크노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해 주게나."



하느님은 두더지를 찾아가서 부탁했습니다.



"너무 행복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두더지는 예의를 갖춰서 정중하게 말했지만 가슴 속은 불같이 타 올랐습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크노멘 공주와 결혼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크노멘 공주를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두더지는 진심어린 목소리로 말을 하면 약속의 증표인 보도(매우 귀중한 칼)를 내놓았습니다. 하느님도 보도를 꺼냈습니다. 두사람은 서로 약속의 증표인 칼을 교환하고 크노멘 공주와 두더지의 결혼을 맹세했습니다.



"너를 두더지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



하느님의 이야기를 듣고 크노멘 공주는 깜짝 놀랬습니다.



"뭐라구요? 왜 제가 하필이면 하늘나라에서 제일 못생긴 두더지와 결혼해야 되지요?"



크노멘 공주가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것은 못생긴 외모였습니다. 손발이 길쭉한 거미 신도, 우툴두툴한 두꺼비 신도, 꿈틀거리는 지렁이 신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두더지는 더 심해요. 눈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고, 코는 너무 크고, 키는 작달막하고게다가 팔자걸음이잖아요. 싫어요. 저는 절대로 두더지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화가 난 크노멘 공주를 하느님이 달랬습니다.



"네가 보고 있는 것은 외모 뿐이지 않느냐? 두더지의 마음도 한 번 생각해 보아라. 착하고 매우 똑똑하고 매우 용감하지 않느냐? 나쁜 곳이라곤 한 군데도 없다. 게다가 넓은땅도 가지고 있지 않느냐?"

"싫은 건 싫은 거에요"



크노멘 공주는 소리를 지르며 아버지의 궁전을 뛰쳐 나갔습니다. 공주가 싫어하는 것도 모르고 두더지는 매일같이 선물을 보냈습니다. 봄에는 두더지의 영토에서 가장 아름다운 벚꽃을, 여름에는 가장 북쪽 땅에서 잘라 온 얼음으로 만든 백조를, 가을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나무 열매를.... 크노멘 공주는 두더지의 마음이 담긴 선물을 화를 내며 망가뜨릴 뿐이었습니다. 초겨울에는 비단옷을 보냈습니다. 한 가닥 한 가닥 정성들여 실을 뽑아 옷을 짓고, 그 위헤 크노멘 공주의 모습을 수놓은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봐라."



아버지는 크노멘 공주 앞에 비단옷을 펼쳐 보였습니다. 옷 위에 수놓아진 공주의 모습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선명했습니다. 공주와 결혼할 수 있는 날을 꿈꾸며 두더지는 한 올 한 올에 정성을 다하여 며칠에 걸쳐 옷을 짰던 것입니다. 비단 옷 다음에는 금비녀를 보냈습니다. 조그맣고 빨간 돌로 크노멘 공주의 이름을 새긴 아름다운 비녀였습니다.



"너는 아직도 두더지의 마음을 모르느냐?"



아버지는 크노멘 공주를 꾸짖었습니다.



"나와 두더지는 하늘나라의 법에 따라 보도를 교환했다. 그러니 너는 두더지와 결혼식을 올려야만 한다."



하늘나라의 법에 따르면 약속을 어기는 사람은 죽여도 괜찮았습니다. 두더지는 화를 내며 크노멘 공주의 아버지를 죽여도 되는 입장인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성을 들여 선물을 보내고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억지로라도 너를 두더지에게 보내야겠다."



칼을 교환한지 300일이 지난 날, 하느님이 크노멘 공주에게 말했습니다.



"싫어요."



크노멘 공주는 딱 잘라 말하고 금비녀를 집어 던졌습니다. 비단옷을 쥐고는 엉망진창으로 찢어 버렸습니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 그런 짓은 용서할 수 없다."



크노멘 공주는 화가 나서 잡으려고 하는 아버지를 피해서 도망쳤습니다. 어둡고 추운 겨울 밤이었습니다. 북풍이 휘몰아치고 눈도 조금씩 내리고 있었습니다.

"저를 도와 주세요."

크노멘 공주는 곰에게 부탁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도와줄 수는 없지."

곰은 모르는 척 했습니다.



"나를 좀 숨겨 주세요."

푸른 나뭇가지를 늘어뜨리고 서있는 소나무에게 부탁했습니다.



"안 됩니다. 두더지의 마음을 몰라주는 당신을 좋아할 수 없습니다."

소나무는 딱 잘라 말했습니다.



"나를 어디 먼 곳으로 데리고 도망쳐 줘요. 두더지가 없는 곳으로 가 버리고 싶어요."

크노멘 공주는 북풍에게 부탁했습니다.

"두더지의 땅은 세상 끝까지 걸쳐 있습니다. 이 세상엔 두더지가 없는 곳은 없어요. 내 마음은 차갑지만 지금도 계속 두더지가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하고, 목숨을 걸고 소중히 하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북풍인 나도 그런 두더지의 마음을 아는데 나보다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는 당신이 왜 두더지의 마음을 모르지요?"

북풍은 차갑게 말했습니다.



"싫은 걸 어떻해요."

발을 구르는 크노멘 공주의 귀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제멋대로인 너를 더 이상 내 딸이라고 여기지 않겠다. 내가 내리는 벌을 받아라."



두더지의 마음을 알려고도 하지 않은 크노멘 공주는 아름다운 젊은 여신의 모습을 잃어 버리고, 금색의 조그만 꽃이 되어 버렸습니다. 쌓인 눈 속에서 태어난 꽃은 복수초라고 이름지었습니다. 그로부터 몇백 년, 몇천 년이 지난 지금도 복수초는 눈 속에서 핍니다. 흰 눈이 잔뜩 쌓인 아침 복수초 주위에 많은 발자국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꽃이 되어 버린 크노멘 공주를 지금도 그리워하는 두더지의 발자국입니다. 금색의 꽃이 숨어 버리지 않도록 두더지는 밤새도록 복수초 주위의 눈을 쓸고 있는 것입니다.





복수초의 전설2. <아이누 전설>



학명 중 속명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미소년의 이름과 똑같은 아도니스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름다운 꽃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복수초는 아무르 아도니스라 불리우며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꽃이며 동북아시아, 시베리아, 유럽 등 추운 곳에서 다른 여러 종류의 복수초들이 피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복수초만은 그 색이 붉은 빛이어서 구별이 가능하다. 꽃말은 동양에서는 '영원한 행복'이고 서양에서는 '슬픈 추억'이다. 아도니스란 복수초를 통털어서 부르는 말이다. 한국에서 자라는 복수초를 비롯하여 북반구 온대지방에 20종 안팎이 있으나, 보통 유럽 원산인 2∼3종을 말한다. 여름복수초(A. aestiva1is)는 한해살이풀이고 복수초와 비슷하지만 꽃이 5∼7월에 피며 빨간색이다. 한국의 복수초는 노란색 꽃이 핀다.


 

가을복수초(A. autumnalis)도 한해살이풀이며 짙은 붉은색 꽃이 핀다. 아도니스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미소년의 이름에서 비롯하였으며, 꽃의 빨간 빛깔을 이 소년의 피로 비유하는 전설이 있다. 시리아 왕 테이아스, 또는 사이프러스 왕 키니라스와 그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불륜의 씨라고 한다. 여신 페르세포네와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고 있었는데, 사냥을 하다가 멧돼지에 물려 죽었다. 이 멧돼지는 헤파이스토스, 또는 아프로디테의 연인 아레스신(神)이 질투하여 변신한 것이라고 한다. 미소년 아도니스가 죽으면서 흘린 피에서는 아도니스꽃이 피어났고, 여신 아프로디테의 눈물에서는 장미꽃이 피어났다고 전해진다.



아프로디테의 슬픔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명부(冥府)의 신들은 아도니스가 해마다 1년 중 1/3은 지상에서 아프로디테와 함께 또 1/3은 명부에서 페르세포네 여신과 함께 하고, 나머지 1/3은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지내도록 허락하였다고 한다. 또다른 전설에 의하면 아도니스가 아직 어렸을 때 아프로디테가 상자 속에 그를 감추어 페르세포네에게 맡겼는데, 나중에 페르세포네는 미소년에 반하여 돌려주려 하지 않자, 제우스는 아도니스에게 1년을 나누어 양쪽 여신 곁에서 반 년씩 살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아도니스는 원래 해마다 죽고 해마다 부활하는 식물신(植物神)으로, 바빌로니아의 곡물신 타무즈에 해당하는데, 그에 대한 숭배는 페니키아로부터 그리스와 그 밖의 지역으로 번져 헬레니즘 시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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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수가 비단같이 수려하다고 해서 錦山이라는 지명을 얻었다는 금산에는 옛부터 풍류인風流人들이 즐겨찾는 여덟가지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었으니 이를 곧 거금팔경居金八景이라 한다. 그러니까 거금팔경은 단양팔경丹陽八景이나 관동팔경關東八景처럼 금산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멋과 풍류와 삶의 여유를 찾는 안식처로 거금팔경을 바라보며 시상詩想을 다듬기도 하고 삶을 살찌우기도 했던 것이다.



거금팔경을 열거하면

제 1의 景이 송암모종(松庵暮鐘)으로 해저무는 황혼녘에 용두봉 너머로 은은히 울려오는 송광암의 종소리이다. 어쩌면 금산의 주민들은 모두가 이때쯤 송광암에서 울려오는 종소리를 들으며 띠끌 묻은 번뇌를 씻고 청정한 마음으로 불도의 자비를 마음깊이 새겼을 것이다.



제 2의 景은 망천춘우(網川春雨)다.

입춘이 지난 이른 봄날 지금의 대흥리 하천으로 물길이 넘쳐흐르고 안개처럼 내리는 보슬비 속에 아련히 비쳐오는 강뚝의 봄풍경 또한 詩흥을 돋우웠으리라



제 3의 景은 적대귀운(積臺歸雲)이다.

금산의 지붕이라고 할 수 있는 영산 적대봉에 띠를 두른 구름과 구름위로 불쑥 솟은 산사山娑는 우리 금산인들 가슴에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움과 운치를 안겨 주었으리라. 술기운에 거나해 오른 옛 한량들께서는 이런 정경을 보며 많은 싯귀들을 떠올리기도 했으려만 우리에게 전해온 것이 별로 없으니 안타깝다.



제 4의 景은 죽도관어(竹島觀漁)이다.(궁전弓前앞 대섬, 현 간척지)

맑고 고요한 대섬앞에 나와 한가로이 노니는 물고기를 보는 재미를 말한다.

얼마나 생활이 한가했으면 바닷가에 나와 헤엄치고 노는 물고기와 희롱하며 風流를 즐겼을까?중국의 이백이 그랬다던가... 한폭의 그림처럼 옛 우리조상들의 한가한 모습이 떠오른다.



제 5의 景은 연소추월(蓮沼秋月)이다.

달빛 교교한 가을밤에 연소바닷가에 나가 허공에 휘엉청 뜬 달과 바닷속 깊이 가라앉은 달그림자를 보는 것도 더 없는 멋이었을 것 같다. 李白의 싯귀에는 '달빛에 술을 마시다보니 나와 달과 그림자가 셋이 되었다.' 라는 글이 있는데 이역시 풍류가 아닌가.



제 6의 景은 석교낙안(石橋落雁)이다.

옛부터 철따라 날아드는 철새를 상서로운 새라고 보아왔다.지금처럼 달력이 없던 시절에는 철새가 날아든 것을 보고 절기를 알았고 사계절 절기도 철새가 몰고 온다고 보았던 것이다.그때문에 철새를 부귀 다복으로 상징한다.석교의 바닷가에 앉아 철을 몰고 날아와 한가로이 노니는 철새를 망연히 바라보는 것도 온갖 시름을 잊을 수 있는 멋이었으리라.



제 7의 景은 월포귀범(月浦歸帆) 으로 월포 갯가에 앉아 멀리 뭍에 나갔던 배가 돌아오는 것을 바라보는 정취를 말한다.육지를 가로막은 아득한 물길 너머로 하얀 돛을 펄럭이며 돌아온 배는 그냥 한 척의 배가 아니라 섬과 육지를 이어주는 반가운 소식이고 바닷가에 앉아 그런 정경을 바라 본다함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온갖 그리움이라던가 기다림을 은연중 암시한 말이니 옛 우리 조상들 가슴속에도 그런 그리움과 기다림 같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제 8의 景은 사봉낙조(斜峰落照)이다.

斜峰은 지금의 용두봉을 말한다. 용두봉 정상에 앉아 멀리 금당도나 장흥 천관산 넘어로 가라앚은 황혼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멋 또한 얼마나 고상한가 바다깊게 번져가는 낙조의 금빛 물길을 바라보고 앉아 있으려면 만가지 근심도 띠끌 같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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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도 뤼팡"의 실제 모델, 프랑소와 외젠 비도크(앙리 비도크)


19세기 프랑스의 실존인물인 비도크(1775∼1875)는 추리소설이란 장르의 탄생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사람이다. 평민으로 태어나 도둑, 강도, 인신매매, 밀매, 위조 등 온갖 범죄를 저지르던 그는 감옥을 안방처럼 들락거렸고, 탁월한 변장술로 50여 차례나 탈옥한 전설적인 `괴도'였다. 쫓기는 삶에 지친 그는 경찰의 끄나풀 노릇을 하다 1811년 `사설 경시청'을 창설한다. 그가 체험한 기이한 범죄들을 기록한 <회상록>(1829)은 이후 에드가 앨런 포, 코난 도일, 모리스 르블랑 등 많은 추리작가들에 영감의 원천을 제공했다.


빵집 아들로 태어난 비도크는 어려서부터 변장의 천재였는데, 도박과 결투에 의한 살인, 난봉꾼 행각을 벌이다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갔다. 거기서 우연히 굶주린 자식들을 위해 소량의 식료품을 훔쳤다가 6년형을 언도 받은 비참한 농부를 보고는 개과천선하게 된다. 그는 돌변하여 경찰에 협조하다가 나중에는 쉬레테라는 정보기관을 만들고 초대 기관장을 지냈다. 여기서 `형사이면서 동시에 범죄자'인 프랑스 추리소설의 큰 그림이 그려졌다. 모리스 르블랑은 그런 역사적 인물을 염두에 두면서 괴도 신사 뤼팽을 창조한 것이다.


세계 최초의 전문 탐정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프랑스와 외젠 비도크(1775∼1857). 정신 분석학자 프로이트, 희대의 엽색가 카사노바, 미국의 마술사 후디니, 미국 연상수사국(FBI) 국장 에드거 후버를 합쳐 놓은 사나이라는 평을 받는 쟁쟁한 인물이다. 그는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병사, 죄수, 탈옥수, 스파이, 여장남자, 파리지구 범죄 수사국〔쉬르테〕의 책임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인 탐정 사무소 대표가 그가 거쳐온 삶의 흔적들이다.


비도크는 군 생활을 마친 뒤 고향에 돌아와 상점을 차리고 평범한 삶을 꾸려나갔다. 그러나 정식 제대 명령을 못받았다는 이유로 도망병으로 간주되어 체포되었다. 또 형무소에서 위조지폐범 2명이 자신들의 죄를 비도크에게 뒤집어씌웠다. 그는 억울함에 못이겨 10여 년간 탈옥을 계속 시도했고, 경찰에 다시 체포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이 시기에 비도크는 도둑이나 사기꾼의 버릇과 습성을 환히 파악했다. 또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뛰어난 변장술을 익혔다. 비도크가 마지막으로 잡혔을 때 경찰서장은 그에게 타협안을 제시했다. 파리에 원정온 절도범을 잡는 데 협조하면 풀어 주겠다는 것. 비도크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절도범 일당은 일망타진되었다.


비도크는 옷가게를 열고 다시 새생활을 시작했다. 그러자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전과자 두 명이 나타나 그가 탈옥수임을 폭로하겠다고 위협했다. 당황한 비도크는 이들을 피하기 위해 차라리 형무소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했다. 그는 경찰서장에게 형무소 안에서 스파이 노릇을 하겠다고 제의하고, 1년 9개월간 옥살이를 자청했다. 이때 빼낸 정보로 범죄자 체포 건수는 급증했다. 경찰은 비도크의 공로를 인정해 그를 경찰 전속 탐정으로 임명했다. 비록 무보수였지만 체포권이 인정되었기 때문에 비도크는 마음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또 범인에게 붙여진 현상금은 짭짤한 수입원이었다. 한편 파리에 점차 온갖 범죄자가 몰려들자 기존 경찰만으로 이들을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1812년 비도크는 자신과 같이 개심한 전과자를 중심으로 범죄 수사국 쉬르테를 창설한다. 각종 사기도박꾼, 위조지폐범이 초창기 수사대 구성원이었다. 1820년에 수사관은 삼백여 명에 이르렀고, 파리의 범죄율은 40%나 줄어들었다.


“나 비도크야!”


비도크는 1827년까지 쉬르테의 책임자로 일하면서 2만여 명의 범죄자를 체포했는데, 그의 이름만 들어도 악한들이 벌벌 떨었다고 한다. 어느날 유럽에서 손꼽히는 흉악범이 술집에 나타났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경찰서장이 1천 명의 경찰을 동원하려 하자 비도크는 “8명이면 족하다.”고 얘기한다. 그는 부하들을 수갑이 가득 채워진 가방을 들게 하고 밖에 대기시킨다. 그리고 혼자 술집에 들어가 무대에 서서 호령을 내렸다.“음악을 멈춰라. 나 비도크야.”그러자 악당들이 재크 나이프와 권총을 떨어뜨리고 순순히 한 줄로 늘어서 바깥으로 차례대로 나갔다. 부하들이 한 일은 비도크가 지명한 사람들의 손에 부지런히 수갑을 채우는 것뿐이었다.


비도크는 범죄 수사에 과학을 도입한 최초의 인물로도 평가받는다. 그는 범죄 현장의 모든 증거품을 현미경으로 면밀히 조사했다. 또 지문이 범인을 확실하게 밝혀내는 수단이라는 점을 인식했다. 필적 분석 결과도 중요한 증거 자료로 채택했다. 그는 늘 “범죄에서 독창력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즉 첫 수법이 성공하면 반드시 되풀이하기 때문에 범죄 패턴을 잘 정리하면 범인을 반드시 잡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이를 위해 그는 범인의 진짜 이름, 가짜 이름, 범죄의 유형과 습성, 교우 관계와 같이 범죄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만들었다. 현재 경찰서에 비치되어 있는 범죄 전력 카드의 원조격인 셈이다. 비도크가 이끈 쉬르테는 훗날 영국의 경시청과 미국 연방수사국에서 모범적인 모델로 삼았다.


비도크가 탄생시킨 인물들

비도크의 일생이 워낙 파란만장했기 때문에 그는 많은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최초의 추리 소설로 알려진 애드거 앨런 포우의 『모르그 거리의 살인 사건』에 나오는 오귀스트 뒤팽 탐정, 그리고 애거서 크리스티가 곧잘 등장시키는 에르쿨르 포아로 탐정이 바로 그를 모델로 만든 인물들이다. 한편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터무니없이 억울한 취급을 받는 죄수 장 발장, 그리고 그를 추적하는 자베르 경위, 두 명 모두 탈옥수 시절의 비도크와 탐정으로서의 비도크를 모델로 삼았다.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 억울한 죄목을 뒤집어쓰고 무고하게 투옥되었다가 복수의 집념을 행동으로 옮긴 주인공 얘기 역시 비도크의 기구한 삶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비도크는 사설 탐정소 ‘정보 사무소’를 차렸다. (1894년) 그러자 그의 명성 탓에 단골이 금방 3천여 명에 이르렀다. 비도크는 한편으로 낭만을 잃지 않은 인물이었다. 82세에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젊은 아가씨들과 어울리는 일을 즐겼다. 그는 구수한 능변으로 인기를 끌었으며, 만나는 모든 아가씨에게 “그대만이 내 생애의 연인”이라며 유산을 남겨 준다고 속였다. 비도크의 사후 유산을 자기에게 주기로 약속했다는 비도크의 유서를 들고 온 젊은 여자가 11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산은 비도크의 유언대로 가정부에게 돌아갔다.


추리소설의 계보를 보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있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인물 '비독'이다. 그가 남긴 <회고록>은 '에드가 앨런 포우'의 '오귀스트 뒤뺑', '르블랑'의 '루팡', '에밀 가브리오'의 '르코크'의 인물을 만드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었으며 특히 '루팡'은 '비독'과 가장 흡사한 설정을 가지고 있다.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프랑스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던 인물 '비독'(1775-1875)은 서민으로 태어나 위조범, 도둑, 노상강도, 인신매매, 밀매등 각종 범죄를 일으키고 다녔던 괴도였다. 그는 숱하게 투옥되었고 50-60번에 이르는 엄청난 탈옥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건 그가 변장술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신이 내린 천부적인 능력을 가진 그는 그 어떤 사람으로도 변장할 수 있었으며 말투나 행동등 모든 것이 완벽해 누구도 속일수 있었다. 그의 이런 능력은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탐정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


오랜 수배 생활에 지친 그는 살아남기위해 경찰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택하였고 그의 변장술은 정탐과 잠복근무에 꼭 필요한 요소로 적절히 활용되었다. 범죄 현장의 은어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에게 정탐 업무는 매우 유리했으며 그가 범죄에 사용했던 악랄한 수법들은 검거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결국 그는 엄청난 성과를 얻을수 있었고 1811년 그는 최초의 경시청을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가 직접 저서한 <회고록>은 오싹한 사례들로 가득차 있었고 추리소설 작가들은 그의 <회고록>에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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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기는 습도가 낮을 때 잘 발생한다

사람이 느끼는 정전기 쇼크는 사람의 몸 속에 있던 정전기가 다른 물체로 빠져나가는 일종의 방전 현상이다. 정전기는 습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습도가 낮을수록 자주 발생한다. 습도가 높을 때는 정전기가 공기 중으로 쉽게 빠져나가지만 습도가 낮은 때는 공기 중에 흡수되지 못하고 모여있다 한꺼번에 방전되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정전기의 전압은 수천∼수만 볼트. 하지만 전류가 거의 없어 인체에는 무해하다. 다만 몸이 허약하거나 과로한 사람의 경우에는 정전기 쇼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또 의학계에서는 정전기가 피부의 가려움증을 심화시키고 혈액 중의 산이나 알칼리의 농도를 높여 당뇨병, 심장병 환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상황별 정전기 예방법

●피부 정전기
인체에 정전기가 생기지 않도록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정전기가 몸에 쌓이지 않도록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피부가 건조하지 않도록 해줘야 한다. 유난히 피부가 건조한 사람들은 보습제 등을 온몸에 충분히 발라준다. 신체 중 가장 정전기를 많이 느끼는 부위는 손. 건조하지 않도록 손을 자주 씻어 물기가 남아있도록 하고 핸드 크림이나 바셀린 로션 등을 발라 항상 촉촉함을 유지하도록 한다. 또 물체를 잡을 때는 손톱 끝으로 두세번 톡톡 두드려 정전기를 방전시킨 다음 잡는다.



●모발 정전기
겨울철에 매일 머리를 감으면 건조 증상이 심해져 역효과를 초래하므로, 1주일에 3∼4회가 적당하다. 샴푸는 머리에 직접 떨어뜨리지 말고 손바닥에 적당량을 덜어 부드럽게 비벼준다. 손톱으로 두피를 긁거나 빗질을 하는 것은 금물. 샴푸 후에는 미지근한 물로 여러 번 헹구고 마지막에 찬물로 헹궈야 보습효과도 있고 모근이 튼튼해진다. 머리카락 엉킴을 방지하는 린스는 정전기 예방에 필수. 머리는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톡톡 털어 말리도록 하며, 부득이하게 드라이어를 사용할 경우는 드라이기와 머리카락 사이에 20cm 정도 간격을 둔다. 또 모발보호 효과가 있는 스타일링제를 바른 후에 드라이를 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다.



●의류 정전기
화학섬유로 만들어진 의류는 정전기 발생이 심한 편이다. 의류의 정전기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세탁 후 섬유 린스로 헹구거나 정전기 방지용 스프레이를 뿌린다. 또 옷을 걸 때 코트와 털스웨터 사이에 신문지를 넓게 펴서 끼우거나 둘 사이에 순면 소재의 옷을 걸면 효과적. 특별히 정전기가 심한 옷은 목욕탕에 걸어두었다가 입으면 적당히 습기가 차 정전기를 막을 수 있다. 모직이나 실크류보다는 면으로 된 옷이 정전기가 적게 발생한다. 식초 몇 방울을 떨어뜨려 헹구면 스타킹에 자주 발생하는 정전기를 줄일 수 있다.



●차량 정전기
차문을 여닫을 때 끝이 뾰족한 기구로 차 손잡이나 열쇠 등의 금속부위를 톡톡 2∼3차례 두들기면 뾰족한 부분에 모인 정전기가 다른 쪽으로 쉽게 이동해 정전기쇼크를 막을 수 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만지기만 하면 방전시켜 주는 정전기 방지 열쇠고리도 있다.



●실내 정전기
물을 끓이거나 어항, 가습기를 사용하여 습도를 높여주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다. 창문을 약간 열어두어 실내 공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면 실내 환기는 물론 정전기 방지에도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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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생애

정보의바다 2008. 2. 14. 09:34
김구(金九) 1876(고종13)~1949. 독립운동가, 정치가, 본관은 안동,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 (昌洙) 개명하여 구(九 龜),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두래(斗來)로 고쳤다.자는 연상(蓮 上), 초호는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순영(淳永) 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인조 때 삼정승을 지낸 방조(傍祖) 김자점(金自點)이 권세다툼에서 청병(淸兵)을 끌어들였다는 역모죄로 효종의 친국을 받고 1651년사형당하자, 화를 피하여 선조되는 사람이 그곳으로 옮겨갔다.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아버지의 열성으로 집안에 서당을 세우기도 하였다. 14세때에 「통감」,「사략」과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15세때에 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 한학을 배웠다.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93년(고종30)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 2대 교주 최시형 (崔時亨)과도 만났다. 19세에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에 임명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에서 동학혁명(東學 革命)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신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 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다. 또한 해서지방의 선비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솟구치는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여 1895년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부의병부대에 몸담아 일본군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듬해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하고,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는다 하고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에서 왜병중위 쓰치다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 하였다. 그해 5월 집에서 은신 중 체포되어 채주감 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이듬해 1897년에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집행 직전 고종황제의 특사령으로 집행이 중지되고 감형되었으나, 석방이 되지 않아 복역 중 1898년(광무2)탈옥 삼남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麻谷寺)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 1899년 서울 새절을 거쳐서 평양 근교의 대보산(大寶山) 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만에 환속(還俗)하였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도 계몽 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 1903년(광무7) 기독교에 입교하여 전 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 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 基)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泣訴)하는 한편, 종로 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 (楊山學校)를 세웠다. 1909년 양산학교 교사로 있으 면서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 고취에 열성을 다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保强學交) 교 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결사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좌되어 해주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뒤 1911년 1월 데라우치 총 독 암살모의 혐의로(105인 사건) 안명근사건(安明根事件)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 형을 선고 받 았다. 1914년 7월 감형(減刑)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자유의 몸이 되자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 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 장, 1924년 국무총리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 부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8년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고 1929년 재중국거류민단 단장도 겸임하고,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는 등 항일무력활동을 지휘하였다.이에 중국군 김홍일(金弘壹) 및 상해병공창 송식마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8 이봉창(李奉昌)의거와 4.29 윤봉길(尹奉吉)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의 상해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이에 김구는 60만원의 현상이 붙은 채 일본의 감시망을 뚫고 상해를 탈출 가흥(嘉興)으로 갔다.



1933년 남경(南京)에서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 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를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대일 전투의 방책을 협의하였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35년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조 직 했으며, 1939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가 중경(重京)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 (李範奭)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 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1942년 7월 임시정부 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임시정부 주석(主席)에 재선임 되고, 부주석에 김규식(金奎植), 국무위원에 이시영 박찬역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 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 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광복군 낙하산 부대)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 광복을 맞이하 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함께 제 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해 12월 28일 모스 크바3상회의(三相會議)에서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 주독립의 통일정부수립을 목표로 광복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 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白貞 基)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손수 봉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 중앙폅의회 부의장, 민주의원(民主議院) 부의장, 민족통일 총본부 부총재 등을 지내며 이승만(李 承晩),김 규식 등과 함께 했고, 극우파(極右派)로서 활약 했다.1947년 11월 국제연합의 감시 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나의 소원애서 밝히기를 "완전자 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1948년 초에 북한이 국제연 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 정부 수립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해 2월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 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제헌 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해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金枓奉)등이 남북협상 4자 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수립의 시련을 맛보고 그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여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 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자택 경교장 (京僑蔣)에서 육군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7월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 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으며, 4월 의거 뒤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 졌다.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를 남겼다.




"처음에 내 생명을 묻던 놈이 밤이 새도록 쉬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그 놈들이 어떻게 제 나라의 일에 충성된것인가를 알았다.

저 놈은 이미 먹은 나라를 삭히려기에 밤을 새거늘,

나 는 제 나 라를 찾으려는 일로 몇번이나 밤을 새웠던고 하고,

스스로 돌아보니 부끄러움을 금 할수가 없고

나도 기실 망국민의 근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니 눈물이 눈에 넘쳤다.

{백범 일지}



백범 김구(1876-1949)는 27년간 대한민국 입시정부를 이끌어 온 민족독립운동가요 해방된 조국을 민족.통일.민주.문화의 바탕위에서 굳건히 세우려고 애쓰다가 비명에 가신 근대 한민 족의 큰 스승이시다. 백범의 가계는 안동 김씨로서 신라 경순왕과 고려 김방경의 후예이며, 파(派)의 시조 익원 공 김사형의 21세손에 해당된다. 그의 선대는 조선조에도 계속 서울에서 벼슬하다가 방조(傍祖) 김자점의 역모사건으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게 되자 그의 선조가 경기도 고양을 거쳐 해주 서쪽 80리지점의 백운방이란 곳에 자리잡았다. 백범의 선조들은 낙향후에 양 반의 문화 생활을 멀리하고 짐짓 상놈의 행세를 하려고 역군토와 군역전까지 경작하였다. 이 같은 형편에서 이웃마을의 진주 강씨와 덕수 이씨로부터 멸시를 받아도 제대로 항변조차 하지 못했다. 초기 백범의 사상 가운데에 양반에 대한 분노와 가문을 일으키고자 하는 집념이 강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가문의 형편이 이랬던 만큼 선대에는 불평객이 많았다.



백범의 아버지 순영(淳永)은 4형제 중 둘째로 의협심과 정의간이 넘치고 양반에 대한 저항심이 강한 분이었다. 그는 약한자를 돕고 자 주 대변하였으나 그런 일로 양반들의 미움을 샀다. 그가 도존위(면에서 세금을 거두 는 자리)의 직책을 수행할 때에는 양반들에게는 가혹하게 공전(公錢)을 거두고 가난한 자들 에게는 자기가 대신 물어낼지언정 더 거두지는 않았다. 그 결과 3년이 못되어 공금에 축을 내고 사임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현풍 곽씨(이름, 낙원)로 14세의 나이에 열살위인 신랑을 맞아, 17세 난산 끝에 백범 을 낳았다. 부모는 백범의 교육을 위해 자기 집에다 서당 선생을 모시기도 하고, 부친의 병환으로 학자금이 부족할때에는 이웃마을의 서당 훈장에게 간청, 무료로 교육시키 기도 하였다. 특히 모친 은 백범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친 분이다. 백범이 옥에 갇혔을 때 옥 바라지를 맡아 위로와 용기 를 주었을 뿐아니라, '안악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에는 "경기감 사를 하는 것보다 더 자랑스럽다."고 말함으로써 백범에게 큰 격려를 주었다.



일찍 죽은 며 느리를 대신하여 손자 인(仁)과 신(信)을 양육한 자정이며, 백범이 독립운동을 하는데에 지 장되지 않도록 두 손자를 이끌고 귀국하며 어려움을 극복하는 인내며, 왜경을 따돌려 버린 여성답지 않는 특유의 대담성과 지모(智謀)며, 백범이 일지(逸志)를 쓸때 그 자세한 연월과 일시를 일일이 자문할 정도로 만년에까지 간직한 총기등은 임정 주석 백범의 품격을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백범은 1892년 과거에 낙방하는 것을 계기로 인생의 활로를 새롭게 모색한다.그는 한때 풍수지리와 관상을 공부하였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l9세기 말의 민족적 수난을 감지하면서 동학에 입문한 백범은 최시형으로부터 황해도 팔봉접주로 임명받아 해주성 공격 에 앞장섰으나 청군의 철수로 실패하였고, 황해도 동학군의 자중지란으로 세력을 잃게 되자 안중근의 부친 태훈의 호의를 받아들여 부모를 모시고 청계동으로 들어가 잠시 우거하였다. 그는 거기서 일생동안 자신에게 사상적 영향을 끼친 척사위정(斥邪衛正)계의 유학자 고능선 을 만나 그의 섬세한 가르침을 받았다. 백범은 청계동을 찾아온 김형진을 만나 의기투합, 조국순례에 나선다. 그들은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을 돌아 서간도 땅에 이르러 국경지역 주변에 거주하는 동족들의 어려움을 목도한다. 강계 부근에서는 김이언 부대를 따라 '국모'의 원수를 갚는 의병운동에 참여했으나 실패하였다. 청계동으로 돌아온 백범은 그가 없는 동안에 고능선의 요청으로 그의 손녀와 약혼이 이루어진 것을 알고 기뻐하였으나 김치경의 방해로 성혼되지 못했다.



백범은 다시 '방랑의 길' 에 올랐다. 이때 국내에서는 명성황후가 '왜놈' 들에게 시해당한 데다가 단발령 시행으로 백성들의 분기가 탱천하여 이곳저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방랑길' 에 오른 백범은 대동강 하류인 치하포 주 막에서 만난 일본인을, 그가 명성황후를 죽인 미우라(三浦誤樓) 공사이거나 그 일당의 하나일 것이라고 단정하고 살해하였다. 그 일본인은 '육군중위' 쓰치다(土田讓亮)였다. 이 일로 그는 해주 감영을 거쳐 인천감옥에 수감되었다. 백범은 재판을 받으면서그의 거사가 국모의 원 수를 갚기 위한 것임을 천명하여 관리들과 수감자들은 물론 인천시민들에게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백범은 일본의 압력으로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국왕의 재가로사형집행은 면했다. 감옥 밖의 구출운동이 한계에 이른 것을 안 백범은 탈옥의 비상수단을 감행하였다. 탈옥에 성공한 백범은 삼남 지방을 주유하다가 공주 마곡사에 이르러 승려가 되어 원종(원 종)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탈옥에 따른 위험을 감추기 위해서는 승려로 신분을 위장하는것 이 좋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범은 평안도의 영천사 방주(방주)를 끝으로 일년여 동안의 승려생활을 청산하고 환속, 귀가하였다. 그에게는 민족을 위한 새로운 구상이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즉 그가 감옥에서 {태서신사}와 {세계지지} 등을 통해 깨달은 신지식에 의하면,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취했던 폭력의 방식이 아니라 민지를 깨우쳐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를 애국계몽운동에 나서게 하였다. l902년 부친상을 당한 백범은 그 이듬해 해상과 함께 예수교에 입교함과 동시에 구국교육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예수교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예수교가 애국계몽운동에 가장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와 잡학(雜學)에서 시작, 동학, 유학, 불교를 거쳐 예수교에 정착하는 사상적인 방랑을 경험하였다. 백범은 장연의 광진학교와 봉양 학교, 문화의 서명의숙, 안악의 양산학교와 안신학교, 재령의 보강학교 등에서 가르치는 한 편 사범강습회를 열어 교사를 양성, 훈련하였고 '해서교육총회' 를 조직, 학무총감으로 활동 하였으며, 환등기를 가지고 황해도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왜놈' 원수들을 갚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잠시 진남포 감리교회의 의법 청년회 총무의 일을 맡아 서울에 올라와 상동교회파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을사조약반대 상소운동에 앞장 섰고, 1907년에는 안창호 . 전덕기 . 이승훈 등과 함케 비밀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장기적인 독립운동에 대비하였다. 백범은 고능선의 손녀와 혼약이 깨어진 후에 결혼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부친의 거상 중에 여옥을 만나 해상 후에 결혼하기로 했으나 여옥의 죽음으로 불가하였고, 평양 사범강습 중(1904)에 최광옥의 소개로 안창호의 동생 신호를 만나 약혼 단계에 이르렀으나 신호 측의 사정으로 결혼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해 말에 최준례를 만나 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혼하고 최준례를서울의 정신학교에 유학시킨 후 곧 결혼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은 일제는 한국강점을 서둘렀다. 한국인의 저항은 여러 형태로 일어났다. l909년 10월에는 안중근의 의거가, 12월에는 이재명의 의거가 있었다. 백범은 안중근의 의거로 잠시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으나 무혐의로 곧 출감하였다. 그러나 그 이 듬해 연말 '안악사건(일명 안명근 사건)' 에 연루되어 15년 징역을 언도받았고 수감중에 터진 '105인사건'에 걸려 또 2년을 추가받아 17년의 징역에 처하게 되었다. 처음 서대문 감옥 에서 옥고를 치루다가 1914년에는 17년전 치하포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던 인천감옥으로 이감되어 항만 축조공사 등에 강제 노역당했다.
그는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이름 김구(金龜)를 김구(金九)로 바꾸고 호 연하(蓮下)를 백범(白凡)으로 바꾸었다. 이름을 바꾼 것은 일제의 호적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이고, 호를 바꾼 것은 "우리나라의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지금의 나의 정도는 되고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소원을 가지자"는 뜻에서였다. 1914년 인천감옥에서 가석방된 백범은 안악으로 돌아왔다.



출옥은 하였지만 아직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부인이 교원으로 있던 안신학교의 일을 돕다가 신천 동산평의 농감이 되어 농 장 내의 소작인들에게 근검절약 .상부상조의 질서를 가르치는 한편, 학교를 세워 자녀교육에 힘쓰도록 하였다.
술과 노름으로 일삼던 그 농장은 백범의 노력으로 희망의 새 동산으로 변 화되어 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백범은 자유롭게 뛰어들지 못하는 자신 의 가석방신세를 생각하면서 민족독립을 위한 새로운 결단을 내린다. 망명이었다. 3윌 3일 사리 원에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넌 백범은, 1945년 11월 23일 그의 나이 70세에 환 국하기까지, 27년간 근대사에서 가장 긴 시간을 버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붙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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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사전

정보의바다 2008. 2. 14. 09:34
다말라사우루스(Damalasaurus)

1억4,000만년 전
쥐라기에 살았던 거대한 초식 공룡이다. 기다란 목과 경사진 등 때문에 거대한 기린처럼 생겼다. 등이 경사진 이유는 앞다리가 뒷다리보다 더 길기 때문이다. 덕분에 높은 나무에 쉽게 닿을 수 있어 잎사귀를 먹기 좋다. 화석이 발견된 중국의 한 지역 이름을 따서 1986년 ‘다말라도마뱀’ 이라고 부른다.




다스플레토사우루스(Daspletosaurus)


7,500만년 전
거대한 육식 공룡으로, 자동차 두 대를 합한 길이보다 길다. 머리가 육중하고, 큰 동물을 잡아먹기에 알맞은 단검 같은 이빨이 죽 나 있다. 튼튼한 뒷다리만으로 움직이고, 앞다리는 볼품없이 작고 약하다. 1921년 캐나다 앨버타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이 공룡의 이름은 ‘소름 끼치는 도마뱀’ 이라는 뜻이다.




다켄트루루스(Dacentrurus)


1억5,000만년전
‘뾰족한 꼬리’라는 뜻으로, 1870년대 영국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큰 골판이 등에서 꼬리까지 두 줄로 나 있다. 몸 길이는 4m가 넘으며 머리는 작다. 뇌의 크기는 개의 뇌와 비슷하다. 정확한 몸 길이는 알지 못하지만, 폭이 1.5m인 엉덩이뼈로 미루어 몸 둘레를 짐작할 수 있다. 네 발로 걷고 식물을 먹는다. 1870년대 이후로 화석이 프랑스와 포르투갈에서 더 많이 발견되고 있다.




다토우사우루스(Datousaurus)


1억 6,000만년 전
중국의 남부 지방에서 발견되어 그 지방의 이름을 따서 ‘다토우 도마뱀’이라고 한다. 초식 공룡으로, 이빨이 숟가락처럼 생겼고 머리뼈가 튼튼하다. 목과 꼬리가 길고 네 발로 걸었다.




데이노니쿠스(Deinonychus)


1억 1,500백만년 전
데이노니쿠스는 가볍지만 강한 공룡이다. 다리가 길고 날씬하여 시속 40km까지 달릴 수 있었다. 소형 자동차만한 크기이며, 뒷다리로 달렸다. 육식 공룡의 공격으로부터 재빨리 몸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먹이를 사냥하는 데도 빨랐다. 근육질의 꼬리가 방향키 구실을 하여 자갈 투성이의 길을 마음대로 갈 수 있었다. 데이노니쿠스는 둘째 발가락에 크고 구부러진 발톱이 달여 있어, 마치 낫으로 자르듯 먹이를 잘라냈다. 데이노니쿠스라는 이름도 ‘무시무시한 발톱’이라는 뜻이다. 이 날쌘 공룡은 무리를 지어 사냥을 다녔는데, 백악기 초기 북 아메리카에서 살았다




데이노케이루스(Deinocheiurs)


7,000만년 전
1965년 몽고의 고비 사막에서 거대한 공룡의 앞다리 두 개가 발견되었다. 몸 길이는 2.5m(보통 사람의 키보다 훨씬 크다)이고, 25cm나 되는 발톱이 나 있다. 생김새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몇몇 학자들은 이 공룡이 코끼리 2마리만큼 무겁다고 생각한다. 이 공룡의 이름은 ‘무시무시한 앞다리’라는 뜻이다.




덴버사우루스(Denversaurus)


8,000만년 전
덴버사우루스라는 이름은 1988년 미국 사우스다코타 지방에서 으깨진 뼈들이 발견되면서 붙여졌다. 백악기 후기에 키 작은 식물을 먹었고, 네 발로 걸어다녔다. 육식 공룡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바닥에 웅크려 연약한 아랫배를 보호하였을 것이다. 몸 길이가 4-5m정도로, ‘덴버 도마뱀’이라는 뜻이다.




디노도쿠스(Dinodocus)


1억 2,5000만년 전
영국 남부 지방에 살았던 거대한 초식 동물이다. 네 발로 걸었고, 모양은 거대한 기린과 비슷했다. 그밖에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몸 길이는 기차 한 량 만한 것 같다. ‘무시무시한 들보’라는 뜻이다.




디크레오사우루스(Dicraeosaurus)


1억 4,500만년 전
거대한 초식 공룡이다. 기다란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러 육식 공룡의 공격을 막았을 것이다. 디크레오사우루스라는 이름은 ‘갈래진 파충류’라는 뜻으로 등뼈가 Y자 모양이다. 쥐라기 후기에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살았다. 이층 버스 길이만하고, 코뿔소보다 4배가 더 무거웠다.




딜로포사우루스(Dilophosaurus)


1억 9,000만년 전
쥐라기에 미국에서 살았던 육식 공룡이다. 머리뼈 위에 두 개의 가느다란 볏이 나 있다. 어금니가 날카롭고, 몸 길이는 코끼리만하다. 다른 공룡이 죽인 동물을 먹고 살았던 것 같다.




바가케라톱스(Bagaceratops)


7,500만년 전
‘작은 뿔 달린 얼굴’이란 뜻이다. 몸 길이는 약 1m. 입의 앞쪽에는 이빨이 없는 대신 단단한 주둥이가 있다.




바라파사우루스(Barapasaurus)
1억년 전
바라파사우루스는 몸 길이가 18m에 이르는 커다란 사우로포드이다. 인도의 몇몇 들판에 이 공룡 뼈가 흩어져 있었다. 그 뼈를 모아서 박물관에 가져간 트럭 운전수는 그 뼈를 큰 다리라고 말했다. 그래서 ‘큰 다리 파충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바로사우루스(Barosaurus)


1억 5,000만년 전
1890면 유명한 미국의 고생물학자 O.C.마쉬 교수가 붙인 것이다. 바로사우루스는 ‘무거운 파충류’라는 뜻으로 자그마치 몸무게가 코끼리의 두 배인 10톤에 이른다. 이 거대한 사우로포드는 디플로도쿠스와 비슷하며 미국과 동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발견되었다. 몸 길이가 27m이며 마치 기린처럼 기다란 목으로 나무 꼭대기의 이파리를 먹는다. 이렇게 지나치게 긴 목에 피를 계속해서 보내려면 심장이 8개나 있었을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바르스볼디아(Barsboldia)


7,000만년 전
큰 오리 부리 공룡처럼 생겼으며 코리토사우루스와 비슷하다. 1982년 몽고에서 이 공룡을 발견한 린헨바르스볼트 교수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바리오닉스(Baryonyx)


1억 3,000만년 전
최근에 발견된 공룡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끄는 바리오닉스는 1983년 영국의 아마추어 화석 사냥꾼이 발견했다. 길이는 9m정도이며, 이름은 ‘무거운 발톱’이라는 뜻이다. 발톱이 거대하고 날카로우며 길이가 30cm이다.




블리카나사우루스(Blikanasaurus)


2억 2,000만년 전
남 아프리카 공화국의 희망봉에 있는 블리카나 산에서 발견되어 블리카나사우루스라 이름 지었다. 길이가 약 3m정도이며 트라이아스기에 살았다.




바하리아사우루스(Bahariasaurus)


1억년 전
북 아프리카 이집트와 서 아프리카의 니제르에서 발견되었다. ‘바하리야 도마뱀’이라는 뜻으로 처음 발견된 이집트의 지역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몸 길이는 약 8m이고 티라노사우루스와 알로사우루스의 친척이었다.




박트로사우루스(Bactrosaurus)


1억년 전
몽고 지역인 ‘박트리아에서 나온 파충류’라는 뜻으로 오리 부리 공룡이다. 몸 길이가 6m에 이르는 초식 공룡으로 턱 안에 식물을 자르고 씹어 먹을 수 있는 이빨이 나 있다.




보트리오스폰딜루스(Bothriospondylus)


1억 8,000만년 전
이름은 ‘발굴한 등뼈’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아주 적은 수의 뼈(대부분이 등뼈였다)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와 유럽에서 발견되었고, 몸 길이는 20m정도 되는 것 같다. 브라키오사우루스의 친척이며 더 작은 사우로포드이다.



브라키오사우루스(Brachiosaurus)

1억 5,000만년 전
이 거대한 사우로포드는 지금까지 발견되 공룡 가운데 가장 키가 크다. 목이 매우 길며, 키는 12m까지 자란다. 무게는 20톤 정도이며, 하루에 1,500kg의 먹이를 먹이 치운다. 보통 나무 꼭대기의 잎을 따 먹었고, 먹이를 찾아 새로운 곳으로 무리져 이동했다. 이름은 ‘앞발 도마뱀’이라는 뜻으로 앞다리가 뒷다리보다 더 길다.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와 알제리, 북아프리카에서 화석이 발굴됐다.




브라키케라톱스(Brachyceratops)


8,000만년 전
작은 케라토피안(뿔 달린 공룡)이다. 몸 길이는 약 1.8m이며 이름은 ‘짧은 뿔 달린 얼굴’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또다른 공룡인 모노코니우스와 비슷하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북아메리카에서 발견됐다.




브라킬로포사우루스(Brachylophosarus)


7,500만년 전
오리 부리 공룡인 부라킬로포사우루스의 최초 화석은 머리뼈와 골격의 앞부분이었다. 1936년 캐나다 앨버타에서 발견되었다. 길이가 약 7m이다. 머리에 돋친 작은 가시가 뒤로 향해 있고 뼈로 만들어진 짧은 볏이 있다. 이름은 ‘짧은 볏이 달린 도마뱀’이라는 뜻이다.




브론토사우루스(Brontosaurus)

1억 5,000만년 전
오스닐 마쉬와 에드워드 코프는 1870년대의 뼈 전쟁동안, 거대한 공룡 뼈를 발견하여 브론토사우루스라 불렀다. 브론토사우루스의 몸 길이는 입에서 꼬리까지 20m이다. 버스 두 대를 연결한 길이다. 아마 매일 반 톤이나 되는 식물을 먹어야 했을 것이다. 그 전에 마쉬는 아파토사우루스라고 부른 또다른 거대한 공룡 뼈를 발견했다. 하지만 뒤에 아파토사우루스와 브론토사우루스는 같은 공룡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아파토사우루스가 더 알맞은 이름이라고 결정했다. 이제 브론토사우루스라는 이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젠도사우루스(Azendohsaurus)


2억 3,000만년 전
북 아프리카 모로코의 아젠도 마을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마을 이름을 따서 아젠도사우루스라 부른다. 몸 길이가 1.8m이며 트라이아스기 말에 살았다. 몸이 가벼웠으며 꼬리와 뒷다리가 길었다.




아벨리사우루스(Abelisaurus)


8,000만년 전
아벨리사우루스이 머리뼈가 최근 아르헨티나에서 발견되었다. 다른 부위의 뼈가 아직 발견되지 않아 전문가도 크기나 모습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 고기를 먹었고 턱이 강력하며 이는 칼처럼 생겼다.




아칸토폴리스(Acanthopholis)


9,5000만년 전
티라노사우루스 같은 무서운 적을 막을 수 있는 단단한 갑옷 모양의 피부로 덮혀 있다. 자동차만한 크기로 4m까지 자란다. 초식공룡인 아칸토폴리스의 화석은 아주 드물어 영국의 포크스톤과 캠브리지에서 조금 발견되었다.




알베르토사우루스(Albertosaurus)


7,500만년 전
‘앨버타에서 나온 파충류’란 뜻이다. 1884년 처음 뼈가 발견된 캐나다의 앨버타 지역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길이가 약 9m로 이층버스만하다. 거대한 육식공룡으로 티라노사우루스보다 이가 더 많다. 일단 알베르토사우루스가 먹이를 잡으면 뼈를 으깨어버릴 정도로 물어서 죽였을 것이다.




알렉트로사우루스(Alectrosaurus)


8,000만년 전
골격 화석이 한 마리씩 발견되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은 파충류’라는 이름을 얻었다. 아시아의 몽고 지방에서 살았고 육식 공룡이다. 티렉스와 같은 종류로 크기는 훨씬 작다.




알리오라무스(Alioramus)


7000만년 전
알렉트로사우루스와 비슷하며 티렉스와 같은 종이다. 길이가 6m이고 머리가 낮고 평평하다.




알로사우루스(Allosaurus)


1억 5,000만년 전
‘이상한 파충류’란 뜻이다. 1869년 미국 콜로라도에서 처음 발견된 알로사우루스는 길이가 12m로 테니스 코트만한 크기였다. 무서운 육식공룡으로 손과 발에 튼튼한 발톱이 3개씩 달려 있어 먹이를 꽉 붙잡았다.




알티스피낙스(Altispinax)


1억 3,000만년 전
등에 멋진 가시 모양의 돌기가 달려 있어 ‘높은 가시’라고 불린다. 이 돌기는 배의 돛처럼 생겼는데 경쟁자들에게 무수무시하게 보였을 것이다. 보기와는 달리 단단하지 않아 적과 싸우다 쉽게 부러졌을 수 있다. 길이는 8m로 자동차 2대만한 크기이다. 북유럽에 살았다.




암모사우루스(Ammosaurus)


2억 500만년 전
암모사우루스의 뼈는 미국 코네티컷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모래 도마뱀’이란 뜻의 암모사우루스는 뒷다리로 서서 걷거나 네 발로 걷기도 했다. 몸 길이는 2.5m이고 넓은 앞발에 강한 발톱이 붙어 있다.




아나토티탄(Anatotitan)


6,8000만년 전
아나토티탄은 오리 모양의 부리가 붙어 있어 ‘거대한 오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1,000개의 이빨로 음식을 씹어 먹는다. 길이는 자동차 3대만하고 강력한 뒷다리로 걸었다.




안키케라톱스(Anchiceratops)


7500만년 전
‘뿔이 촘촘히 난 얼굴’이란 뜻의 안키케라톱스는 몸 길이가 버스만하다. 눈 위에 긴 뿔이 두 개, 코 위에 짧은 뿔이 하나 있다. 목 주위에 뼈장식이 둘러져 있다. 뼈장식에 혹이 많고 가시가 뒤쪽으로 나 있다. 안키케라톱스는 뼈장식의 모양으로 서로를 구별한 것 같다. 북아메리카에 살았던 초식 동물이다.





안키사우루스(Anchisaurus)

2억 500만년 전
‘도마뱀에 가까운’이란 이름이지만 현재의 도마뱀보다 훨씬 더 컸다. 소형차만한 크기로 3m까지 자란다. 안키사우루스는 적을 만나면 재빨리 도망쳤다. 앞발에 강한 발톱이 붙어 있고 식물이나 고기를 먹었을 것이다.




안킬로사우루스(Ankylosaurus)


8,000만년 전
‘붙어버린 파충류’란 이름의 안킬로사우루스는 무장한 탱크 모습이다. 눈썹을 비롯하여 몸 전체가 두꺼운 갑옷으로 싸여 있어 육식 공룡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 사람의 머리만한 뼈 곤봉이 꼬리 끝에 붙어 있어 적을 공격했다. 북아메리카에서 살았다.




안타크토사우루스(Antarctosaurus)

8,000만년 전
18m나 되는 안타크토사우루스는 공룡 세계의 진짜 거인이었다. 오늘날 살았다면 4층 건물보다 더 컸을 것이다. 넓적다리 뼈가 건물의 현관보다 더 크다. 안타크토사우루스란 ‘남쪽 도마뱀’이란 뜻이다. 남 아메리카에서 인도에 이르는 여러 지역에 살았다.



아파토사우루스(Apatosaurus)

1억 3,000만년 전
‘믿을 수 없는 파충류’란 이름의 아파토사우루스는 거대한 공룡이었다. 사우로포드이고 몸무게가 엄청나게 무겁지만 머리는 몸에 비해 아주 작다. 긴 목과 꼬리로 균형을 잡았다. 길이는 테니스장만하고 무게는 아프리카 코끼리 7마리만하다. 초식 동물로 북아메리카에 살았다.




아랄로사우루스(Aralosaurus)

8,000만년 전
중앙 아시아에 있는 아랄 바다에서 발견되었다. 그 곳의 지명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 눈 앞에 작은 혹이 있는 오리 부리 모양의 공룡이다.




아르케오르니토미무스(Archaeornithomimus)


9,5000만년 전
1920년대 몽고에 간 탐험대가 처음으로 발견했다. 발가락에 강한 발톱이 있고 길이가 3.5m이다. 이름의 뜻은 ‘옛날 새를 닮은’이다




아크토사우루스(Arctosaurus)
‘북극 도마뱀’이라는 뜻이다. 북극권의 북쪽인 캐나다의 캐머론 섬에서 발견됐다. 작은 육식 공룡으로 트라이아스기 말에 살았다. 처음 발견됐을 때 과학자들은 거북 뼈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수쿠스(Aristosuchus)


1억 2,000만년 전
영국 남부 해안의 바다에 있는 와이트 섬에서 발견됐다. 육식 공룡이지만 직접 사냥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신 다른 공룡이 죽인 동물의 찌꺼기를 먹었다. 몸 길이가 2m이고 튼튼한 네 다리에 날카로운 발톱이 달렸다. 이름은 ‘최고의 악어’라는 뜻이다.




아르리노케라톱스(Arrhinoceratops)


8,000만년 전
1920년대 캐나다 엘버타에서 발견됐다. 처음 발견한 과학자들은, 이 공룡은 코뿔이 없다고 생각해 ‘코뿔이 없는 얼굴’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뒤에 코뿔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몸 길이가 9m이며 목 주위에 긴 장식이 있다. 이마에는 길고 뾰족한 뿔이 나 있다. 초식 공룡이며 백악기 말에 북아메리카 서부의 습한 지역에서 살았다.




아스트로돈(Astrodon)


1억 3,500만년 전
아스트로돈은 아주 커다란 초식 공룡으로 몸 길이가 10m에 이른다. 180년대 미국 메릴랜드 주에서 처음 발견됐으며 텍사스에서도 발견됐다. 유럽에서도 살았을지 모른다. 사우로포드이며, 이름은 ‘별 모양의 이빨’이라는 뜻이다.




아틀란토사우루스(Atlantosaurus)


1억 5,000만년 전
19세기 뼈 전쟁 중에 발견된 것으로, 초기 공룡에 속한다. 목과 꼬리가 매우 길어 디플로도쿠스처럼 생겼다. 23m길이의 초식 동물로 쥐라기 말기에 북 아메리카에서 살았다. O.C.마쉬 교수가 그리스 신 아틀라스의 이름을 따서 아틀란토사우루스라 이름 지었다. ‘아틀라스 파충류’라는 뜻이다.




아틀라스콥코사우루스(Atlascopcosaurus)


1억 3,000만년 전
호주 남쪽의 공룡 골짜기에서 발견된 작은 공룡이다. 발견된 몇 개의 화석을 보면 힙실로포돈과 비슷하게 생긴 것 같다. 발굴에 필요한 경비를 대준 아틀라스콥코 회사의 이름을 따서 아틀라스콥코사우루수라 불렀다.




아우블리소돈(Aublysodon)


7000만년 전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꼬마 친척이다. 1869년 고생물학자인 조지프 레디가 이름 지었다. 북아메리카에서 산 육식 동물로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보다 턱이 더 날카로웠던 것 같다.




아바케라톱스(Avaceratops)


9,000만년 전
초식 동물로 목 둘레에 뼈로 된 장식이 있다. 1981년 북 아메리카 몬타나에서 처음 발견됐다. 처음 발견한 닷선 박사는, 아내의 이름을 따서 아바라고 불렀다. 약 2m길이에 높이는 1m이다.




아발로니아(Avalonia)


2억 1,000만년 전
영국 서머셋에서 등뼈와 엉덩이뼈, 다리뼈가 발견됐다.




아비미무스(Avimimus)


7,000만년 전
1981년 중국 근처 몽고 남쪽 지방에서 처음 발견됐다. 작은 새처럼 생겼으며 짧은 날개가 달린 것 같다. 눈과 뇌가 크고, 이름의 뜻은 ‘새를 닮은’이다.




카마라사우루스(Camarasarus)


1억 3,000만년 전
머리 꼭대기에 콧구멍이 있다. 때문에 이 거대한 초식 공룡이 물 위로 콧구멍을 내밀고 숨을 쉬면서 많은 시간을 물 속에서 보냈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카마라사우루스는 주로 땅에서 살았다. 발이 너무 커서 화석이 된 발자국 안에서 아이가 첨벙거리며 놀 수 있을 정도이다. 몸 길이가 18m에 이르는 이 거대한 공룡의 이름을 1877년에 에드워드 코프가 붙였다.




칼로보사우루스(Callovosaurus)


1억 2,7000만년 전
입 안 가득 식물을 씹으면서 선사 시대의 습지를 돌아다녔다. 네 발로 걷고 뒷발로 몸을 일으켜 세운다. 길이는 3.5m. 똑바로 서면 이층버스의 꼭대기를 들여다볼 수 있다.




캄프토사우루스(Camptosaurus)


1억 3,000만년 전
캄프토사우루스 화석은 북아메리카와 유럽에서 발견되었다. 입 안에는 몇 백 개나 되는 이빨이 있어 거친 나뭇잎을 갈갈이 찢었다. 뺨을 불룩하게 해서 식물을 한 입 가득 넣고 여러 번 씹어 삼켰다.




카르카로돈토사우루스(Carcharodontosaurus)


1억 4,000만년 전
‘거대한 상어 파충류’라는 뜻이다. 1950년 사하라 사막에서 프랑스 발굴팀에 의해서 처음 발견됐다. 길이가 8m로 대부분의 악어보다 더 길었다.




카르노투루스(Carnoturus)


1억 4,000만년 전
카르노투루스의 화석을 보면 눈 바로 위쪽에 이상한 뿔들이 있고 턱이 짧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황소와 닮았다고 생각해서 ‘고기를 먹는 황소’라는 뜻의 이름을 붙였다. 가느다란 몸에 뭉툭한 앞발, 길고 얇은 뒷다리를 지녔다.




케라토사우루스(Ceratosaurus)


1억 6,000만년 전
케라토사우루스 무리가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광경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6m나 되고 발톱이 달린 발로 재빨리 달릴 수 있다. 날카로운 발톱과 무시무시한 이빨로 먹이를 사냥했다.




케티오사우리스쿠스(Cetiosauriscus)


1억 6,000만년 전
초식 동물로, 쥐라기 말엽 영국에서 살았다. 몸 길이는 15m정도이다. 육식 동물에서 맞서 싸울 때 긴 꼬리를 휘둘렀을 것이다. 이름은 ‘고래 같은 파충류’라는 뜻이다.






케티오사우루스(Catiosaurus)


1억 6,000만년 전
최초로 발견된 공룡 화석 중에 케티오사우루스의 이빨과 뼈 조각들이 있다. 1841년 영국 남부 옥스포드 근처에서 발굴됐다. 몇 년 후, 보다 완전한 골격이 영국의 러트랜드에서 발견됐다. 그것은 영국의 레스터셔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쥐라기 중엽에서 말엽까지 살았던 사우로포드(네 발 달린 초식 공룡)로 등뼈가 육중하고 단단하다. 1979년 넓적다리뼈가 모로코에서 발견됐는데, 크기가 키 큰 사람만했다.




카스모사우루스(Chasmosaurus)


8,000만년 전
북 아메리카에 살았던 초식 공룡으로, 네 발로 다녔다. 길이가 5.2m로, 자동차 두 대만하고 무게는 코뿔소 두 마리만하다. 머리 뒤쪽에 피부로 덮인 긴 뼈 장식이 있어 티렉스 같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목을 보호했다. 양쪽 눈썹 위에 난 두 개의 뿔로는 경쟁자와 싸웠다.




키알링고사우루스(Chialingosaurus)


1억 5,000만년 전
4m길이의 자동차 네 대만한 크기이지만, 비슷한 종류의 다른 공룡보다 호리호리하다. 네 다리가 길고 등과 꼬리를 따랄 끝이 뾰족한 골판이 두 줄로 붙어 있어 방어용 무기로 썼다. 중국 남부 키알링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키알링고사우루스라고 부른다. 스테고사우어이며 초식 동물이다.




킬란타이사우루스(Chilantaisaurus)


8,000만년 전
중국에서 살았던 킬란타이사우루스는 알로사우루스의 친척이다. 두 발로 다니는 무서운 육식 동물이다. 몸무게도 코뿔소 두 마리만큼이나 된다. 큼직한 앞발과 발톱 달린 앞발가락 3개로 먹이를 움켜 잡았다.




키로스테노테스(Chirostenotes)


8,000만년 전
한 짝의 앞발, 턱뼈만이 캐나다에서 발견되어 힘들게 조립한 공룡이다. 키로스테노테스란 ‘가냘픈 앞발’이라는 뜻이다. 길고 가느다란 앞발가락 3개에 길고 폭이 좁은 발톱이 붙어 있다. 2m밖에 안 되는 작은 몸과 가는 다리지만 굶주린 적이 공격해 오면 재빨리 도망갈 수 있었다.




클라오사우루스(Claosaurus)


8,000만년 전
‘부서진 도마뱀’이라는 뜻의 클라오사우루스는 하드로사우어이다. 미국 캔자스에서 발견된 오리 부리 모양의 공룡이다. 클라오사우루스는 두개의 긴 뒷다리로 걷거나 뛰었으며, 길이는 3.7m이다. 물결 모양의 작은 이빨이 빽빽이 들어차 있어 거친 나무 식물을 씹을 수 있었다.




충킹고사우루스(Chungkingosaurus)


1억 7,000만년 전
쥐라기에 중국에서 연한 잎을 먹고 살았다. 네 발로 다니는 충킹고사우루스는 몸 길이가 4m 정도다. 육식 동물의 공격을 막는 무기로, 등에 두껍고 커다란 골판이 두 줄로 나 있다.




코엘로피시스(Coelophysis)

2억 1,800만년 전
코엘로피시스가 뒷다리로 서면 사람의 목을 물어뜯을 만한 높이일 것이다. 가는 몸매의 육식 동물로, 코에서 꼬리까지의 길이가 3m이다. 목이 길고 꼬리는 훨씬 더 길다. 앞발에 달린 튼튼한 세 개의 발가락으로 도마뱀 같은 작은 동물이나 다른 먹이를 움켜 쥐었다.




콜로라디사우루스(Coloradisaurus)


2억년 전
이름만 보고 미국의 콜로라도에서 발견되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남아메리카 아르헨티나의 로스콜로라도스에서 화석 뼈가 발견되었다. 트라이아스기에 살았고 크기는 충킹고사우루스만하지만 턱이 짧다. 작고 무딘 이빨로 연한 식물과 어린 가지를 갈아 먹었다.




콤프소그나투스(Compsognathus)


1억 4,200만년 전
큰 닭만한 크기이다. 쥐라기의 도마뱀이나 다른 작은 파충류를 사냥했다. 꼬리는 몸 길이의 반이나 된다. 콤프소그나투스는 뒷다리로 빨리 달렸으며, 위험이 닥치면 바람처럼 재빨리 도망쳤다.




코리토사우루스(Corythosaurus)


7,500만년 전
오리 부리 모양의 하드로사우어로, 북아메리카에서 살았다. 크고 무거운 공룡으로, 몸 길이가 10m이고 높이는 7m였다. 머리 위에 커다란 볏이 달려 있어 마치 원반을 머리에 꽂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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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명의 삶

정보의바다 2008. 2. 14. 09:34
도연명<365-427>은 서기 365년에 태어 났는데, 이름은 潛 자가 淵明이다. 그의 증조부는 晋의 名將 陶侃 이였고, 외조부는 당시에 풍류인으로서 이름이 높았던 孟嘉였다. 固窮節을 지키면서 몸소 농사를 지었던 억척 같은 성격과 한편 도연히 술에 취해 속세를 해탈하고「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를 따며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던 농부」<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隱逸의 풍류가 바로 무인인 증조부와 墨客이였던 외조부로 부터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도연명이 태어 났을 때의 그의 집안은 완전 몰락하여 오늘날 까지 도연명의 부친 이름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도연명은 현 江西省 九江市 일대에 있던 심陽 채桑이라는 마을에서 출생했다. 채상은 揚子江의 중류에 있으며 북으로는 명산이 廬山을 등에 업고 남으로는 파양호를 바라보고 있는 명승지 이다.

宋대의 유명한 성리학자 朱子가 그 곳을 찾아 전에 도연명이가 술 마시던 큰 바위 醉石 에서 시를 읊었다고 한다. 연명이 살던 때는 東晋의 왕실이나 士族들의 세력이 약화되고 차츰 무력적 신흥 군벌들이 대두하여 서로 각축을 벌이던 때였으며 , 그가 42세에 歸去來辭를 쓰고 농촌으로 돌아온 전후기에는 군벌들의 손에 동진의 왕이 幽閉되거나 또는 弑殺 되기까지 하였다. 당시 도연명의 문벌이 대단치는 않았으나 그의 집안은 역시 진 나라의 사족에 속했고, 또 그의 학식은 보수적 문인 계층에 속했다. 그르므로 그는 신흥의 힝폭한 군벌들과는 어울릴 수 가 없었다. 不義에 가담하여 잘 사느냐 ? 가난을 각오하고 은퇴하느냐 ? 도연명은 의연하게 후자의 길을 택했다. 이런 그의 사상적 바탕은 「달통하면 나가서 천하를 구제하고, 막히면 할 수 없이 물러나 자신을 착하게 산다」<達則兼善天下, 窮則獨善其身>는 儒家였다.





즉 修己治人은 선비의 의무이기도 했다. 써 주면 나가서 일하고, 물러나면 은퇴하는 것이 用行舍藏이다. 이렇게 물러난 도연명 에게는 老莊哲學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주만물의 근원은 道 도는 無爲自然이다. 인간은 영원한 實在인 無에서 와서 잠시 現象界인 이승에 나그네로 寄寓하고 다시 본집인 無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 만물은 도를 따라 物化하게 마련이다. 그르므로 인간은 현실적 속세 利欲과 醜惡에 엉킨 타락 세계에서 발버둥 칠것이 아니라 無爲自然 이라고 하는 참 세상에 몸을 맏기고 유유자적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연명도 육신을 가진 인간이 였다. 정신 만으로 살 수는 없었다.


육신은 음식과 옷을 필요로 했다. 엄동설한에도 시들지 않는 송백 같은 절개를 지킨 도연명이였으나 물질생활의 궁핍을 견디어 내는 대는 심한 어려움을 격어야 했다. 비록 아사 일보 직전에서 자기를 이해해 줄 만한 사람에게 구걸까지 한 일은 있었으나 그는 끝까지 固窮節을 지키고 또 힘껏 스스로 농사를 지어 견디어 냈다. 도연명은 스스로 守折 한다고 했다. 인간적 巧智나 奸狡, 또는 권모 술수를 쓰지 않고 소박한 대자연의 순수한 德性을 지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는 정신과 육신을 가진 이원적 존재로서의 자신의 葛藤과 矛盾을 숨김없이 내어 놓고 시를 적었다. 이렇게 참 세상을 逍遙했던 도연명은 427년 63세에 自祭文을 지어놓고 이승을 떠났다. 그도 한 가엷은 인간 이였다. 자제문 맨 뒷 구절에서 이렇게 읊었다. <人生實難, 死此之何> 한 평생 살기가 참으로 힘들었거늘, 죽은 후 저승의 세계는 어떠할는지 ?



 

■ 出生과 背景

 

도연명의 전기는 <宋書 隱逸傳><晋書 隱逸傳><南史 隱逸傳>등에 보이고 특히 도연명과 친교 했던 <顔延之 384-456>가 쓴 <陶徵士뢰>와 梁의 昭明太子 <소통 501-531>이 쓴 <도연명전기>와 <도연명집>의 서문이 중요한 기록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도연명 자신이쓴 <五柳先生傳>을 소흘이 할 수 없다. 이 글에서 연명은 자화상을 철저히 격관적으로 묘사했다. 성명도 출신도 밝히지 않은 채 다만, 집 둘레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어 오류선생이라 했다. 오류선생은 한적한 성품에 말이 적고 榮利를 쫒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詩書를 즐겼다. 집이 가난하여 떯어진 옷을 걸치고 이따금 굶기도 했으나 태연했다. 술은 좋아 했으나 가난한 처지라 자주 마실 수 가 없었고, 혹 친구가 술 대접을 하면 사양 않고 마시며 취했다. 평생을 제 뜻대로 자유롭게 살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짓다가 죽었다. 이것이 오류선생전의 내용이다. 도연명의 인생을 삼기로 나누면, 제1기는 29세 이전으로 勉學과 농사를 짓고 살았을 때며, 제2기는 29-41세까지 그가 여러 차려 벼슬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던 시기며, 제3기는 42세에서 죽을때 까지 그가 철저히 은퇴했던 시기이다.





■ 陶淵明의 傳來

 

族皆有託 모든 사람이 다 의지할 바 있거늘



孤雲獨無依 나만은 홀로 외로운 구름



曖曖空中滅 기댈 때가 없노라



何時見餘暉 아득히 먼 하늘을 바라보며 눈을 껌벅 이며 언재나 길게 빛을 보리.



도연명이 살아 있을 때 그를 가장 잘 이해해준 사람은 顔延之 였다. 그는<陶徵士뢰>라는 글을 지었다. 徵士란 부름을 받고도 벼슬에 나가지 않은 선비란 뜻이다. 이 글에서 도연명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隱遁者, 고고한 精神의 所有者, 學文이나 生活을 자유롭게 한 사람. 가난하여 손수 밭 갈아 먹은 선비 부모에게 효도하고 가족에게 인자 했으며 타고 날 때부터 술을 좋아했다」그후 도연명이 죽은지 60년이 지나 沈約 이 지은 宋書 隱逸傳을 바탕으로 梁 蕭統의 <陶淵明傳>과 시집의 서문이 나왔다.



蕭統은「연명의 문장은 일반 수준을 뛰어나 정채롭다 」「적절하게 그리는 듯 현실을 비판하고 넓고 참된 경지에서 회포를 풀고, 아울러 굳은 정절로서 도에 안주하고 절개를 지켰으며, 스스로 농사 짓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재산 없음을 걱정하지 않았다 」<語時事則指而可想, 論懷抱則曠而且眞, 加以貞志不休, 安道守節, 不以躬耕爲恥, 不以無財爲病>라고 하여 인격과 학문을 높였다. 또 <簡文帝503-551>도 도연명을 특히 좋아했다. 대체로 梁대의 문풍은 섬세하고 기염했던 宮體를 따랐다. 그럴수록 그들 귀족들은 흙 냄새가 풍기는 소박한 도연명의 시를 좋아 했다. <鐘嶸?-552>는 가장 높게 도연명의 시를 평 했다. 「연명의 시문은 문체가 간결하고 말숙하며 정신은 돈독한 옛날의 진실을 좇았다. 글 속에 깊은 뜻을 지니게 했고, 그의 글을 보면 인덕을 알 수가 있다」라고 했다.



종영의 말대로 도연명은 일상에서 국화를 따며 남산을 보았고, 밤 늦게 이슬을 맞으며 흙 묻은 옷으로 지개를 지고 달 그림자를 길동무하며 돌아오는 농군의 모습과 가난에 쪼달리고 남루한 옷차림인데도 망건에 술을 걸어 이웃과 나누워 마시며 도연히 취하는 인간적인 모습에서 그의 인품이 더욱 빛나는 것이리라. 또 北齊의 陽休之는 「연명의 글은 문장이 빛나고, 우아하지는 못해도 신기하고 방일하며 고고한 경지에 도달했다」 唐의 시인들은 모두가 도연명을 삶을 공감하며 그리워 했다. 그 중에서도 白樂天은 도연명의 찬미사 였다. 그는 도연명을 본따는 시를 十六수나 지었다. 淵明이 죽은 후 그의 故鄕인 江州의 司馬로 부임해간 白樂天은 陶淵明의 옛 집을 찾아 이렇게 읊었다. 



 

今來訪故宅 오늘 그대의 옛집을 찾아



森若君在前 숙연한 마음으로 그대 앞에 섯노라.



不慕樽有酒 허나, 나는 그대의 단지에 있는 술이 그리운 것도 아니고,



不慕琴無絃 또는 줄 없는 그대의 거문고가 그리운 것도 아니다.



慕君遺榮利 오직 그대가 명예나 이득을 버리고



老死此丘園 이 산과 들에서 자유롭게 스쳐간 것이 그리웁노라



또 蘇東坡는 「陶淵明은 나가서 벼슬하고 싶으면 벼슬했고, 또, 隱退하고 싶으면 隱退했다. 그렇다고 高潔 하다고 自處하지도 않았다. 배가 고프면 남의 대문을 두들이고, 살림이 넉넉해지면 닭이나 술을 빗어 손님을 청했다」



후에 蘇東坡는【采菊東離下, 悠然見南山】【嘯傲東軒下, 요復得此生】【客養千金軀, 臨化消其寶】위의 세 구절을 道를 득한 경지의 詩 귀라고 했다. 또, 梁啓超는【客陽千金軀, 臨化消其寶】를 七千券의 大藏經에 맞먹는 명언이라 했다. 世俗의 名利에 탐한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陶淵明의 人品과 詩를 論할 수 없고 共感 할 수 도 없을 것이다. 虛構와 假飾에 사는 오늘날 우리 내 삶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세계다. 『人生이란, 잠시 現世에 寄寓 하다가 다시, 없는 것으로 돌아갈 몸이거늘 後世에 무엇을 남기려고, 重傷과 謨略으로 世上을 사는가 』 라고 評 했다.



참으로 사람답게 살다간 人物이다. 도연명은 스스로 수절한다고 했다. 인간적인 巧智나 奸狡 또는 권모술수를 쓰지 않고 소박한 대 자연의 순수한 德性을 지켯다. 歐陽修는「진에는 글이 없고 오직 陶淵明의 歸去來辭만이 있다」했으며, 黃庭堅은「자로 재지 않고도 저절로 맞는 경지의 詩, 淵明은 詩를 지은 것이 아니라 자기 가슴속의 日常을 그 대로 그렸다」또 우리나라에서는 退溪가 도연명에게 심취했다. 퇴계는 <和陶集飮酒>20수와 <和陶集移居韻>2수를 지었다. 퇴계는 성학을 밝히고 왕도를 구현하기 위해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한편으로 염치를 높이고 절의를 지키기 위해 염담청정한 은퇴를 몸소 실천했다. 퇴계는 도연명을 이렇게 읊었다.「한잔의 술을 홀로 마시면, 한가롭게 도연명의 시를 영하노라 숲이나 시내 사이를 거닐면서 후련한 심정으로 즐기노라」라고 했다.



■ 陶淵明의 참고서적

 

陶端節全集註 <淸 陶수 註> 世界書局版



陶淵明 傳論 <張芒 著>



陶淵明作品硏究 <黃仲崙 著>



陶淵明評傳 <李辰冬 著> 中華文化出版事業委員會



田園詩人陶潛 <郭銀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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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立春)

양력 2월 4일경. 24절기 중 첫 번째 절기로 봄으로 접어드는 것을 알린다. 음력으로는 대개 정월 때라 새해를 상징한다. 그래서 옛어른들은 이 날 '입춘대길'과 같은 좋은 뜻의 글을 써서 대문 기둥이나 대들보, 천정에 붙였고 농가에서는 보리 뿌리를 뽑아 보고서 그 해 농사가 잘될지 잘못될지 점을 치기도 했다.






우수(雨水)

양력 2월 19일경. 날씨가 많이 풀려 봄기운이 돋고 초목이 싹트게 되는 절기로 예로부터 "우수, 경칩에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말이 있다.






경칩(驚蟄)

양력 3월 6일경. 경칩은 땅속에 들어가 잠을 자던 동물들이 깨어나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이 무렵에는 개구리들이 나와 물이 괸 곳에 알을 낳는데 그 알을 먹으면 허리 아픈 데 좋다고 해서, 경칩날에 개구리알을 먹는 풍습이 전해오고 있다.






춘분(春分)

양력 3월 21일경. 겨울에 짧았던 낮이 길어져서 밤낮의 길이가 똑같아지는 날이다. 음력으로는 2월인데 바람이 많이 불어서 "2월 바람에 김치독 깨진다.", "꽃샘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이다. '꽃샘 추위'는 바람신이 꽃이 피는 걸 샘낸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청명(淸明)

양력 4월 5일경. 한식의 하루 전날이거나 한식과 같은 날이 된다. 오늘날의 식목일과도 대개 겹친다.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논농사 준비 작업으로 논밭둑 가래질을 시작한다.





곡우(穀雨)

양력 4월 20일경. 봄비가 잘 내리고 온갖 곡식이 윤택해지는 때이다. 그래서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자가 마른다." 즉 그 해 농사를 망친다는 말이 있다. 옛날에는 이 무렵에 못자리에 쓸 볍씨를 담갔는데, 밖에서 부정한 일을 당하거나 본 사람은 집 앞에 와서 불을 놓아 나쁜 귀신을 몰아낸 다음에 집 안에 들어오고 들어와서도 볍씨를 보지 않을 정도로 소중히 여겼다.





입하(立夏)

양력 5월 6일경. 여름이 다가온 것을 알리는 절기이다. 곡우 무렵에 마련한 못자리가 자리를 잡아 농사일이 더욱 바빠지는 때이다. 농작물도 잘 자라지만 해충이 많아지고 잡초까지 자라서 이것들을 없애는 일도 많아진다.






소만(小滿)

양력 5월 21일경. 여름 기분이 나기 시작하면서 식물이 성장하는 때이다. 농가에서는 모내기 준비, 가을 보리 먼저 베기, 여러 가지 밭농사의 김매기들이 줄을 이어 제일 바쁜 계절로 접어들 때이다. 지금은 농사 기술이 발달해서 이때쯤 모내기가 시작된다. 봄철 입맛을 돋우는 냉잇국은 이때 즐겨 먹는 음식으로 유명하다.






망종(芒種)

양력 6월 6일경. 망종은 벼, 보리 등 수염이 있는 곡식의 씨앗을 뿌리기에 적당한 때라는 뜻으로 "보리는 익어서 먹게되고, 볏모는 자라서 심게 되니 망종이요.", "햇보리를 먹게 될 수 있다는 망종" 이라는 말이 있었다. 모내기와 보리베기가 겹쳐서 1년 중 제일 바쁜 때였기 때문에 특히 보리 농사가 많았던 남쪽 농촌에는 "발등에 오줌싼다."는 말이 전해 온다.





하지(夏至)

양력 6월 21일경. 일년 중 낮이 가장 긴 절기이다. 옛어른들은 모내기를 모두 끝내고 이 때 까지도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냈다. 예를 들어 충청북도 단양군의 한 마을은 제물로 개나 돼지, 소를 잡아 그 머리만 용소(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밑에 있는 웅덩이)에 넣는다. 그러면 용신이 그 부정함에 노해 비를 내려 씻어 버린다고 한다.





소서(小暑)

양력 7월 7일경. 소서는 작은 더위라는 뜻으로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때이다. 그래서 온갖 과일과 채소가 풍성해지고 밀과 보리도 먹게 된다. 특히 단오를 전후해서 즐기는 밀가루 음식은 이 때가 가장 맛이 난다고 한다.





대서(大暑)

양력 7월 23일경. 대서는 큰 더위라는 뜻으로 몹시 덥고 큰 장마가 지는 경우가 많은 절기이다. 소서와 대서 무렵에는 논밭의 잡초를 뽑고 풀, 짚 등을 석여 거름을 만들어 두었다. 이 때가 과일 맛이 가장 좋은데 비가 적게 와야 더욱 제맛이 난다고 한다.






입추(立秋)

양력 8월 8일경.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다는 뜻을 가진 절기이다. 따라서 이 때부터는 가을 채비를 시작해야 하는데 특히 무, 배추를 심고 서리가 내리기 전에 거두어서 겨울김장에 대비하게 된다. 김매기도 끝나고 농촌이 한가해지기 시작해서 "어정 7월, 건들 8월." 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처서(處暑)

양력 8월 23일경. 처서는 여름이 지나 더위가 가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때는 따가운 햇볕이 누그러져서 풀이 더 자라지 않기 때문에 논두렁이나 산소의 풀을 깍고, 날씨가 선선해 져서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고 한다.





백로(白露)

양력 9월 8일경. 백로는 '이슬 로(露)'자를 써서, 밤에 기온이 내려가고 풀잎에 이슬이 맺히는 등 가을 기운이 완전히 나타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고된 여름 농사를 다 짓고 추수까지 잠시 일손을 쉬는 때라 여자들은 친정으로 부모님을 뵈러 갔다고 전해진다.






추분(秋分)

양력 9월 23일경. 하지 이후로 낮이 조금씩 짧아져서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때이다. 추분이 지나면 점차 밤이 길어지므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게 된다. 이 무렵에는 논밭의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목화와 고추고 따서 말리는 등 잡다한 가을걷이 일이 있다.






한로(寒露)

양력 10월 8일경. 한로는 찬 이슬이 맺힌다는 뜻이다. 기온이 더욱 내려가기 전에 추수를 끝내야 하므로 농촌은 타작이 한창인 때이다. 대개 중앙절과 비슷한 때로 국화전과 국화술을 즐기고 모임과 놀이가 많았다.






상강(霜降)

양력 10월 23일경. 상강은 서리가 내란다는 뜻으로, 이 무렵은 쾌청한 날씨가 계속되면서 밤에는 온도가 매우 낮아져서 서리가 맺히는 늦가을이다. 옛날 중국 사람들은 상강이 지난 다음 입동이 들기 5일 전에는 벌레들이 겨울잠에 들어간다고 했다.






입동(立冬)

양력 11월 7일경. 겨울로 접어든다는 뜻을 가진 절기로 입동에 날씨가 따뜻하지 않으면 그 해 바람이 독하다고 한다. 더 지나면 배추가 얼어붙고 일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입동을 전후해서 김장을 담는다. 그래서 옛날에는 이 무렵이면 여자들이 냇가에서 무, 배추를 씻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소설(小雪)

양력 11월 22일경. 소설부터는 살얼음이 잡히고 땅이 얼기 시작해서 점차 겨울 기분이 든다. 이 무렵인 음력 10월 20일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날씨가 추워서 외출을 삼가고 특히 뱃길을 조심해야 한다.






대설(大雪)

양력 12월 7일경. 대설은 눈이 많이 내린다는 뜻을 가진 절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반드시 눈이 많이 오지는 않지만, 이 날 눈이 많이 오면 다음 해 풍년이 들고 푸근한 겨울을 난다고 한다.





동지(冬至)

양력 12월 22일경. 일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이다. 동지 다음 날부터는 낮이 다시 길어지기 때문에 고대 사람들은 이 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나는 날이라 생각하고 태양신에게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동짓날을 '작은 설'이라하고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이다.






소한(小寒)

양력 1월 6일경. 소한은 '작은 추위'라는 뜻이다. 이름으로 보면'큰 추위'라는 뜻의 대한 때가 더 추운 것 같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소한 때가 가장 추워서 "대한이 소한 집에 놀러 갔다가 얼어 죽었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이다.






대한(大寒)

양력 1월 21일경. 중국에서는 겨울 추위는 입동에서 시작해서 소한으로 갈수록 추워지고 대한에 이르러서는 최고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소한 때가 더 추워서 "춥지 않은 소한 없고 포근하지 않은 대한 없다.", "소한의 얼음 대한에 녹는다."는 속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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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명]은 1908년 11월13일평안남도 평양의 대동문(大同門) 근처 이문리에서 아버지 석승서(石承瑞)와 어머니 김의식(金毅植) 사이에 3남 1녀 중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맏형 석주흥(石宙興)은 월남하지 못했고, 누이동생 석주선(石宙善)은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장을 지내다가 1996년 타계했으며, 피부과 의사이던 막내 석주일(石宙一)은 1981년에 일찍 세상을 떴다. 석주명이 농학을 택하는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송도 고보를 세운 사회운동가 [윤치호]이다. 1929년 가고시마 고농을 졸업한 석주명은 함흥 영생 [고등보통학교]에 박물교사로 갔다가 1931년 모교인 송도 고보로 옮겼다.            



그의 인생에 ‘화려한 송고 시절’이 열렸다. 그는 1931∼1942년 송도 고보에서 일한 11년 간에, 그가 평생 발표한 논문 128편의 3분의 2가 넘는 97편을 발표해 세계적인 학자로 올라섰던 것이다. 송도 고보에 취임한 석주명은 곧 개성 지방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나비] 채집을 시작했다. 당장 참고할 만한 나비 전문 서적이 없었으므로 나비를 채집해서 일단 그것들의 학명을 알아 본 후 개성 지방의 나비 분포 상태를 밝혀 낼 속셈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개성 지방에는 나비가 130여 종이나 살고 있어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많은 종이 서식하고 있었으므로,그의 나비 연구는 첫 출발 치고는 아주 드물게 보는 행운을 만나게 되었다.



석주명은 쉬는 날마다 포충망을 들고 개성 주변의 산과 들을 누볐다. 그는 또 방학 때 학생들에게 나비 채집을 숙제로 냈는데, 결과가 아주 좋았다. 전국 각처에서 학생이 모이다 보니, 개성 지방 나비는 물론 전국 각 지방의 나비를 골고루 수집할 수 있었다.



석주명이 국제적인 나비 학자로 올라선 데에는 미국의 저명한 학자들 도움이 컸다. 1931년 어느날 미국 앤드류스 공룡 탐사대의 일원인 모리스 박사가 몽골에서 탐사를 끝내고, 일행과 떨어져 일본으로 가다가 개성에서 열차를 내렸다. 경성에 내린다는 것이 실수로 개성에서 내린 것이다. 개성 전도단이 모리스 박사를 안내한 곳은, 개성의 명물로 등장한 송도 고보 박물관이었다. 원홍구의 조류 표본과 석주명의 나비 표본이 모리스 박사의 얼을 빼놓았다. 그 일이 인연이 되어, 미국의 여러 박물관에 나비 표본과 연구 자료를 보낸다는 조건으로 모리스는 석주명에게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 광복이 되기까지 석주명의 채집 여행은 거의 미국 박물관들의 재정 후원을 받아 이루어졌다.             



수집한 나비 개체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석주명에게는 아주 곤란한 문제가 생겼다. 제대로  된 곤충 도감이라고 일본인들이 자랑하는 마쓰무라 쇼넨(松村松年) 박사의 『일본 곤충 대 도감』(1931년)이나, 우치다 세이노쓰케(內田淸之助)가 만든 『일본 곤충 도감』(1932년)에 는, 석주명이 보기에 크기나 모양에 약간 차이가 있을 뿐 분명히 같은 종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나비가 제각각 다른 이름을 달고 있어 종류를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곤충 연구의 출발 점인 분류학, 그것도 어느 개체가 어떤 이름을 가진 종류인지 알아보는 데서부터 꽉 막혀 버린 것이다.



그것은 당시 학자들이 [개체 변이](같은 종인데도 개체 하나하나의 무늬 수나 날개 길이·색깔·띠 따위 형질이 조금씩 다른 현상)를 감안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동종이명(同種異名), 즉 같은 나비인데도 형질이 조금 다르다고 해서 다른 이름을 붙인 것은



△[명명규약](命名規約·Rules of Nomenclature)의 결함



△학자들의 공명심

△현장(field work)을 무시한 연구 태도에서 말미암은 결과였다.



마쓰무라라면 개체를 많이 채집하지 못해 틀림없이 별개 종이라고 분류했을 터이지만, 워낙  개체를 많이 수집해 양 극단(極端) 사이의 중간치 개체도 많이 볼 수 있었던 석주명은, 그것들이 모두 같은 종임을 알아보았다. 덕분에 그는 두 번째 논문인 개성 지방의 나비 목록을 발표한 해(1933년)에 바로 개체 변이 문제를 거론한 세 번째 논문 「조선산 접류의 미기록 종, 이상형(異常型) 및 은점표범나비 반문(斑紋)의 변이성」을 발표할 수 있었다.



개체 변이는 이처럼 석주명이 나비 연구를 시작하자마자 그의 연구 테마로 정해졌다. 석주명이 개체의 '변이 범위(variation sphere)'를 규명한 '변이 곡선' 이론을 뒷받침하는데 제일 많이 동원된 종은 [배추흰나비]이다.



그가 「조선산 배추흰나비의 변이 연구」(제1보 1936년, 제2보 1937년, 제3보 1942년 발표) 논문을 쓰기 위해 앞날개 길이를 일일이 자로 잰 배추흰나비 개체 수는 물경 16만 7천 847마리에 달한다.              



석주명은 또한 그 많은 나비를 한 마리도 소홀히 다루지 않았다. 병신 나비일지라도 잘 관찰하여, 그것이 태어날 때부터 기형인지 포획할 때 상했는지 판별해, 날 때부터 잘못된 것만 따로 모아 기형 나비를 다룬 논문을 발표한 것도 꽤 된다. 이상형(異常型) 나비가 1만 개체에 하나 정도 나온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형·기형 나비만을 다룬 그의 논문들은, 개체를 많이 채집하는 '석주명식 분류학'이었기에 가능했다고 하겠다.             



개체 변이 범위를 규명해 '분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한 석주명은 1940년 무렵부터 그의 연구 테마를 '분포' 쪽으로 넓혔다. 1939년 「조선산 [봄처녀나비]의 변이 연구」를 발표할 때부터 변이를 다룬 논문 뒤에 분포 지도를 덧붙이기 시작한 그는, 1940년 『조선산 접류 목록』을 발간한 이후 본격적으로 분포 연구에 치중했다.



석주명은 분포 연구가 위에 말한 목표를 달성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유연 관계를 밝히 고 계통을 세우기 위한 분포 지도 만들기는 다행히 끝을 보았다. 누이동생 석주선이 한국전쟁 피난 시절 배낭에 넣고 다니다가 1973년에 발간한 『한국산 접류 분포도(The Distribution Maps of Butterfles in Korea)』는, 한국 나비 250종이 분포하는 지역을 종마다 각각 한국 지도와 세계 지도 한 장씩에 붉은 점으로 표시한 지도 500장으로 편집되어 있다. 변이 연구 10년에 걸친 자료 축적과,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리만큼 전국토를 답사한 채집 여행이 낳은 결과였다.             



1942년 송도 중학교를 사직한 석주명은 다음해 제주도로 가서 2년 1개월간 머물렀다. 이때 그는 ‘나비 박사’에 이어 ‘제주도 박사’라는 별명을 하나 더 얻을 정도로 제주도에 관 해 질과 양에서 큰 업적을 쌓았다.            



1945∼1949년에 제주도 관련 논문 10 편을 발표했고, 1949년부터 ‘제주도 총서’라는 이름으로 『제주도 방언집』(1947년) 『제주도의 생명 조사서-제주도 인구론』(1949년) 『제주도 문헌집』(1949년) 『제주도 수필-제주도의 자연과 인문』(유고·1968년) 『제주도 곤충상』(유고·1970년) 『제주도 자료집』 (유고·1971년)을 출판했다.             



2년이라는 짧은 체류 기간에 이렇듯 방대한 성과를 낸 일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특히 광복이후 4·3사건을 겪고 육지와 자주  접촉하게 되면서 제주도의 자연·인문 환경이 빠르게 파괴·멸실되었음을 생각하면, 광복 전에 제주도의 거의 전분야에 걸쳐 이루어진 석주명의 조사·채집·연구 업적은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하겠다.             







아침부터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숙소에 모여 앉은 학생들은 예정된 곤충채집은 엄두도 못 내고 교수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이때 지도교수인 오카지마(岡島銀次)가 학생들을 불러 모았다.



"지금부터 밖에 나가 곤충을 채집해 오는 학생에게 상을 주겠다." 이 빗속에 곤충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지도교수의 말씀인지라 그들은 채집도구를 갖추고 하나둘 숙소를 나섰다.



그리고 한나절이 지나서 모두들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조금 뒤 조그만 체구의 조선인 학생이 배낭에서 삼각지 백여장을 조심스럽게 꺼내 교수 앞에 내놓았다. 각각의 삼각지 속에는 하루살이 한 마리씩이 소중히 싸여 있었다.



낙제가 만든 우등생



세계적인 나비학자 석주명의 장래를 일찍이 기약했던 가고시마 농림학교 유학시절의 일화다. 1908년 평양에서 태어난 석주명은 1921년 13세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명문 숭실고보에 진학했다. 그러나 이듬해 동맹휴학으로 숭실고보를 중퇴하고 개성의 송도고보로 옮겼다.



송도고보에 전학한 석주명은 처음에 소문난 말썽꾸러기였다. 성격이 활달하고 집안이 넉넉해서 휴일에는 개성 근처의 명승지로 놀러 다니고 학교가 끝나면 하숙집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공부는 뒷전이었다. 특히 그는 기타를 치고 노래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죽어라고 기타만 치고 유흥에 들뜬 나날이 한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2학년 말 겨울방학 무렵에 그에게 날아온 성적표는 그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방학 때 신나게 놀 계획을 세우던 석주명이 받은 성적은 반에서 꼴찌였고 빨갛게 낙제표시가 된 과목도 여럿이었다. 그는 성적표를 앞에 두고 방탕한 자신을 반성하며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다음날부터 석주명은 완전히 딴사람으로 변했다. 친구들이 고향으로 모두 떠난 텅빈 하숙집에서 그는 방학을 고스란히 책과 씨름하며 보냈다. 방학이 돼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이 걱정된 그의 어머니는 석주명의 하숙집으로 올라왔다.



하숙방 문을 여는 순간 어머니가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공부에 정신이 팔려있는 그를 보고 어머니는 그날부터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었다.



석주명은 한번 마음먹은 것은 기어코 실천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리고 한번 잡은 것은 끝장을 봐야 성이 찼다. 그가 송도고보 시절 기타에 미친 것도 이런 성품 탓이었다. 그는 자신이 조선에서 가장 기타를 잘 치는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기타를 붙들고 밤낮을 씨름했다.



한때 음악가가 되려고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기타실력에 대한 자부심은 해방 후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세고비아]의 연주를 들으면서 완전히 무너졌다. 세고비아의 연주는 자신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따를 연주였다. 그날로 기타를 때려부숴 버리고 다시는 기타를 만지지 않았다.



곤충채집 방학숙제의 시조



밤낮을 가리지 않은 공부 덕분에 석주명은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의 명문 가고시마 농림학교에 합격한 유일한 한국학생이 됐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동물을 좋아했던 그는 예의 성실함으로 일본 곤충학회 회장을 지낸 오카지마의 주목을 받으며 곤충연구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21년 졸업 후 귀국해 송도고보의 교사로 부임하면서 나비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고 화려한 색깔과 무늬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나비는 곤충학자들에게도 매력적인 연구대상이었다.



석주명은 우선 주변에서부터 다양한 나비를 채집하기 시작했다. 휴일이나 방학이 되면 개성을 벗어나 나비를 찾아 전국 각지를 누비고 다녔다.



허름한 복장에 좌우로 흔들거리는 독특한 걸음걸이로 쓸모도 없는 나비를 찾아 헤매는 그를 땅꾼으로 여기고 뱀이 많은 곳으로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나비를 잡아 무엇에 쓰려느냐는 호기심 어린 질문에도 그는 빙긋 웃기만 할뿐이었다.



석주명은 송도고보의 학생들에게 방학만 되면 나비를 2백마리씩 채집해오라는 숙제를 냈다. 괴짜 선생님 덕분에 학생들은 방학마다 포충망을 들고뛰는 연구보조원이 돼야 했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 초등학생들의 방학숙제의 단골메뉴였던 곤충채집이 실은 그에게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와 학생들이 발로 뛴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송도고보의 박물관은 온갖 종류의 나비표본으로 가득 찼고 개성의 명소가 됐다. 그리고 석주명은 사람들 사이에 '송도(개성)의 기인', '나비박사'로 알려지게 됐다.



세계적 학자로서의 첫발



석주명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일화가 바로 송도고보의 박물관에서 이루어진 '미국인 모리스와의 우연한 만남'이다.



미국의 지질학자로서 몽고 지역을 탐사하던 '앤드류스 탐험대'의 일원이었던 모리스(F.K. Morris)는 고비사막에서 공룡 화석을 발굴한 뒤 일행과 떨어져 경성(서울)으로 오던 중 개성(일본어로 가이조)을 경성(일본어로 게이조)으로 잘못 알아듣고 개성에서 기차를 내리게 됐다.



놓친 기차가 막차여서 할 수 없이 개성에서 하루를 머물게 된 그는 가 볼만한 곳을 찾다가 이미 명소가 돼 있던 송도고보의 박물관 표본실을 방문하게 됐다. 거기에 진열된 수많은 표본들에 감탄한 모리스는 미국의 박물관과 표본을 교환할 것을 권유했으며, 나중에 미국으로 돌아간 뒤 직접 나서서 미국의 여러 박물관 및 대학과 송도고보와의 교류를 주선했다.



이러한 이야기가 퍼지면서 석주명의 나비연구는 다시금 화제가 됐으며 '세계적인 과학자'라는 세간의 평가를 받게 됐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모리스가 송도고보를 방문했을 당시는 석주명이 부임하기 이전이었다. 또 모리스의 감탄을 자아낸 표본들은 화려한 나비표본이 아니라 전임 생물교사였던 원홍구가 채집한 조류 박제를 비롯, 송도고보 박물관에서 자체적으로 수집한 여러 동물의 표본이었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물론 이후의 송도고보와 외국의 여러 기관 사이의 표본교환은 석주명의 나비표본이 주요 품목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석주명이 모리스와 만난 경위야 어찌됐건 석주명의 학문적 성공이 서양인 학자와의 만남에서 비롯된 우연한 행운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가 이룩한 성공의 핵심은 유명세가 아니라 그의 학문적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적절한 연구방법을 선택하고 이를 남다른 성실성으로 실천했던 진정한 학자였던 것이다.



나비분류학 새시대 열어



석주명이 나비연구를 시작할 즈음인 1930년대 초반에는 이미 한국산 나비에 대한 외국의 학자들의 연구가 50여년 정도나 축적돼 있었다. 당시까지 나비연구자들은 몇몇의 개체만을 채집하고 관찰해서 조금만 다른 형태가 발견되면 바로 새로운 학명을 명명했다.



때문에 한국산 나비에 대해 수많은 종과 [아종]이 이미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석주명은 외국학자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많은 개체를 채집해서 기존에 등록된 종(種)이나 아종(亞種) 나비가 단순한 개체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개체변이]란 생물들이 성장하는 환경의 차이에 따라 조금씩 상이한 변이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 중에도 50kg도 안되는 날씬한 모델이 있는가 하면 2백kg에 육박하는 씨름선수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몸무게의 차이가 크다고 해서 다른 종이라고 분류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수의 개체를 채집해 각각의 변이를 조사하면 처음에 현격한 차이 때문에 다른 종으로 생각되던 것들이 개체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조사한 개체수가 적을 때는 변이의 극단에 있는 표본을 새로운 종으로 분류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조그마한 차이만 발견되면 새로운 종으로 등록해서 자신의 이름을 학명에 올리고 싶어하는 학자들의 공명심도 새로운 종을 남발하는데 한몫을 했다.



한국의 나비에 대한 외국인들의 연구 중 상당부분이 잘못돼 있다고 생각한 석주명은 종마다 개체변이의 범위를 밝혀서 잘못된 학명을 제거해 나갔다. 그는 전국 각지에서 채집된 방대한 나비 표본에서 날개의 형태, 무늬나 띠의 색채, 모양, 위치 등 다양한 형질의 변이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관찰했다.



배추흰나비를 한반도 각지에서 봄에서 가을까지 다양한 시기에 걸쳐 17만여 개체나 채집해 형질을 살핀 연구는 그 중에서 대표적이다. 그는 모든 개체의 앞날개의 길이를 mm단위로 측정해 분석하고, 최소 17mm에서 최대 34mm까지 크기 차이가 두배나 나는 것도 실제로는 평범한 개체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혔다.



이 연구로 인해 그동안 몸집의 크기, 날개의 형태, 무늬의 양상에 따라 다른 종, 아종, 이형이라고 보고된 20여개의 학명이 하나의 배추흰나비로 정리됐다.



석주명은 뱀눈무늬의 변이연구에서도 뱀눈무늬가 하나도 없는 것에서부터 많게는 12개가 있는 것까지, 그리고 무늬의 위치가 다른 68가지 타입의 나비가 모두 개체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혔다.



이로부터 그동안 크기나 무늬의 양상에 따라 아종으로 발표됐던 10여개의 학명이 학계에서 사라졌다. 20여년의 연구생활 동안 모두 75만여 개체에 달하는 방대한 표본을 조사했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연구에 의해 한국산 나비에 관한 동종이명(同種異名) 8백44개가 제거됨으로써 한국산 나비에 대한 분류학은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었다.



집념의 추적자



나비에 대한 석주명의 열의는 집념 그 자체였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중요한 나비가 발견되면 몇 시간이 걸려서라도 쫓아가 잡고 말았다. 한번은 지리산에 채집여행을 갔다가 팔랑나비과의 나비 한 마리를 발견했다.



한눈에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발견된 적이 없는 나비임을 알아챈 그는 나비를 뒤쫓기 시작했다. 길이가 4cm 정도밖에 안되는 그 작은 나비는 석주명에게 약이라도 올리듯이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날아가기를 반복하며 도망갔다. 나비만을 보면서 쫓아가는 바람에 수도 없이 넘어져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지만 그는 끈기 있게 나비를 쫓았다.



3시간이 넘는 추격전으로 기진맥진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될 무렵 석주명의 끈기에 지친 나비가 드디어 포충망 안으로 들어왔다. 말 그대로 피땀을 흘려서 잡은 나비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종임을 확인하는 순간 상처의 아픔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나중에 이 종은 '[지리산팔랑나비]'라는 우리 이름을 갖게됐고 지리산이 서식의 북방한계선으로 고쳐지게 됐다.



한국산 나비에 대해서는 석주명이 독보적인 권위를 확보하게 되자 영국에 본부를 둔 왕립 아시아학회의 한국지회는 그에게 한국산 나비에 관한 총목록을 작성해 출판할 것을 의뢰했다.



'A Synoni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 (조선산 접류 총목록)' 이 이때 정리된 책으로 한국산 나비 연구의 결정판이요, 각국의 학자에게 필수적인 참고도서가 됐다. 4백쪽이 넘는 분량에 영어로 된 이 책은 한국인의 저서로는 처음으로 영국왕립도서관에 소장됐으며 이로써 석주명은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올라섰다.



고운 나비, 고운 이름



30대 초반에 이미 세계적인 나비학자로 인정받으면서 석주명의 연구열은 더해 갔고 그는 연구시간을 벌기 위해 송도고보를 사직하고 경성제국대학의 촉탁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1년 정도 서울에서 연구하던 그는 1943년 경성제대 생약연구소 제주도 시험장에 파견을 자원했다. 그때까지 제주도는 채집여행이 쉽지 않아 그의 연구에서 취약지구였다. 그는 이 기회에 제주도 지역의 나비연구를 완성하기로 하고 모두가 꺼리는 벽지 근무를 자원했던 것이다.



제주도에 머무는 2년여 동안 그는 나비연구뿐만 아니라 제주도 방언연구에 힘을 쏟았다. 나비학자로서 언어학에 관심을 갖는 것이 외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 그의 방언연구는 나비연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제주 방언이 다른 지역 방언과 어떤 친연관계를 보이는가 하는 연구는 나비의 지역적 분포와 친연관계를 밝히는 것과 방법론상으로 똑 같았고 나비의 분포는 방언의 분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또 그의 말에 대한 관심은 훗날 아름다운 우리말 나비이름을 짓는데 큰 힘이 됐다.



석주명의 제주도 방언에 대한 연구는 제주도에 대한 연구로 확대되었고, 1949년부터'제주도 총서' 여섯 권으로 정리돼 나왔다. 오늘날 제주도의 생활상은 너무나 많이 달라져서 사투리를 완벽하게 채집하기란 불가능하다.



석주명의 방언연구는 제주도가 아직 육지의 영향을 많이 받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어서 제주도 사투리 연구뿐만 아니라 우리말과 고어, 동남아지역의 언어와의 관련성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우리말에 대한 그의 관심과 재능은 나비 이름을 짓는 데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지금 쓰이고 있는 나비 이름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재치있고 풍부한 감성을 지녔는지 알 수 있다. 굴뚝나비는 굴뚝처럼 까맣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봄처녀나비]는 봄에 금방 나왔다가 사라져서 처녀처럼 수줍음을 타는 것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 외 [수풀알락팔랑나비], [청띠신선나비], [모시나비], [풀흰나비], [어리표범나비] 등 우리말의 정감을 한껏 살린 고운 이름들이 모두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꽃 모르는 나비학자



석주명은 나비연구에서는 세계적인 학자였지만 결혼생활에서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삶의 모든 부분을 나비연구에 바친 그였으니 원만한지 못한 가정생활은 어찌 보면 피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중매로 맺어진 부인과는 처음부터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석주명은 고집이 세고 학문밖에 모르는 외골수였으며, 그의 부인은 활달한 성격의 자기 주장이 강한 신여성이었다. 당시 안정적인 봉급을 받고 시간 여유가 많은 교사는 배우자의 직업으로는 상당한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석주명은 수업 외의 모든 시간을 나비연구에 쏟았고, 많지 않은 월급에서 상당량을 경비로 지출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는 방문한 손님을 10분 이상 만나지 않았으며, 연구에 방해되지 않도록 서재의 문을 걸어 잠그고 서재와 안방을 연결하는 벨을 달아 볼 일이 있을 때만 벨을 눌렀다. 학교에서는 연구실과 교실 사이의 왕복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학교측에 요청해 자신이 맡은 학급을 연구실이 있던 박물관으로 옮기기까지 했다.



때문에 신혼 초기부터 숱한 부부싸움을 벌였고 결국 1년 동안의 재판을 거쳐 4년만에 파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미 국내외에 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그였기에 그의 이혼은 구설에 오르내렸고 신문은 '꽃 모르는 나비 학자'라며 연일 그의 사생활과 이혼에 이르는 과정을 낱낱이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목적을 위해서는 모든 걸 희생할 수도 있는 것이 학문의 세계"라는 그의 신념에서 본다면 결혼이든 무엇이든 학문에 방해되는 것은 모두 희생해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목숨까지도.



나비로 환생한 죽음



1950년 전쟁의 총성이 서울을 휘몰아 칠 때도 석주명은 연구실을 지키고 있었다. 그에게는 1938년부터 13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온 '한국산 접류의 분포 지도'가 출판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수십만 개의 나비 표본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과학박물관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그를 피해가지 않았다. 1950년 9월말에 집중된 서울시내의 폭격으로 과학박물관이 전소되고 그의 분신이었던 나비표본과 원고들이 한줌의 재로 변해버렸다. 10월 6일 폐허가 돼버린 과학박물관을 다시 세우기 위한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석주명은 시내에서 인민군으로 몰려 불의의 총격을 당하고 말았다.



80을 목표로 학문에만 정진했던 그의 생애가 겨우 마흔 둘에 접히고 만 것이다.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그가 죽음의 총성과 함께 남긴 최후의 한마디였다.



석주명이 죽은 후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긴 일본인 학자 시로즈(白水隆)는 그를 기려 흑백알락나비 아종의 학명을 Hestina japonica seoki로 지었고, 시바타니(柴谷篤弘)는 네발나비과에 Seokia라는 새로운 속(屬)을 설정해 홍줄나비의 학명을 Seokia pratti로 명명해 주었다. 석주명이 죽어서도 '석'(seoki, seokia)자가 붙은 나비와 함께 날아다닐 수 있기를 바랬던 것이다.



석주명의 오류



나비박사 석주명의 연구에서도 몇가지 오류가 있었다. 개체변이의 범위를 밝혀 동종이명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별개의 종인데도 동종이명으로 판정을 내린 것이 있다.



[물결나비]속의 나비들은 날개 뒷면의 무늬가 강이나 호수의 출렁이는 물결을 연상시키는데, 석주명은 석물결나비를 물결나비와 동일종으로 파악했으나 최근에 와서 두종이 확실히 구별되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석물결나비는 물결나비에 비해 수컷 앞날개 아랫면의 뱀눈무늬가 작고 둘레의 노랑색 고리는 폭이 좁으며 앞날개 아랫면 외연과 후연각을 따라 다갈색 넓은 띠가 발달하여 물결 무늬가 희미하다. 후학들이 석물결나비를 복원시키면서 석주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석'물결나비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 [큰줄흰나비]를 [줄흰나비]의 동종이명으로 보았으며 실제로 두 종은 매우 유사하여 구분하기 어려우나 별개의 종이다. 큰줄흰나비는 줄흰나비에 비해 일반적으로 크고 약간 각이 져 있으며, 앞날개 윗면의 검정무늬와 앞날개 아랫면 중실의 검정색 비늘에서 두 종이 차이가난다.



황오색나비를 [오색나비]의 개체변이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한 것도 석주명의 실책이었다. 전체적으로는 유사하지만 오색나비는 날개 윗면 중앙의 무늬가 흰색이며 뒷날개 윗면의 가운데 띠의 넓이가 황오색나비의 절반밖에 되지 않아 구별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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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만드는 똑똑한 독서 지도법


[1] 어릴 때 부터 책을 읽어주면 좋은 이유


▣ 다양한 자극을 통한 사고력 향상

아이가 어릴때 부터 엄마가 책을 읽어주면 아이는

엄마의 목소리나 몸짓, 눈에 비치는 그림과 글자등으로 부터 자극을 받게 된다. 그림과 글자의 형태가 다르고 여러가지 색깔이 잇다는

점을 알고, 엄마의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상황 판다도 하게 된다. 이야기를 들으며 기쁨과 슬픔등 정서적인 교감을 느끼게 되어 차츰

사고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
 

▣ 반복적인 이야기에 어휘력 발달

여러가지 책을 반복적으로 읽어주다보면 많은 단어를

듣게 되어 어휘력 발달이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말문이 트이기 시작할 무렵, 아이의 뜻밖으 표현에 깜짝 놀라기도 하는데 이는 우연히

들은 말이나 독서의 효과, 그만큼 독서 경험이 많은 아이는 그렇지 못한 아이보다 쉽게 말을 배우고 어휘력이 매우 풍부해 진다.


 

▣ 듣고 읽고 느낀점이 많아 표현력과 문장력 발달


엄마가 책속에서 등장하는 동물이나 인물의 목소리를

흉내내면서 읽어주다 보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그러한 모습을 배우게 된다. 따라서 아이는 손짓 발짓으로 자신으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해서

몸짓으로, 또는 말로 표현하는데 주저함이 없게 된다. 이러한 능력은 곧 자신감을 더하고 글로 표현하는 문장력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

많이 듣고 읽으면 문맥과 문장의 짜임새에 익숙해 지기 때문. 책을 잘 읽는 아이가 글을 잘쓰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 엄마의 목소리와 숨결, 눈길을 통해 정서적인 안정감


엄마가 책을 읽어주는 것은 글자와 그림을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아이는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와 눈길에서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직접 느끼는 계기가 되므로 이런 기회를 자주 경험한 아이일 수록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느낀다. 이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며   자신감 있게 행동하는 성격의 밑바탕이 된다.


[2] 독서 지도 기본 노하우


◎… 절대 하지 말아야할 기본 5 가지


1. 책을 읽어주면서 한자한자 가르치려

하지말것, 글씨를 가르치려는 욕심에 주력하다보면 아이는

책에 대한 거부감과 싫증을 느끼게 된다.

2. 음의 고조, 장단

없이 지루하고 따분하게 읽어주는 것은 NO! 내용에 따라

크게, 작게 소리에 강약을 주고 등장하는 인물이나 동물을 흉내내며 실감나게 읽어주면 아이는 더욱 흥미를 느끼게 된다.



3. 엄마의 눈높이에서 책을 고르고

강요하는 것은 금물. 아이가 고른 책에 토를 달거나

참견하지 말고 선택의 자유를 준다.

4. 아이가 책을

읽기를 싫어하고 산만하다고 조급해 하지 말자. 아이가

스스로 책을 찾아 읽을때 까지 기다려 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5. 아이가 아직 읽지도 않은 페이지를

넘기려 할 때는 제재하지 말자 아이는 그림을 볼뿐 아직

글을 읽는게 아니므로 호기심이 생기는 페이지에 더 관심을 갖기 때문이이다.


◎… 꼭 알아 두어야 할 기본 5 가지

1. 하루에 3가지 이상의 이야기를 소리내어

읽어주자. 어휘력, 사고력, 판단력은 물론 집중력과 문제

해결 능력까지 발달하게 된다.

2. 광고 전단지,

포장지. 표지판, 게시판, 포스터, 자동차 번호판 등도 좋은 읽을거리.아이가 흥미를 갖는다면 놓치지 말고 읽어주자

3. 가능하면 규칙적으로 같은 환경에서

읽어준다. 예를 들면 잠자기 전 침대에서, 아이의

책상에서, 점심식사 후 등 집안 분위기와 상황에 맞게 책 읽어주는 시간을 조절해도 좋다.

4. 책읽기는 일찍 시작할 수록

좋다. 어릴 때 부터 책 읽는 습관을 들인 아이는 이야기

할때 집중력돠 상상력도 풍부하다.

5. 눈맞춤은

필수. 말을 못하는 아이는 상대방의 소리와 표정, 눈빛

등으로 정서를 교감하는데, 눈 맞추기에 소홀하면 아이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관심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동화책 더 재미있게 읽어주는 방법

1. 리듬감 있게 읽어주기


아이들은 리듬감 있는 소리를 좋아하는 특성에

맞춰서 마치 노래를 부르듯 리듬감 있게 읽어주자.
 

2. 주인공 바꿔서 이야기 만들기


아이가 주인공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할 지를

물어본다.  상상력괴 깊이 있는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된다.


 

3. 좋은 구절 찾아 메모하거나 밑줄긋기


이런 과정에서 아이는 생각이 깊어지고 표현력도

좋아진다.
 

4. 책 읽고 난 후 내용을 정리해 이야기

하기

줄거리를 이야기 하게 한 후 그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될 지 상상해서  이야기 해본다.
 

5. 연기자 처럼 목소리와 표정에

변화주기

등장인물 들의 표정과 몸짓등을 재미있고 다양하게

연출해서 보여주면 아이는  호기심을 갖고 더 열심히 듣게 된다.


 

6. 친숙한 어투로 각색해서 읽어주기


글자를 그대로 읽기 보다는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듯

일어주면 효과적이다.  

올바른 독서법을 통해 아이들의 기본 논리력을 키우고 풍부한 상상력을 키워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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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말

정보의바다 2008. 2. 14. 09:33
갈대 (Reed) : 우수,고요,한적

개나리 (Lily) : 순결, 깨끗한 마음

거베라 (Barberton daisy) : 신비

과꽃 (Chrusanthemum) : 상실, 고상, 청초

군자란 (Kafir lily) : 고귀, 우아

극락조화 (Bird of paradise) : 신비, 영구불멸

글라디올러스 (Sword lily) : 승리, 밀회, 견고, 용기, 조심

금어초 (Snapdragon) : 오만, 탐욕, 욕망

금잔화 (Pot marigold) : 이별의 슬픔, 실망

기린초 (Crowm of thorns) : 기다림

꽃창포 (Japanise iris) : 우아한 심성



====================================



나팔꽃 : 덧없는 사랑의 굴레

나팔백합 (나리) : 순결,위엄,장엄

난초 (Iris, Orchid, Canna) : 청초한 아름다움

남오미자 : 재회

남천 (Heavenly bamboo) : 격정, 전화위복,좋은가정

납매 : 당신은 가련한 마음을 가졌어요

냉이 : 당신에게 모두를 맡깁니다

넓은잎 옥잠화 : 고요

네프로레피스 (Sword ferm) : 매혹

노간주나무 (Juniper) : 보호

노루귀 : 신뢰

노링붓꽃 : 소식

능소화 : 명예,영광



====================================



다알리아 (Garden dahila) : 화려하다

달맞이꽃 : 무언의 사랑,기다림

닭의 장풀 : 짧았던 즐거움, 그리운사이

담쟁이 덩굴 : 영원한 사랑

당아욱 : 모성애, 은혜

더덕 : 성실,감사

데이지 (True daisy) : 평화, 순진, 미인

덴드로비움 (Dendrobium) : 요란한 미인

도라지 (Ballon flower) : 상냥한 미소, 소망

동백 (Camelia) : 자랑, 겸손한 아름다움

동의나물 : 다가올 행복

드라세나 (Dracaena) : 약속을 실행함

들국화 (Aster) : 장애물, 상쾌

들나리 (Wild seariet lily) : 변하지 않는 사랑

들장미 (Japanese rose) : 주의깊다, 고독

등 : 환영, 사랑에 취하다

등골나물 : 망설임, 지각

등심붓꽃 : 풍부

딸기 : 순진함, 선견



====================================



라넌큘러스 : 빛나는 매력 광택

라일락 (Lilac) : 첫사랑의 정시, 젊은날의 초상

란타나 : 엄숙함

로단테 : 영원한 사랑

로벨리아 : 정숙, 겸손



====================================



마가목 : 조심, 신중

마거리트 : 사라진점

마취목 : 희생

마타리 : 미인

만병초 : 위엄, 장중

매발톱꽃 : 어리석음, 근심

매화 (Apricot) : 인내, 고귀

맨드라미 : 잘난 체하다, 사치

머위 : 공정한 판단을 내리다

메리골드 : 질투, 절망

모과나무 : 정열, 평범

모란, 목단 (Tree peony) : 부귀, 성실

목련 (Thurber's magonia) : 은혜, 존경, 자연에의 사랑

목서 : 겸손

목향 (Ternstronia japrica thunb) : 인정가

목화 : 우수

몬스테라 (Swiss cheese plant) : 괴기

무궁화 (Rose of sharon) : 일편단심

무스카리 : 실망, 실의

문주란 (Swamp lily) : 어디론가 멀리

물망초 : 나를 잊지 말아요

물봉선화 :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물옥잠 : 변하기 쉬운 사랑의 슬픔

민들레 (Traxacun) : 내사랑 그대에게



====================================



박태기나무 : 의혹, 배신, 불신감

박하 : 미덕, 온정

박하 : 미덕, 온정

밤나무 : 호사

밤안개 (Baby's breath) : 고운마음

배나무 : 정과 사랑

배롱나무 : 웅변

백일홍 (Zinnia) : 이별한 친구 생각

버베나 : 가정의 평화

범의귀 : 절실한 사랑

벗꽃 : 순결, 담백

베고니아 : 친절, 짝사랑

별꽃 : 밀회

별꽃 : 밀회

보춘화 : 소박한 마음

복수초 : 영원한 사랑

복숭아 나무 : 사랑의 노예, 좋은 성품

봉선화 :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부겐빌레아 : 정열

부용 : 미묘한 사랑

부처꽃 : 비애

분꽃 : 내향성

붓꽃 : 좋은 소식

뽕나무 : 함게 죽다

뿔남천 : 격한감정



====================================



사루비아 : 타는 마음, 정조

사철나무 : 변화없다

산당화 : 겸손, 단조

산사나무 : 유일한 연애,희망

산수유 : 호의에 기대한다

살구꽃 : 처녀의 수줍음,의혹

삼지구엽초 : 당신을 붙잡아두다

색비름 : 불노 장생

샐비어 : 지혜

생강 : 헛됨

샤프란 : 환희

서향 : 영광, 즐거움을 찾다

석류 : 전성, 원숙한 아름다움

석류나무 : 원숙하 아름다움

석산 : 슬퍼던 기억

석죽 : 평정, 무욕

설유화 : 애교, 명쾌한 승리

소나무 : 불노장수, 굳셈

소철 : 강한 사랑

수국 : 성남, 변덕스러움

수련 : 청순한 마음

수선화 : 신비, 자존심, 고결

수양버들 : 슬픈, 평화

스노플레이크 : 순결

스위트피 : 다정했던 추억, 작별

스타티스 : 변치않는 사랑

스토크 : 영원한 아름다움

스프링게리 : 항상 변함이 없다

시네라리아 : 쾌활, 항상 기쁨이 충만하다

시클라멘 : 수줍음, 내향성, 지나간 사랑

심비디움 : 화려한 삶

싸리 : 생각이 나요



====================================



아나니스 : 만족, 미래를 즐긴다

아네모네 : 허무한 사랑, 단념

아디언텀 : 애교있는 사람

아말릴리스 : 침묵, 겁쟁이

아스파라거스 : 한결같은 마음

아이리스 : 기쁜소식

아이비 : 행운이 함께하는 사랑

아자리아 : 첫사랑

안개꽃 : 고운 마음, 맑은 마음

안드리움 : 번뇌

알리움 : 끝없는 슬픔

얼룩엽난 : 거역

얼룩옥잠화 : 가인

엉겅퀴 : 독립, 고독한 사랑

연꽃 : 순결, 군자, 신성, 청정

연산홍 : 첫사랑

엽란 : 거역, 거절

오엽송 : 강건

옥잠화 : 침착, 조용한 사랑

온시디움 : 순바한 마음

용담초 : 애수

용수초 : 온순

은사철 : 슬기로운 생각

잎세란 : 참신하다



====================================



자목련 (Lily magnolia) : 자연에의 사랑

자스민 (Jasmint) : 행복, 친절, 상냥

자작나무 (Birch) : 님 기다림

작약 (Chinese paeony) : 부끄러움, 교태

장미 (Rose) : 적색, 열렬한 사랑

제라늄 : 결심.안락.애정

제비꽃 (Violet) : 성실, 나를 생각해 주세요

제비꽃 : 성실.겸손.사랑

제비붓꽃 : 행운이오다

제피란더스 : 맑은사랑

조팝나무 (Meadow sweet) : 노력하다

주목나무 (Japanese yew) : 비애, 죽음, 명예

지니아(백일홍) : 멀리 떠나간 친구를 생각하다

진달래 (Azaleas) : 신념, 청념, 절제



====================================



창포 (Sweet flag) : 우아

채송화 (Rose moss) : 수련, 가련

천리향 (노베라 : Winter daphne) : 편애

철쭉 (Royal azatea) : 사랑의 즐거움

치자나무 (Cape jasmine) : 순결, 행복, 청결



====================================



카네이션 (Carnation) : 모정, 사랑, 감사

카라 (Calla) : 환희, 청결, 순결

카틀레야 : 우아한 여성

칸나 (Fowering canna) : 존경, 망상, 의혹

캄파눌라 : 감사

코스모스 (Cosmos) : 순정, 애정

콜레우스 : 절망적인 사랑

콜키쿰 : 가장 좋은 때는 지나갔다

크로바 (Clover) : 약속, 행운, 평화

크로커스 : (샤프란) 청춘의 기쁨, 환희, 절망

크리스마스 로즈 : 내마음을 달래 주오

큰달맞이꽃 : 말없는 사랑

클레마티스 : 정신적인 아름다움, 고결



====================================



타래붓꽃 : 나를 인정해주오

털머위 : 다시 발견한 사랑

토끼풀 : 행복, 약속, 나를 생각해주오

튜울립 (Tulip) : 사랑의 고백, 매혹



====================================



팜파스그라스 (Pampas grass) : 자랑스럽다, 응대

패랭이꽃 : 여성미

팬지 (Pansy) : 나를 생각해 주세요

포인세티아 (Poinsettia) : 축복하다, 박애

풍란 (Meofinetia falcata ltu) : 신념, 진정한 매력

프리뮬러 : 부귀, 자만



====================================



할미꽃 (Pasque flower) : 슬픈 추억, 충성

함박꽃 (Chinese peonye) : 수줍음, 분노

해당화(Hall crab) : 온화, 원망

해바라기 (Sunflower) : 숭배, 기다림

향나무 (Chinese juniper) : 영원한 향기

호접란 (Moth orchid) : 당신을 사랑한다

후리지아 (Freesia) : 청향, 우정, 전진

휘닉스야자 (Pimy date palm) : 유희, 운동

히야신스 (Hyachinth) : 추억, 운동,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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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모하비 사막에 보관중인 항공기들)

비행기의 무덤 모하비(Mojave) 사막을 아시나요?


미국 켈리포니아에 모하비 사막이 있다.


이곳은 영화 촬영지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항공기의 무덤으로도 유명하다.


미국은 물론 전세계에서 운항되던 항공기와 폐기처분된 항공기 등을 모아놓은곳으로 유명하다.


모하비 사막에 항공기를 모아둔 계기는 1969년 후반 월남전이 끝나면서 미국정부는 폐기 처분할

항공기와 임시 보관할 할 장소가 필요했다.


미국정부는 특히 유사시를 대비해 항공기가 부식하지 않고, 50년 이상 보존이 가능한 지역을 찾다

보니 1년 내내 강우량이 100mm이하로 건조한 기후의 켈리포니아 지역의 모하비 사막을 최적의

항공기 보관 장소로  선택했다.


이곳 모하비 사막에는 세계의 모든 기종의 항공기가 그대로 방치가 돼 있는데 이가운데 쓸모가 있는 비행기의 경우 다시 새주인을 찾아 취항을 할수 있으며 그렇지 않는 경우 위탁 처분을 통해

부품의 일부가 재활용 되거나 혹은 버려진다.  


모하비에 항공기를 모아 놓기 이전에는 항공기를 재사용하기위해 일부 부품을 떼어내서 녹이는등

다시 제련을 했지만 자원이 풍부해지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항공부품 소재를 재생하는것 보다

생산하는 가격이 싸지면서 결국 항공사들과 미국 정부는 항공기를 폐기처분 하지않고 모아

두게됐다.


그래서 오늘날 미국의 모하비 사막에는 약 9천여대의 항공기가 보관 혹은 폐기된 상태로 있다.


과연 비행기의 무덤이라 할만큼 큰 활주로와 공항 시설 그리고 영화 촬영장이 있는 모하비 사막은 항공인들에게는 새로운 교육 장소 및 관광장소로 인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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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재생 부품을 재활용하기위해 분해되는 비행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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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항공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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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9.11. 테러의 여파로 파산한 항공회사가 보관중인 20대의 F-100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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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모하비 사막의 격납고와 활주로 그리고 부품 재활용 창고들, 세계 1위의 규모를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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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비 사막에 버려인 영국 버진아틀란틱 항공 소속 747 점보 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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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군이 폐기 처분한 70년대의 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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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홀, 화이트홀, 웜홀 상상도 >


블랙홀(Black Hole), 화이트홀(White Hole), 웜홀(Worm Hole)이란?

I. 블랙홀(Black Hole)


1. 블랙홀의 역사

    1) 1783년 미첼(영) : 질량주변에서 빛이 휠 수 있고, 빛이 탈출할 수 없게 하는 천체가 존재함.

        (수년 뒤 라플라스도 비슷한 제안을 함)

    2) 20세기초 아인슈타인(독) : 상대성 이론에서 빛이 중력에 의해 휨을 증명함

        (이론뿐만아니라 실험적으로도 증명됨)

    3) 1969년 휠러(영) : "블랙홀" 이라는 명칭을 만듦

    4) 1974년 스티븐 호킹(영) : Black Hole도 다른 천체처럼 빛을 낼 수 있다고 발표함


2. 블랙홀이란 ?


1) 정의


모든 물질 사이에는 서로 잡아당기는 힘, 즉 중력이 작용하고 있다.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은 물질이 있으면 그 주위의 공간이 휘어지며, 그 휘어짐 자체가 바로 중력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해석하였다.


그것은 마치 팽팽한 고무 시트 위에 무거운 물체를 올려놓았을 때와 같은 상황이다. 고무 시트는 무거운 물체 때문에 깊이 가라앉은 상태가 된다. 여기에다 다른 물체를 얹어 놓으면, 그 물체는 자연히 깊이 가라앉은 중심의 물체를 향해 떨어져 내려간다. 이렇게 깊이 빠진 바닥에서 나오려면 어느 정도 이상의 속도를 지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중에 에너지가 없어지는 바람에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게 된다.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최저의 속도를 "탈출 속도"라 한다. 가라앉은 깊이가 지나치게 커지면 탈출 속도가 광속도를 넘게 된다. 그러나 모든 물체는 빛보다 빨리 움직일 수가 없으므로 이 깊은 수렁에서는 이제 어떤 것도 빠져 나올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상태가 바로 "블랙홀"이며, 물체가 빨려들어갑니다. 빨려들어간 물체는 웜홀을 지나 화이트홀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떄까지 물체가 그 모양을 유지한다면 말이죠. 중력이 무한대이므로 거의 원자정도의 크기로...)


한마디로 블랙홀이 빨아들이기만 한다면 에너지보존법칙에 위배되므로, 블랙홀과 연결되어있는 화이트홀에서 나올 것으로 가정한 것이다. (과학자들은 웜홀을 지나 화이트홀로 나오면 다른 우주와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2) 블랙홀의 존재이론

블랙홀은 1783년 이미 영국의 미첼이 질량 주변에서 빛이 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논했고,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의 의해 그 존재를 밝히고 있다.

1915년 아인슈타인은 뉴턴 역학의 모순을 해결한 일반상대성이론을 제창하였다.
뉴턴 역학에서는 중력을 힘의 크기와 방향으로 나타내는 데 비해 일반 상대성이론에서는 중력을 4차원 시공의 기하학구조의 왜곡으로써 나타내고 있다.


뉴턴 이후의 물리학에서는 물질 시간공간은 서로 무관한 존재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의 개념을 바탕으로 이들 모순을 완전히 해결하였다.


즉, 물질이 있으면 반드시 중력이 작용하며 또 중력에 의해 시간과 공간이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간과 공간과 중력을 통일한 하나의 이론을 확립하였다.

1916년, 독일의 수학자 슈바르츠실트는 구면 대칭인 진공상태에 일반상대성이론을 적용시켜 아인슈타인의 중력장 방정식의 해를 처음 발견하였다. 이것을 슈바르츠실트의 해라하며, 그 구면 의 반지름을 슈바르츠실트의 반지름이라 한다. 이 해의 성질은 다음과 같다.


슈바르츠실트 반지름 보다 안쪽에서는 빛마저도 밖으로 나올 수 없으며, 중심에는 중력이나 밀도가 무한대가 되는 "특이점"이 나타난다.
특히 빛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면을 "사상의 지평면"이라 한다.

아인슈타인은 슈바르츠실트의 해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점이면서도 밀도나 중력이 무한대 가 되어, 물리법칙을 적용시킬 수 없는 특이점의 존재가 유도되기 때문이었다.
같은 무렵, 독일 의 수학자 바일은 비뚤어진 구면에 중력장 방정식을 적용하여 역시 특이점이 있는 제2의 해를 찾아냈다.


그러나 이들 해에 대응하는 물리현상이 실제로 존재하리라고는 당시는 아무도 믿지 않았으며, 다만 이것은 수학 상의 문제로서만 취급되었다.

1939년 미국의 이론 물리학자인 오펜하우머는 매우 무거운 별이 계속 수축해 들어가면 중성자로만 구성된 별이 된다고 예언하였다.
그리고, 특히 무거운 중성자 덩어리는 더욱 수축하여 마침내 한 점으로 집중하게 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증명하였다.



3) 블랙홀의 형성

별이 공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중력과 압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압력에는 한계가 있으나 중력은 무한히 강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중력이 매우 강한 별은 힘의 균형이 깨져, 결국 중력 붕괴를 일으키면서 수축을 계속하게 되고 마지막에는 한 점으로 집중하게 된다.


이 점은 밀도나 중력의 세기가 모두 무한대인 특이점이다. 이 중력 붕괴의 과정에서는 강한 중력에 의해 공간은 변형되며, 시간의 흐름은 늦어진다. 또한 별의 표면에 서 방출되는 빛의 파장은 길어져서 적색 이동을 하게 된다.
별의 반지름이 슈바르츠실트의 반지름에 도달하면 빛의 파장은 무한대가 되어, 결국 관측 불능이 된다.
별의 반지름이 슈바르츠실트의 안쪽은 바깥쪽과 매우 다른 양상을 나타낸다.

별이 슈바르츠실트 반지름 보다 작게 수축되면, 별의 표면에서 나온 빛은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의 바깥쪽에는 도달할 수 없게 된다.
외부에서는 물질이나 빛이 자유로이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내부에서는 빛조차도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사상의 지평면"이 생긴다.
이 사상의 지평면보다 안쪽을 블랙홀이라 한다.

또한 이 사상의 지평면의 안과 밖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가 달라진다.
사상의 지평면 밖의 시간은 미래를 향해 달릴 뿐 멈추거나 과거로 향하게 할 수는 없다.

한편 블랙홀의 내부에서는 모든 것이 특이점을 향해 진행할 뿐 특이점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특이점으로부터의 거리(공간)가 시간의 역할을 하게 된다.

블랙홀이 회전할 경우 중력은 시간과 공간을, 중심으로 강제로 끌어들일 뿐 만 아니라, 회전축의 방향으로도 강제로 끌고 다니게 된다.
회전하는 블랙홀의 주위에는 끌고 다니는 속도가 광속을 능가하는 에르고 영역이 나타난다.

이 영역에서는 블랙홀의 회전과 반대 방향으로 빛을 방출하여도 빛은 그 방향으로 진행할 수가 없다.
시공은 시간 1차원, 공간 3차원의 4 차원적인 존재인데, 여기서는 적도면의 단면을 고려하여 공간의 2차원 변화 모습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표시하고 있다.

청색초거성 단계에 있는 거대 질량의 별의 공간은 일그러짐이 없이 평탄하다.
그 청색 거성이 중력을 견디다 못해 급격하게 수축을 시작할 때, 수축 속도는 중심부가 가장 빠르다.
중심부에는 대질량이 집중하기 때문에 중력이 강해져 공간은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수축이 한없이 계속되면서 질량도 보다 작은 영역으로 집중하게 되므로, 공간의 일그러짐도 커진다.

공간이 충분히 일그러지면'사상의 지평면이 발생하는데 그 안쪽에서는 공간이 초광속으로 중심을 향하여 낙하하기 때문에, 빛은 외부에 도달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하여 매우 일그러진 공간 상태인 블랙홀이 형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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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블랙홀의 특징


물체를 극한까지 압축시키면 어떠한 질량의 물체라도 블랙홀이 된다. 예를 들어 태양을 반지름 3㎞가량, 지구를 반지름 1㎝ 가량으로 압축시키면 가가 블랙홀이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질량이 태양의 수십 배 이상인 별만이 블랙홀이 될 수 있다.

별의 중심에서는 핵융합 반응에 의해 엄청난 양의 열이 만들어진다.
이 열에 의한 팽창력과 별 자체의 중력에 의한 수축력이 평형을 이 룸으로써 별은 일정한 모습을 유지한다.


그러나 핵연료를 다 써 버리면 별은 중력 때문에 수축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별의 최후이다. 질량이 태양과 비슷한 별에서는 원자와 원자가 빈틈없이 메 꾸어지는 단계에서 수축이 멈춘다. 이런 상태까지 수축한 별이 "백색왜성"이다. 그러나 질량이 태양의 10배 가량인 별에서는 "초신성폭발"을 일으키는 바람에 대부분의 구성 물질이 날아가고 중심에 "중성자별"이 형성된다.

중성자별은 백색왜성 보다 더욱, 다시 말해 원자핵끼리 맞닿을 정도까지 수축한 별이다. 반지름은 대개 10㎞까지 수축하게 된다.
그러나 중성자별도 태양 질량의 3배 이상을 지탱하지는 못한다. 질량이 태양의 수십 배 이상인 별이 초신성 폭발을 일으키면, 바깥 부분의 물질이 날아간 수 그 중심에는 태양 질량의 3배 이상인 핵이 남는다. 이것이 블랙홀이 된다.


블랙홀에서는 빛도 빠져 나오지 못하므로 블랙홀 자체를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블랙홀을 찾아 낼 것인가? 블랙홀의 특징은 질량은 크지만 덩치가 작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천체를 찾는데 에는 X선 관측이 적합하다.

밤하늘에 보이는 별들은 절반쯤이 두 별이 서로의 주위를 도 는 "연성"이다. 블랙홀이나 중성자별처럼 작은 크기로 수축된 천체가 보통의 별과 연성을 이루고 있으면, 보통의 별에서 수축된 천체로 물질이 흘러 들어가게 된다. 이 물질은 수축된 천체를 중심으로 하여 소용돌이치는 "애크리션 디스크"(블랙홀이 보통의 별과 연성을 형성하고 있으면, 상대 방 별의 가스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빨려 들어간 가스는 블랙홀의 주위에 디스크와 같은 모 양의 가스 구름을 형성한다.)를 형성한다.

애크리션 디스크 안의 물질은 서로 마찰되어 뜨거워지는데, 블랙홀이나 중성자별 근처에서는 1000만℃ 가지 가열되어 X선이 방출된다.
애크리션 디스크의 온도는 중심 천체가 어느 정도로 수축하였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또한 X선으로 밝게 빛나는 연성의 대부분은 애크리션 디스크의 중심에 블랙홀이나 중성자별이 있다고 생각해도 된다.
밝은 X선 연성 등에서 블랙홀과 중성자별을 구별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 X선을 방출하고 있는 천체의 질량을 구하면 된다.
만일 그 천체의 질량이 태양 질량의 3배 이상이라면 블랙홀로 볼 수 있다.
질량이 태양의 3배 이상이고 거의 블랙홀일 것으로 인정되고 있는 X선 연성은 "백조자리 X-1"을 비롯하여 이제까지 넷이 알려져 있다.

1) 거대 질량인 별의 마지막 모습은 블랙홀이다.
2) 블랙홀은 도는 가스 원반이다.
3) 블랙홀은 화이트 홀과 웜홀의 존재를 예견한다.
4) 블랙홀은 세 가지 물리량 밖에 없는 단순한 천체이다.
5) 블랙홀은 계속 자라다 결국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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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스티븐 호킹 교수가 블랙홀 이론을 뒤집는... "블랙홀은 그다지 검지 않다."는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그 동안 주위의 모든 물질을 잡아먹기만 하는 블랙홀이 "복사 형태로 에너지를 밖으로 방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흑체복사와도 비슷한데, 흑체복사란 일정한 에너지를 흡수하여 특정 온도가 되었을 때,

 복사의 형태로 전자기파를 흡수하여 특정 온도가 되었을 때 복사의 형태로 전자기파를 방출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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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화이트홀(White 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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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홀 상상도 >


블랙홀은 밀도도 중력의 세기도 무한대인 `특이점(特異點, Singular point)'과, 그 주위의 `사상의 지평면(事象-地平面, Event horizon)'으로 형성된다. 사상의 지평면은 안쪽으로 들어가면 모든 것이 탈출할 수 없게 되는 영역의 경계면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는 빛보다 빨리 진행하는 물질은 없다.


가령 블랙홀의 중력이 엄청나게 강하여 빛도 거기서 탈출할 수 없다면, 다른 물질 역시 거기서 탈출할 수 없다. 블랙홀의 내부로 들어간 물질은 영구히 거기에 갇히게 된다.


그렇다면 모든 물질이 그 곳으로 들어가 버리는 특이점이란 과연 어떠한 곳인가?

그 곳은 어떠한 방정식도 의미가 없고, 어떠한 물리의 법칙도 전혀 통용되지 않는 세계이다.

특이점으로 들어가 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현재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많은 천체는 회전하고 있다. 블랙홀도 회전하고 있는 것이 있다. 회전하는 블랙 홀의 안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알아보자. 회전하고 있는 블랙홀 주위의 공간은 일그러지고, 블랙홀 바깥쪽에 '에르고 영역(Ergo Sphere)'이라고 불리는 공간 영역이 발생한다. 에르고 영역 안에서는 공간 자체가 광속 이상의 속도로 블랙홀에 이끌려서 돌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운동을 하여도 블랙홀이 도는 방향으로 끌려가게 된다.


회전의 또 하나의 효과는 블랙홀의 표면인 사상의 지평면의 내부에 또 다른 하나의 지평면이 나타나는 일이다. 이것을 '내부 지평면'이라고 부른다. 바깥쪽의 지평면으로 들어간 물체는 반드시 안을 향해 끌려가게 되는데, 내부 지평면보다 안쪽에는 큰 원심력이 작용하고 있어서 그 안으로 들어간 물체는 반드시 중심 방향으로 낙하하지 않고 운동할 수 있다.


단 내부 지평면의 밖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내부 지평면 안에서의 특이점은 고리 모양으로 분포한다. 이 내부 지평면의 안쪽 영역은 다른 우주로 가는 통로로 되어 있다. 다른 우주에서는 블랙홀이 아니라 '화이트홀(White Hole)'로 나타난다. 화이트홀이란 블랙홀과는 정반대로 그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반드시 바깥 세계로 밀려 나가게 되는 시공간의 영역이다.


따라서 내부 지평면 안으로 들어간 물체는 잠시 거기 머문 다음 급히 내부 지평면 밖으로, 그리고 화이트홀 밖으로 내던져지게 된다. 그 곳은 이전과는 다른 우주이다. 단 내부 지평면이 안정하게 존재하는지의 여부는 알지 못하고 있는데, 많은 연구자는 불안정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가 되었다고 해도 순식간에 그 문을 닫아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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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홀


화이트홀은 블랙홀을 시간적으로 뒤집은 것이다. 웜홀을 중심에 두고 볼 때 화이트홀은 블랙홀과 반대쪽에 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화이트홀의 수명이 매우 짧은 것을 알아냈다. 즉 화이트홀에서는 물체(빛)의 에너지가 급격히 증가해 순식간에 블랙홀로 바뀐다는 것이다. 만약 태양만한 화이트홀이 있다면 그 수명은 1만분의 1초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다시말해서 블랙홀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블랙홀을 시간반전해서 블랙홀로 빨려들어간 천체들이 다시 빠져나오는 것이 화이트 홀이다. 사실 화이트 홀이 존재하는지는 알수없지만 만약 화이트홀이 존재한다면 그곳으로부터 빛의 속도로 가스와 천체등의 물질이 튀어나오는 것이 보일 것이다.


블랙 홀과 같이 모든 것을 흡수하는 세계가 있으면, 반드시 그 반대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일반 상대성 이론은 유도하고 있다. 다시 말해 물질이 그 내부로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모든 물체를 방출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화이트 홀(White hale)이라고 한다.


그러나 화이트 홀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블랙 홀의 명명자 휠러는, 블랙 홀과 화이트 홀의 사상의 지평선 내부를 잘라내고, 그 나머지를 연결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생각했다. 이렇게 하면, 블랙 홀에 흡입된 물질은 화이트 홀에서 방출된다. 이 때 블랙 홀의 흡입구가 있는 세계와 화이트 홀의 방출구가 있는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이다.



III. 웜홀(Worm Hole)


이 두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를 웜홀(Warm hole, 슈바르츠실트의 목, 아인슈타인-로젠의 다리)이라고 명명하였다. 웜홀은 말 그대로 시공의 벌레 먹은 구멍이라는 뜻이다.


최근에는, 우주의 탄생을 기술하는 대통일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을 연결함으로서 어미 우주에서 딸 우주로, 딸 우주에서 손자 우주가 탄생된다는 다중 우주 발생의 개념이 클로즈 업되고 있다. 그리고, 다중 우주가 발생한다면 이들 우주를 연결하는 빠져 나갈 통로로서 웜홀이 자연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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웜홀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웜홀


우주에는 중력에 의해 만들어진 세개의 구멍이 있다. 블랙홀(검은 구멍), 웜홀(벌레 구멍), 화이트홀(흰 구멍)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블랙홀을 제외한 나머지 두 구멍은 매우 불안정해 생겼다가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웜홀은 우리 우주와 다른 우주를 블랙홀이 연결하면서 생겨난다. 이 때문에 웜홀은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지름길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985년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접촉'(Contact) 이란 소설을 쓰면서 물리학자인 킵 손에게 우주여행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웜홀은 이때 손이 제안했던 우주여행의 지름길이다. 손이 제안한 웜홀은 입구가 회전하지 않는 블랙홀과 비슷하다. 그러나 사건의 지평선이 없으며, 들어가기도 하지만 나올 수 있다는 점이 블랙홀과 다르다. 그래서 시간여행이 용이하다.


웜홀을 창안했던 손은 웜홀이 매우 불안정해서 우주여행을 하기에 불편한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웜홀에다 반중력을 보완했다. 웜홀의 두 입구가 열리고 안정된 터널을 이루고 있기 위해서 웜홀 벽을 밀고 있는 매우 특별한 물질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물질은 중력과 반대인 성질, 즉 모든 것을 밀어내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 반중력 물질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순식간에 블랙홀로 변하는 화이트홀


화이트홀은 블랙홀을 시간적으로 뒤집은 것이다. 웜홀을 중심에 두고 볼 때 화이트홀은 블랙홀과 반대쪽에 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화이트홀의 수명이 매우 짧은 것을 알아냈다. 즉 화이트홀에서는 물체(빛)의 에너지가 급격히 증가해 순식간에 블랙홀로 바뀐다는 것이다. 만약 태양만한 화이트홀이 있다면 그 수명은 1만분의 1초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웜홀은 두 우주를 연결하는 지름길이다. 그들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공간은 굽힐 수 있기 때문에 실제거리가 얼마이든 웜홀의 길이는 일정할 수 있다. 그래서 빛의 속도로 우주여행을 하는 것보다 빨리 웜홀을 통해 공간을 이동할 수 있다. 이 말은 시간여행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는 38만4천km이지만 1m의 웜홀이 생기면 한발짝만 옮기면 달에 갈 수도 있다.

지구에서 시리우스까지는 8광년이나, 1m의 웜홀이 생긴다면 굳이 빛의 속도로 8년씩 걸려 갈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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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가

정보의바다 2008. 2. 14. 09:33
에드워드 엘가는 영국 서남부 우스터 근처의 브로드히스에서 태어났다. 영국의 전형적인 시골이라 할 브로드히스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엘가의 삶과 음악 전체를 지배했다. 엘가의 아버지는 피아노 조율사이며 악기점 주인이기도 했는데 나중엔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를 지낼 만큼 음악적인 재능도 갖추고 있었던 듯하다. 에드워드 엘가는 네 번째 아이로 태어났으나 첫째가 15살에 성홍열로 죽었으므로 위로 두명의 누나를 두고 에드워드는 장남이 되었다. 그의 아래로는 음악적인 천재로 알려진 동생이 어려서 죽고, 후에 아버지의 가게를 물려받는 남동생과 도미니크 교단의 수녀가 되는 여동생이 더 있었다.어린 시절의 엘가는 예술적인 감각과 관심이 있긴 해도 음악적인 특출난 천재는 아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평화스러운 시골에서 엘가의 재능은 평범한듯 두드러지지 않게 발전해갔다.



엘가의 교육은 사실상 그의 나이 15살때 끝났다. 소년 엘가는 스스로 만들어낸 대본으로 가족들과 연극을 꾸미고, 습작에 불과하긴 해도 작곡이란 것에 관심을 갖고 틈틈히 시도해보길 쉬지 않았다. 그러나 음악은 거의 독학으로 익혔다. 아버지 가게안의 악기는 모두 다루어봤고 특히 바이올린 연주에 뛰어났다. 카톨릭 계통의 지방 학교가 엘가의 음악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음을 생각할 때 그의 아버지와 그의 가게는 음악의 길을 열어주는 유일한 출구였던 셈이다.


단, 바이올린에 한해서 그는 우스터와 런던의 선생에게서 정식으로 레슨을 받은 기록이 남아 있다.15살이 되면서 엘가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라이프치히에서 음악공부를 계속하려는 계획도 있었지만 그의 집안형편이 그것을 허락치 않았던 것이다. 어린 시절의 엘가는 무엇이든 대단하고 유명한 인물이 되고 말겠다는 꿈이 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겉봉에 아무런 주소를 쓰지 않아도 자신의 이름 하나면 우편물을 받을 수 있도록. 이 순진한 꿈은 아주 먼 훗날에 이루어지긴 했으나 그러기까지 엘가는 신념이 흔들리기에 충분한 무명의 시대를 거쳐야 했다.



엘가의 이름이 작곡가로서 처음 널리 알려지게 되는 것은 그의 나이 42살 때 <수수께끼 변주곡>을 발표하면서 부터다. 작품이 완성된 1899년 런던에서 이 곡을 초연했던 한스 리히터(Hans Richter)로부터, 바인가르트너 · 니키쉬 · 쉬타인바흐 · 토스카니니 · 쉬트라우스 · 말러 등 내노라하는 지휘자들의 연주 프로그램에 <수수께끼 변주곡>이 빠지지 않았던 기록이 말해주듯, 엘가의 성공은 이제 의심할 수 없기 확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공한 음악가로 자리잡은 이후에도 종종 사로잡혔던 지나친 자의식과 음악가로서의 갈등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비전 속에 있던 젊은 엘가를 수없이 괴롭히곤 했다. 엘가가 만일 자신의 음악성에 대해, 혹은 세상에 대해 가졌던 그 많은 갈등에만 사로잡혀 있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엘가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지나친 자의식으로부터 그를 해방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엘가의 아내 캐롤라인 앨리스 로버츠(Caroline Alice Roberts)였다.위대한 인물의 생애에서 우리는 종종 그 인물을 위대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또다른 "위대한 인물"을 만나곤 한다. 엘가의 아내 앨리스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엘가는 이 평생의 연인을 그의 나이 29살때 처음 만났다. 야심에 찬 시골 작곡가인 엘가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온 앨리스는, 엘가와는 사회적 계층부터가 다른 육군소장이며 기사 가문의 딸로서 그보다 9살이 더 많았다. 소설과 시에 재능을 지녔고 독일어를 알았던 앨리스는 교회 합창대에 속해 있었다. 피아노 연주 솜씨는 보통 정도였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처음부터 엘가의 소심하고 어두운 심성, 예민한 성격을 간파하고 그를 사랑했다는 점이다. 1889년 5월에 그들은 결혼했다.



<수수께끼 변주곡>을 포함해서 엘가 의 중요한 작품들은 거의 모두가 앨리스와의 결혼생활 중에 작곡되었다. "브라우트(Braut, 엘가가 붙여준 앨리스의 애칭)가 이 곡을 만드는 데에 준 도움은 정말 막대하답니다"엘가가 그의 아내에게 공을 돌리는 이러한 말은 편지를 비롯한 다양한 기록의 도처에서 발견된다. 엘가가 그의 아내에게 얼마나 절대적인 힘을 얻고 있었는가는 앨리스가 세상을 뜬 후 말년의 15년간 그가 이렇다할 작품을 쓰지 못했다는 사실이 입증하고 있다. 결혼 전 엘가는 짧은 곡들을 재빠르게 써내곤 했다. 그의 작곡 스타일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때의 엘가에겐 큰 규모로 곡을 확대시킬 능력이 없는 듯 했다. 엘가 최초의 중요한 작품 <프로와사르>(Froissart)서곡은 결혼 1년만에 작곡되었다. 소나타 형식의 이 서곡엔 아직 엘가가 좋아하고 자주 썼던 "품위있게"(nobilmente)라는 지시어는 나오지 않지만, 초기작품의 특징인 재치있는 멜로디와 리듬은 높은 수준을 보인다.엘가의 초기 창작기라 할 1890년대에 엘가의 에너지는 거의 성악곡 작곡에 바쳐졌다.



칸타타 <흑기사>(The Black Knight), 오라토리오 <생명의 빛>(The Light of Life), 극적 칸타타 <올라프 왕> (King Olaf) 등, 주제의 선택에 있어서나 곡의 진행에 있어서 엘가의 특징이 자리를 잡아가는 작품들이 이무렵에 쓰여졌다. 그러나 엘가의 진정한 목표는 성악곡이 아닌 대규모 관현악 작품을 쓰는 데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또 영국의 합창단이 즐겨 레퍼토리로 택하는 성악곡의 작곡자로서 엘가의 이름은 서서히 알려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엘가는 만족감 내지는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오케스트라를 위한 오리지널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엘가에게 있어서 중요한 획을 긋는 작품이 되었다. "수수께끼"(Enigma)로 얘기되는 곡의 주제는 그동안 수많은 설명과 추측을 거쳐, 이제는 작곡자 자신의 초상과 창조적인 예술가의 고독감을 그린 것이라는 설이 일반화되어 있다. 작품에서 장조와 단조의 대비는 작곡자의 내면과 외향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감춰진 주제가 진정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엘가는 작품을 구성하는 14개의 변주에 가까운 사람들의 이름을 붙여 헌정했다. 거기에는 엘가와 함께 실내악을 연주하곤 했던 피아니스트의 이름도 있고, 지방의 지주나 엘가를 찬미했던 젊은 아가씨의 이름도 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로 첫번째 변주곡은 아내 앨리스를 위해서, 마지막 변주곡은 엘가 자신을 위해서였다.



<수수께끼 변주곡>이 작곡가로서 엘가의 이름을 최초로 널리 알린 작품이었다면, 1900년에 발표된 엘가 최고의 성악 걸작 <제론티우스의 꿈>(The Dream of Gerontius)은 그 명성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든 작품이라 할 것이다.뉴만 추기경의 시를 토대로 쓴 오라토리오 <제론티우스의 꿈>은 죽음을 맞은 한 노인이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되기까지의 신비롭고 극적인 내용으로 짜여지지만, 어쩔 수 없이 작곡가 내면의 갈등을 표출시키고 있다. 확고한 신앙과 특정 사회계층의 소속감을 가질 수 없었던 엘가였던 만큼 작품의 전반을 지배하는 절망감과 의심은 그대로 작곡가 자신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론은 긍정적인 쪽이어서 후반부에서 우리는 내세에 대한 비전을 보게 된다.제론티우스의 꿈>은 당연히 신학적인 면보다는 예술적인 면을 중시해야 할 작품이다. 그렇긴 해도 인간의 원죄설등에 강한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엘가의 작품은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것이 틀림없었다. 리하르트 쉬트라우스가 엘가를 "영국 최초의 진보주의자"로 극찬한 것은 바로 <제론티우스의 꿈>이 독일 초연된 때였다. 의심하고, 갈등을 겪고, 자주 세계로부터 소외의식을 느꼈던 엘가가 지극히 공적이고 대중적인 작품들도 다수 남기고 있다는 사실은 언뜻 모순처럼 보인다. 이런 느낌은 비단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던지, 엘가는 대중적인 작품을 쓰는 일이 자신의 소신과 어긋나지 않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음악으로 행사를 축하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음악을 선사했다. 그것이 잘못일까. 사람들이 뭔가 자극이 될 것을 원할 때 아무에게도 호소력이 없는 푸가 따위를 작곡해서 무엇할 것인가"



엘가가 쓴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인 작품은 아무래도 <위풍당당 행진곡>(Pomp and Circumstance Marches)일 것이다. 모두 5곡으로 구성되는 이 행진곡집에서 가장 유명한 제 1번은 후에 가사를 붙여 <희망과 영광의 나라>로도 불려졌다. "일생에 단 한번 나올 수 있는 곡"이라 자부했던 이 행진곡을 엘가는 사실 교향곡의 멜로디로 쓸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 행진곡으로 사용하려 했던 것인데, 그의 목적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고, 대신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그의 이름을 알려지게 만드는 빠른 템포의 행진곡으로 탄생되었던 것이다. <위풍당당 행진곡>의 타이틀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델로>에서 인용되었다. 베르디, 마이어베어 등의 곡과 더불어 가장 기품있고 우아한 행진곡으로 꼽히는 이 곡에서 우리는 소심하고 위축되기 쉬웠던 엘가가 아닌, 영국의 전체 국민들이 사랑하는 성공한 음악가로서의 엘가를 느낄 수 있다.



1904년 말엽에 엘가는 기사 작위를 받게 된다. 동시에 엘가 가족은 우스터로부터 헤레포드 근방의 큰 저택으로 이사하였다. 이보다 앞서 엘가는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콘서트 서곡 <남국에서>(In the South)를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다. 3월에 열린 엘가의 페스티벌은 국왕 부처가 참석한 가운데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버밍검의 새로 생긴 대학의 교수직까지 맡게 된 "엘가 경"은 이제 작곡가로서 정상의 위치에 올라 있었다.그러나 엘가의 소망이던 교향곡은 아직 한 곡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1903년 버밍검 페스티벌을 위해 썼던 오라토리오 <사도행전>(The Apostles)은 지나친 계획의 비대함으로 실패로 끝났고,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에 필적한 작품을 쓰려했던 야심이 불발되자 엘가의 순수 관현악곡에 대한 집념이 다시 고개를 들게 되었다.



1905년 <서주와 알레그로>(Introduction and Allegro)로 자신의 역량이 충분함을 확인한 엘가는 1907년, 드디어 <교향곡 제1번>을 쓰기 시작했다. 이 곡의 첫 악장은 엘가 작품의 상징과도 같은 "품위있고 간소하게"(Nobilemento e semplice)의 지시어로 시작된다. 첫 악장과 끝 악장의 소나타 형식과 함께 이 곡에서 엘가의 특징이 두드러지는 악장은 두개의 가운데 악장이다. 작품을 헌정받았던 지휘자 한스 리히터는 이 곡을 베토벤의 느린 악장과 비교한 바 있지만 실상을 말한다면 엘가 특유의 소박하고 따뜻한 위풍이 담겨 있다. 1910년에 완성된 <바이올린 협주곡>의 느린 악장도 단순하고 차분한 아름다움에 있어서 뒤지지 않는 작품이다. 그러나 엘가가 그의 두번째 교향곡을 발표했을 때 그의 음악은 열렬히 환영받는 걸작도, 시대를 앞서가는 화제작도 아니었다.



엘가는 국가로부터 최고훈장인 공로 훈장을 받는 영광을 누렸고, 1912년엔 런던의 고급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간간히 그는 <영국 행진곡>, <인도의 왕관>등의 작품을 쓰긴 했어도 이전의 작품과 같은 수준의 걸작은 쓰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1차 세계 대전,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처럼 엘가는 전쟁으로 인한 심적 부담감을 겪었고 창작은 점점 어려운 지경이 되고 있었다. 여기서 구원은 다시 한번 그의 아내 앨리스로부터 왔다. 슬럼프에 빠진 엘가를 위해 서섹스의 작은 오두막 "브링크웰즈"를 찾아낸 것이다. 엘가는 그곳의 숲을 산책하고 자연을 통해 휴식을 취하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다. 당연하게 이것은 새로운 걸작을 탄생시켰다. 1918년의 <바이올린 소나타>와 1919 년의 <첼로 협주곡>은 바로 브링크웰즈에서 작곡된 엘가 만년의 걸작들이다. 특히 <첼로 협주곡>은 작곡가 내면의 사상이 간결하고 절제된 형식으로 표현된 작품인데다가, 구세대 작곡가로 전락될 위기에서 그를 구해줄 만큼 새롭고 정력적인 협주곡이었다.첼로 협주곡>이 초연된 5개월 후에 엘가는 아내를 잃었다. 그것은 단순히 가정적인 불행의 차원이 아닌 엘가 창작생활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만년에 맺은 버나드 쇼와의 우정을 계기로 다시 한번 작곡을 시도해보긴 했지만 주목할 만한 결과를 낳지는 못했다. 엘가는 이후 15년을 외롭게 살다가 1934년 2월 23일에 세상을 떴다.



엘가는 그의 생존시에도 그랬지만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위대한 작곡가로 존경받는다. 또한 그는 영국의 민요를 소재로 하지 않았으면서도 민족주의 음악가와 같은 대우를 받는다. 이는 그의 음악언어가 지극히 영국적이었다는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의 따뜻한 선율의 합창곡이 특히 영국 곳곳의 합창단에 의해 자주 불려지는 까닭도 같은 데에 있다. 엘가의 음악을 특징짓는 것으로 따뜻함 못지 않게 확연한 것이라면 거의 언제나 감지되는 우울함이라 하겠다. 빅토리아 시대와 1차 세계대전의 혼란을 겪은 동시대인들이 가졌을 당혹감, 종교적 사회적으로 엘가를 붙어다녔던 괴리감,그리고 예술가의 천성으로 그가 느꼈던 고독감 등은 어둡고 슬픈 색조로 엘가 작품 저변에 언제나 깔리곤 했다.엘가를 영국적이라고 할 만한 또 하나의 근거는 그의 음악언어가 영어의 억양과 흡사하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인지 성악곡이 아닐 때조차도 엘가의 음악은 늘 은근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연상케한다.엘가의 이 "목소리"는 <사랑의 인사>(Salut d'Amour)와 같은 바이올린 소품을 통해 그지없이 친근한 어조를 띠기도 한다. 이 사랑스런 멜로디가 갖는 매력이야말로 <위풍당당 행진곡>에서의 당당한 기품과 함께 그의 이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드는 핵심일지도 모른다. 모든 음악적 배경을 떠난다 해도 사랑의 인사만큼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을 이 세상 어디에서도 달리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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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약가점제 100%활용하기
9월부터 청약가점제가 시행되며, 분양가 규제로 지금보다 10~20% 아파트 분양가가 낮아진다.청약가점제 가점제는  단순하지만 무주택기간이나 부양가족수에 대한 경우 알쏭달쏭하다. 청약 가점표만으로는 주변시세와 비교하면 10~20% 이상 저렴해, 새 아파트 당첨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내집마련의 기초가 될 전망이다. 자신이 가입한 청약통장으로당첨 확률이다.청약통장 유지냐, 청약통장 유지하면서 내집마련이냐의 갈림길에 선 투자자들이 많다.분양가 규제 아파트에 대해 무주택 기간, 청약통장 가입 기간, 부양가족 수에 따라 가점을 부여하고 가점이 높은 사람들에게 당첨 우선권을 주는 청약가점제다. 청약가점제는 무주택기간, 부양가족수, 청약통장 가입기간에 따른 점수를 합산해 당첨자를 결정하는 새로운 주택 분양 방식이다. 무주택기간이 15년 이상, 부양가족수 6명 이상, 청약통장 가입기간 15년 이상이면 84점 만점을 받는다

1;청약가점은 산정은 무주택 기간, 통장 가입 기간, 부양가족 수에 따라 각각 가점이 부여된다. 각 가점을 더한 점수가 본인의 청약가점이다.

1;대단지로 피가 붙는 아파트 청약에 나서야지 피가 붙지 않을 아파트에 가점이 높은 경우 청약해서는 아니된다.청약이 당첨으로 연결되면, 더 좋은 아파트에 청약할 기회를 놓치는 것(재당첨 금지규정)은 물론이고 미래 가치가 떨어지는 부동산에 자산이 오랜 기간 묶일 수도 있다. 오는 9월 이후 분양가 상한제 아파트에 당첨되면 그 아파트는 일정 기간 전매가 제한된다.기간은 지역과 집 넓이에 따라 다르다. 일단 서울·수도권의 전매 제한 기간은 지방에 비해 긴 편이다. 공공택지의 경우 85m²(25.7평) 이하는 10년, 85m² 초과는 7년이다. 민간택지의 경우 85m² 이하는 7년, 85m² 초과는 5년이다.지방은 조금 더 복잡하여 공공택지의 경우는 전 지역이 85m² 이하는 5년, 85m² 초과는 3년이다. 민간택지의 경우에는 투기과열지구이자 충청권은 3년, 투기과열지구이자 비충청권은 1년, 투기과열지구 이외 지역은 6개월이다.

1;무주택 기간을 계산은 만 30세부터 산정하지만, 30세 이전에 결혼하면 결혼후 혼인신고후 부터 무주택기간이다. 25세에 통장을 만들어 35세에 청약한다면 무주택 기간은 5년만 인정되나 25세에 결혼했다면 무주택기간은 10년이다. 무주택기간은 세대주를 기준으로 만 30세 이후를 무주택기간으로 계산하거나 결혼 전에 세대주나 배우자가 집이 있었거나 결혼 후 둘 중 한사람 명의로 집을 샀다면 이 집을 팔 때부터 무주택 기간으로 인정받는다.유주택자와 결혼했다면 유주택이 된다.즉 무주택의 기준은 본인과 가구원 모두 무주택자여야 한다.만 30세 이전에 결혼하면 그때부터 무주택 기간으로 보지만 만 30세 전에 이혼을 했다면 쌓아둔 무주택 기간은 소멸된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만 30세 이후  무주택 기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과거에 집이 있었다면 가입자 또는 배우자가 주택을 처분해 무주택자가 된 시점부터 무주택기간이 새로 시작된다.

1;부양가족 수는 입주자 모집 공고일 기준으로, 청약 신청자와 동일한 주민등록표상에 등재된 가구원 수이다. 가구원은 배우자, 부모·조부모 등 직계존속(배우자의 직계존속 포함), 미혼자녀(직계비속) 수이다. 다만 부부일 경우, 주소지가 달라도 가구원 수에 포함된다.

1;미혼자녀가 30세를 넘을 경우 30세 이상의 미혼자녀는 입주자 모집 공고일 기준으로 최근 1년간 동일한 주민등록표상에 등재돼 있어야 부양가족 수에 포함된다.미혼자녀의 위장전입으로 부양가족 수를 늘려 가점을 높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30세가 넘은 미혼자녀는 1년 이상 동거해야 부양가족으로 인정된다. 따라서 세대합가를 통해 가점을 높이려고 한다

1;부모를 모시면 부양가족 수 32점으로 전체 84점으로 점수 비중이 가장 높다. 이 때문에 부모를 모시고 살면 가점이 높아지지만, 60세 이상 직계존속과 3년 이상 주민등록을 함께하는 경우에만 가점이 인정된다. 또 부모가 1주택이라면 상관없지만 2주택 이상인 경우 5점씩 감점된다.2주택자인 부모는 모시지 않는 게 가점을 높이는 방법이다. 부모가 2주택자일 경우, 5점을 감점당해도 10점15-5점을 받을 수 있어 가점을 올리는 데 유리하다.주택을 소유하고 있는 부모를 모실 경우 무주택자 요건은 세대주 및 세대원 전원이 무주택자여야 한다. 따라서 가점제 대상 주택에 1순위로 청약할 수 없다. 다만 부모가 60세 이상이거나 전용면적 19.8㎡ 이하 주택(아파트 제외)이면 무주택으로 인정된다. 주택을 갖고 있는 아내가 세대분리를 하더라도 남편은 유주택자로 간주된다.5년째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남편이 세대주고 아내 명의로 청약할 때 세대주가 아닌 사람이 청약할 때 직계존속은 부양가족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 경우 남편과 자녀만 부양가족수로 인정된다. 모시고 사는 아버지가 세대주고 아들이 청약할 때도 마찬가지다.

1;부모를 3년 이상 모시고 있으나 가구주가 아니라 가구원이라도 부모와 3년 이상 동일 주민등록등본에 등재돼 있을 경우, 가구원이 가구주로 변경하면 가구원 기간도 가구주로 인정받아 가점을 받을 수 있다.부양하는 부모나 장인·장모(직계존속) 나이가 60세 이하이면서 부모에게 집이 1채라도 있다면, 세대주인 청약자가 무주택자라 하더라도 유주택자 대우를 받아 불리해진다. 반면 모시는 부모(직계존속)가 60세 이상이고 3년 이상 모셨다면 부모가 소유한 1주택까지는 무주택으로 간주해준다. 부양 중인 부모가 2주택 이상을 보유하면 1주택을 초과하는 주택(이를 테면 3주택이라면 2개)마다 5점씩 감점당한다. 그렇다고 2주택자인 부모는 무조건 모시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부모의 2주택으로 5점 감점을 당하더라도, 부양가족 가점(부모 2명인 경우 +10점)이 더 높다면 가점에서 유리할 수 있기 때문에 득실점을 잘 따져봐야 할 것이다.

1;부모를 동일 주민등록등본에 등재해 3년 이상 부양하고 있지만, 부모가 가구주(세대주)로, 본인이 가구원(세대원)이라서 걱정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모집 공고일 이전에만 본인(청약통장 가입자)을 가구주로 변경하면 3년 부양과 이에 따른 직계존속 가점을 인정받을 수 있다.부모를 모시면 9월부터 당장 부양가족수 가점을 받을 수 없다. 3년 이상 계속 동일 주민등록표에 등재돼 있어야 한다. 당장 옮긴다면 3년 뒤에나 가점을 받을 수 있다. 과거 수년간 부양했다가 최근 따로 살았더라도 인정받을 수 없다. 총 부양기간이 아니라 연속해서 3년 이상 부양 여부가 가점 기준이다. 장인.장모 등 아내의 직계존속을 모실 경우도 부양가족으로 인정받는다.

1;미혼 자녀가 주민등록을 지방으로 이전했을 경우 부양가족수에 포함되지 않는다. 다만 입주자모집공고일 현재 주민등록등본에 등재되어 있으면 된다. 따라서 청약할 때 주민등록을 옮겨오면 부양가족수 가점을 받을 수 있다.

1;청약저축에서 청약예금으로 바꾼 경우, 입주자 통장 가입일은 해약과 동시에 재가입하는 경우에는 최초로 저축에 가입한 날을 가입일로 본다.

1;3자녀 특별공급은 유지된다. 3자녀 특별 공급은 평형에 상관없이 분양 물량의 3%가 특별 공급된다.또한 장야인,노부모봉양 모두 과거와 다를게 없다.

1;청약가점이 똑같다면 추첨으로 결정한다. 추첨에서 탈락하면 자동으로 추첨제 물량으로 넘어간다.

무주택기간이나 청약통장 가입기간은 정해져 있으나 부양 가족의 숫자를 늘리는 전략이 절실하다. 무주택기간이나 청약통장 가입기간은 1년을 기다려야 1-2점 늘어나지만, 일정 요건을 갖춘 부양가족은 1인당 5점씩이나 가점을 받을 수 있어 부양 가족수을 늘려 점수을 더 받는 전략이 필수적이다.가점이 너무 낮아서 당첨 확률이 낮을시 청약통장을 갈아타야 한다. 즉 추첨제 배정 물량이 높은 전용면적 85㎡(25.7평) 초과 아파트에 신청할 수 있는 통장으로 바꾸야 할 것이다. 85m²를 초과하는 주택은 채권입찰제를 우선 적용하되, 채권응찰금액이 같은 경우는 가점제(50%)와 추첨제(50%)로 당첨자를 가린다.자신의 청약가점이 높은데도 25.7평형 초과 아파트에 신청할 수 있는 통장을 갖고 있다면, 가점제 배정 물량이 많은 25.7평형 이하 평형에 신청할 수 있는 통장으로 바꾸는 것도 방법이다. 당첨 확률이 높다. 청약가점이 어느 정도 되어야 인기지역 당첨이 가능한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가점이 55점 이상이면 송파신도시 같은 인기지역에 당첨될 가능성이 높으나 브럭에 따라 65점 이상 되어야 할 것이다.

청약저축 가입자의 경우는 현행 순차제를 유지하기 때문에 가점제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청약저축은 동일순위 내에서 경쟁할 때 무주택 세대기간, 저축총액, 납입횟수, 부양가족수, 당해 지역 거주기간 등으로 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청약저축 가입자들은 이번 청약제도 변경으로 내 집 마련을 서두르거나 전략을 바꿀 필요 없이 애당초 세운 계획대로 청약을 준비하면 된다.공공주택 공급 물량을 늘리고 분양시기를 앞당길 예정이다. 또 10년 공공임대주택, 비축용 장기임대주택 등의 물량도 있어 청약저축 통장의 활용도가 커진다. 장기 청약저축 가입자라면 여유 있게 본인이 원해온 지역의 물량이나 인기가 높은 단지에 청약하면 된다.

중소형 청약예금 가입자라면 아예 추첨제 비율(50%)이 높은 중ㆍ대형 청약예금이나 청약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아지는 청약저축에 새로 가입해 당첨 확률을 높혀야 한다. 중대형 예금 가입자로, 무주택자인 경우는 추가로 청약가점을 높이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전용 85㎡ 초과 중대형 주택은 가점제와 추첨제가 각각 50%씩 적용되지만, 채권입찰제를 통해 1차적으로 당첨자가 걸러지므로 실제 추첨 물량은 줄어들 수 있다. 청약저축 가입자나 가점이 상위 10%, 50점 이상 청약자들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 9월 이후에는 유망한 공공주택 분양물량이 많아지므로, 유망 단지를 골라 선별 청약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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